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부터 동해안 속초와 고성으로 다녀 온 ‘2013 기자 워크숍’. 혼자 200km가 넘는 길을 달렸지만, 남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7일 밤 수원으로 혼자 왔다가 8일 다시 돌아기는 길에, 잠시 들렸던 곳이 있다. 바로 속초 아바이 마을이라고 하는 청호동이다.

 

원래는 기자 워크숍 일정에 아바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갑자기 내린 비로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그곳에 정말 볼 것이 많았는데, 갯배에 줄이 늘어서 있는 바람에 못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가려고 했다면 청호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버스로도 가능했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

 

 

오징어가 통곡을 할 일.

 

속초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 많다고 해도, 역시 오징어가 최고의 특산물이다. 오징어는 연체동물문 두족강 이새아강 꼴뚜기목에 속하는 일부 종들을 말한다. 두족강에는 낙지와 문어, 앵무조개, 참오징어, 피둥어꼴뚜기 등이 포함된다. 이새아강은 머리에 발이 8개인가, 10개인가에 따라 다시 팔완목과 꼴뚜기목으로 나눈다.

 

팔완목에는 문어와 낙지가 속하며, 한국에서 잡히는 꼴뚜기목 종류에는 참오징어, 무늬오징어, 쇠오징어, 화살꼴뚜기, 창꼴뚜기, 귀꼴뚜기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몸속에 석회질의 갑라가 들어 있는 종류는 갑오징어라 부르고, 얇고 투명한 연갑이 들어 있는 종류는 오징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오징어라고 칭하는 것들은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피둥어꼴뚜기를 말한다.

 

 

이 오징어가 유명한 곳은 울릉도와 속초가 대명사처럼 되어있다. 이번 워크숍에 꼭 청호동을 들어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은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오징어 덕장 때문이다. 속초의 오징어 덕장은 10월 중순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이어진다. 바닷바람에 오징어를 건조시키는 속초는, 청호동 일대에 덕장들이 줄을 지어 있다.

 

이 장관을 놓치셨습니다 그려.

 

이른 아침 청호동을 나가면, 밤새 불을 켜고 잡은 오징어들을 풀어놓는다. 그것을 덕장으로 옮겨 바로 손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손질은 주부들이 주로 맡아서 하는데, 그 손놀림이 여간 빠른 것이 아니다. 한 가득 쏟아놓은 오징어들이 금방 바닥이 보인다. 오징어 손질법은 반을 갈라 내장을 분리시킨다.

 

 

내장을 분리하면 바로 물에 씻어 대나무나 가는 철봉으로 된 꼬챙이에 꿴다. 그리고는 덕장의 가로대에 널어 말리는 것이다. 기온이 쌀쌀할 때 말리는 오징어들은 바닷바람에 마르면서 색이 곱게 변한다. 그리고 맛이 좋은 속초오징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오징어를 말릴 때 손으로 잡아 늘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말이다. 속초에서 그렇게 덕장을 돌아보고는 했지만, 손으로 늘리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속초 오징어가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바닷바람이 차기 때문에 오징어를 말리는데 파리 같은 것들이 달라붙지 않기 때문이다.

 

 

속초 오징어 덕장의 모습은 장관이다. 마치 군대의 사열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머리 부분을 대나무에 꿰어 널어놓은 오징어들은 마치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만 보아도 재미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달려간 속초. 그러나 애꿎은 비 핑계로 이 장관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아쉬움이 더 크다.

속초는 행정구역상 고성군, 양양군, 인제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태백산맥의 주요한 산인 설악산으로부터 동쪽 방향으로 흐르는 세 하천에 의해 3분된다.

 

가장 북쪽에 있는 장천천이 영랑호로, 그 중간에 청초천이 청초호로, 제일 남쪽에 있는 쌍천이 동해로 유입된다. 이들 동서방향의 하천은 각각 작은 유역 분지를 이루게 되고 산지에서 많은 흙과 모래를 운반하여 하구에 퇴적시키고, 흙과 모래의 일부가 동해의 연안류를 따라 흘러가다가 하구 입구를 메워 영랑호와 청초호 등의 자연 호수를 이루었다.

