장성에서 734번 도로를 따라 영광IC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가 나온다. 이 도로변 우측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자가 서 있다. 기영정, 이 정자는 1543년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서 지어진 정자이다.

 

지지당 송흠(1459-1547) 은 세조 5년인 1459에 참봉 송가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만고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여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과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노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하였다.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은 송흠은 1538년 청백리에 녹선이 되고, 1696년에는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기영정에는 서로 다른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에는 다른 글씨로 쓴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은 1543년 당시 전라도 감찰사인 규암 송인수가 송흠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암천이 흘러 경치가 뛰어나다. 중종이 송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던 것 같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세상 누구인들 그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아마 송흠도 천하에 효자로써 어머니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으니, 당연히 중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영정은 전쟁으로 소실이 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송인수의 10세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을 하면서 철종 7년인 185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철 늦은 은행잎이 노랗다


방을 놓지 않고 사방을 트이게 했다. 주름이 진 기둥이 기영정의 역사를 알려준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기영정에 오른다. 방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정자가 시원하다. 앞으로 흐르는 용암천가에 아직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노랗다. 정자 앞에는 잎을 다 떨어트린 백일홍이 서 있다. 기영정이란 다른 글씨의 현판이 좌우에 걸려있는 정자는 주춧돌도 자연석이다. 그저 자연을 닮아 평생을 효로써 마친 정자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아마 뒤로 난 도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만 남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으면서도, 노모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송흠. 그에게 내려진 중종임금의 사랑이 깃들어서인가 마음부터 숙연해진다. 수많은 정자를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기영정에 올라 효심(孝心) 하나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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