 

동서로 발달한 이들 하천은 동서방향의 인구 이동에는 유리하지만 남북 간의 이동에는 별로 유리하지 않았다. 남북 간의 이동은 육로로 이들 유역분지를 넘어 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동해안의 연안류에 의하여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였다. 따라서 속초지역은 농업 지역의 확대와 함께 동서로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하천의 근원지인 설악산은 태백산맥 줄기 중 최고봉인 대청봉(1,708m)이 남서 경계에 위치하고, 마등령·화채봉·칠성봉 등 높이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이 서부와 남부의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설악산은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 계곡의 맑은 물과 수많은 폭포 및 숲, 그리고 신흥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 등이 조화를 이루어 사철 경관이 뛰어나다.

 

 

이러한 지형적 여건은 지역의 중요한 문화기반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초 문화를 규정짓는데 있어 지형적 여건은 그 어느 것보다도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건은 농경문화와 어촌문화, 산촌문화를 생산해 내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수령 500년의 천연기념물 설악동 소나무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20 일대, 신흥사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 보면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51호로 지정 된 속초 살악동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는 속초에서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설악동 소나무는 높이 16.5m, 둘레 4.03m의 크기로 지상 2m에서 분지한 큰 가지 2개는 고사했고 지상 8m에서 크게 2개의 가지로 갈라져있다. 나무의 밑동에 돌을 쌓으면 오래 산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나무밑동 근처에는 돌이 많이 쌓여 있다. 전설을 믿고 사람들이 근처에서 가져다가 쌓은 돌이다.

 

설악동 소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나무로서의 민속적 가치와 함께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주변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덮여있어

 

이 소나무에서 설악산 신흥사 방향으로 올라가다 좌측을 보면, 가을에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이다. 붉은 단풍이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까지 가을에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단풍을 보았지만, 이곳의 단풍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단풍은 보지 못한 듯하다.

 

흡사 붉은 물감을 그대로 숲에 던져버린 듯한 붉은 숲. 이런 단풍이 있어 가을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가 보다. 설악동의 단풍, 푸른 소나무의 싱그러움을 보았다면, 조금 위에 붉은 단풍의 열정을 만난다. 그래서 설악산은 늘 좋은 곳으로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인가 보다.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이 23일로 속초와 고성 지역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23일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나한테는 12일이 된 셈이다. 워크숍 날짜가 년 초에 미리 날을 잡아 놓은 행사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밤늦게 속초서부터 수원까지 택시로 이동을 해야 하는 난리를 겪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 날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의 행사를 대충 접고 다시 주말의 막히는 고속도로의 답답함을 이겨내며 속초로 달려갔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모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3일의 마지막 여정을 인제 백담사로 정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님의 침묵을 탈고 하신 곳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래도록 칩거를 한 곳이기도 하다.

 

 

중광스님을 만난 지 벌써 세월이

 

사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1999년인가 속초에 한 8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이 싫어, 영랑호 곁에 있는 사찰에 소나무 숲에 있는 방 한 칸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 걸레스님이라고 하는 중광스님이 백담사에 머물고 계셨다.

 

중광스님은 백담사 회주이신 오현스님이 거처를 백담사 한편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계셨다. 이 중광스님이 7월 백중 때인가, 내가 묵고 있는 속초 절을 찾아오신 것이다. 당시는 스님들만 보면 무엇인가 답답한 속이라도 이야기를 하면, 한 마디로 해결이 된 듯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깨버린 것이 바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이셨다.

 

 

거기 처사, 가서 막걸리 한 통 받아와라

 

처사란 절에서 부르는 남자신도를 말한다. 신도 중에서 수계를 받으면 거사라 칭하고, 수계를 받지 않으면 처사라고 부른다. 당연히 나는 처사도 안 되는 처지였다. 절에 묵으면서도 불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한테 말씀하셨나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이쯤 되면 슬그머니 부아가 오른다. 스님이라고 해서 언제 보았다고, 술을 사오라는 것도 좋지만 거기다가 반말이다. 사실 중광스님은 총각 때 서울 종로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지만,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기억도 못하실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은근에 부아가 치민다.

 

 

스님이 술을 드세요?”

야 이놈아 술이 아니고 곡차를 사오란 것이야

금방 막걸리 한 통 받아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곡차야. 쌀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차지 무슨 술이냐?”

 

그림이라도 받아 둘 것을...

 

지금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다. 중광스님의 별난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세상을 자연인으로 살아가신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그 때는 왜 그리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머뭇거리는 나에게 스님이 다시 이야기를 한다.

 

왜 막걸리 살 돈이 없냐?”

막걸리 값이야 있죠.”

이놈아 그럼 얼른 가서 사와라. 내 술값은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서 쳐줄 테니까.”

 

 백담사에서 만난 다람쥐와 멧돼지. 다람쥐는 가까이 다가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먹을 것만 먹고 있었다.

이 멧돼지는 이름이 해탈이란다. 매일 이곳에 와서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산다고...

 


참 세상에 나처럼 어리석은 인간도 없을 듯하다. 당시는 중광스님의 그림이 그리 값나가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 그리고 다음해인가 스님은 백담사를 떠나셨다. 얼마 후에 스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입적을 하셨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었다.

 

백담사를 찾았던 사람들은 만해 스님이나 전 전 대통령으로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백담사는 중광스님과의 인연으로 생각을 한다. 10일 오전에 들린 백담사. 그곳에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돌아보았지만, 무심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이 바스락거리며 절을 찾은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랬드래요! 정말 이상한 횟집이 다 있드래요. 이 집은 정말 사람 혼을 빼놓기 딱 좋은 그런 집이었드래요. 수족관에는 축구공보다 다 큰 마리를 가진 문어란 놈 한 마리가 떡 버티고 있질 않나. 아무튼 이 집에서 회를 먹고 나서, 딴 곳에 가서는 다시는 먹을 수 없겠드래요. 그만큼 서비스 최고에 값이 착하다는 것이드래요.”

 

그 지방 말을 흉내를 내려고 하니, 영 어색해서 안 되겠고. 19() 속초에서 몇 명이 회동을 가졌습니다. 남들은 저희들 모임을 달빛 파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미친모임이라고도 합니다. 한 번 만나면 23일을 줄기차게 퍼 마시고, 또 마시기 때문이죠. 인원이라야 많지는 않습니다.

 

 

2년 만에 만난 모임

 

사실 이번 모임은 2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개별적으로는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5명 전원이 모인 것은 이번이 2년 만에 처음입니다. 막내가 지난해에 커다란 수술을 받고나서, 가급적이면 막내를 위해 모음을 삼가기도 했죠. 이 모임은 친 형제들보다 더 의리가 있다고 들도 말합니다.

 

어쨌거니 그렇게 속초까지 가서 모임을 기진 것은, 이 모임 외에도 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시간에 만나 그 곳 인근에서 살고 있는 분의 안내로 찾아간 횟집은 개복치로 유명한 횟집입니다. 개복치를 이용한 물회를 한다고 하네요. 속초시 영랑동 143-171에 소재한 속초삼해횟집이라는 곳입니다.

 

 

이 집에 도착을 해 처음으로 만난 것은 수족관에 있는 문어였습니다. 그 머리가 가히 축구공보다도 큰 것이 반쯤은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아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약을 해 놓아 미리 상을 보아 놓았고요. 그런데 그 상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는.

 

보기 좋고, 먹기도 좋고

 

상에는 일명 스키다시라고 하는 서비스 품목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회라는 것이죠. 나무판에 가리비 껍질로 그릇을 만들어, 그것에 회를 주욱 나열해 놓았습니다. 또 한편에는 물회와 역시 가리비 껍데기에 회를 놓았죠. 그런데 그 회마다 모두 이름을 걸고 있는 작은 삼각기가 하나씩 걸려있습니다.

 

 

개복치살이래요’, ‘오징어래요’, ‘청어래요’, ‘꼴뚜기래요등등. 그 회의 이름이 적힌 기가 있어 걱정 안하고 회맛을 음미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이 집의 첫 번째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모처럼 만났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습니까? 필수적으로 하는 일, 한 잔 해야죠. 그래도 막내가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니, 가급적이면 참으려고 하는 눈치였다는 것이죠.

 

아무튼지 그렇게 분위기 좋게 회에다가 술을 한 잔씩 마시고 있는데, 이번에는 회가 나왔습니다. 광어와 우럭이 한 마리씩 커다란 접시에 떡하니 눈을 부라리고 있네요. 이 녀석들 좀 점에 수족관에서 만난 녀석들이랍니다. 거참 물고기 어생(魚生)’이란 것이 다 그런가 봅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상 위로 올라왔으니 말이죠.

 

 

이 집 정말 놀래 켜도 너무 놀라게 한다.

 

회를 거의 다 먹어가고 있을 무렵 커다란 생선찜을 들고 왔습니다. 음식 맛도 좋은 편이어서 그냥들 먹기가 바빴다고 보아야죠. 그런데 이 집 정말 서비스 하나는 대단합니다. 주문만 하면 손님이 그렇게 많은데도 즉각 달려옵니다. 이 집 종업원들이 힘들겠다고 한 마디씩 합니다.

 

그리고 매운탕에 누룽지까지. 사실 이 집을 밥을 먹겠다고 하면 새로 밥을 지어다 주는 집입니다. 하지만 이미 배가 포화상태인고로 막내만 밥을 먹고, 우리들은 그저 술잔을 더 채울 수밖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날 우리가 먹은 술이 소주 7병에 맥주가 4병인가 먹었습니다. 술값만 해도 33,000원입니다.

 

 

 

계산서를 받아보니 이것 믿어야 합니까? 그렇게 잘 먹었는데 술값 포함 139,000원이라는 겁니다. 말이 되나요. 이게. 사람 참 여러 번 놀라게 만드는 집입니다. 회 잘 먹는 분들은 참 좋을 듯합니다. 어쨌거나 이 집 다음에 꼭 다시 들려봐야겠습니다. 또 무슨 놀랄 일이 있는지.

속초에 가면 반드시 들려야할 곳이 한 곳이 있다. 바로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갯배 도선장과 청호동인 아바이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는, 이제는 속초의 명물이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이기도 한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12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갯배. 이 두 가지가 청호동 주민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속초시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도선인 갯배는 거룻배이다. 이 갯배는 일제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운항이 되기 시작했다. 6,25 동란 이후에 함경도의 피난민들이 이곳에 움막형태의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호동에는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자꼬치마을, 신창마을, 정평마을 등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거주하던 곳의 이름을 붙인 집단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연간 20만 명이 이용하는 갯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갯배는 1988년에 새로 FRP35인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청호동 주민들은 무료로 이용을 하고 있다. 갯배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년간 15 ~ 20만 명이 이용을 하고 있다. 이 갯배는 편도 200, 왕복 400원을 요금으로 받고 있다. 12일이 방영되고 난 후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고 한다.

 

23(). 속초 중앙시장을 들러보고 난 후 갯배에 올랐다. 승객들이 갈고리를 들고 배를 움직이게 하는 철선을 잡아당기면서 이동을 하는 갯배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갯배의 운항을 지도하는 청호동 주민의 서슬 퍼런 야단이 있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붙어 똑바로. 그리고 거기 이리 나와 배 끌어

 

 

이건 상당히 강압적이다. 처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잘 못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불과 단 몇분 안에 건너가지만, 그 사이에 연신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재미로 아바이마을을 찾아가는가 보다.

 

아바이마을의 애환 갯배

 

사실 속칭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은 우리나라 최대의 피난민촌이다. 공산치하에서 억압을 받고 살고 있던 북한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지만, 정든 고향을 잊지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정착을 한 곳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청초호 바닷가 모래톱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빠르면 보름, 길어보았자 석달이라는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벌써 60년 세월을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갯배는 실향민들의 애환이 가득 담겨있다. 일제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생긴 도선인 갯배는 당시 부월리 2(청호동)과 속진(중앙동)이 맞닿아 있던 것을, 속초항의 개발을 위해 준설하면서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이 되면서 수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속초읍에서 갯배 한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갯배를 운영할 때는 트럭 한 대와 우마차 한두 대를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어업에 주로 종사를 하던 아바이마을의 어민들이 수복 후 사용한 배는 피난 당시 타고 월남한 범선이 창이배와, 강원도와 경상도의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오마리배가 주종이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던 배는 19590년대에 들어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속초시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하였다. 1963년에 양양군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이 되는데 이들 어민들이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주된 속초의 관광수입원이 된 아바이마을과 갯배

 

드라마 가을동화로 인해 일본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바이마을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거기다가 12일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기도 하다. 12일이 이곳을 거친 후 사람들은 아바이마을을 찾기 시작했으며, 아바이마을에도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닌 점차 관광객들로 인한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 년에 20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갯배를 이용하는 요금만 해도 연간 4,000만원이라는 수입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 이곳은 점차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가, 이제는 속초시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3일에 갯배를 타고 찾아간 아바이마을. 바닷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그맣게 꾸며진 찻집에는 연인들이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골목에 들어서면 장사를 하는 분들이 손님을 불러들이느라 시끄럽다. 슬픔의 상징인 갯배와 아바마을이 이제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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