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리고, 들리면 곡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은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를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존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을 천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을 하였다.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상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두었다.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여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 반야(般若)2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금상(今上) 16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사적 제156호인 무성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고 불렀으나, 숙종 22년인 1696년에 임금이 내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무성서원이라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전국에 4개 서원만이 남았는데, 무성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이 무성서원이 있는 무성리에는 몇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성리 뒷산인 성황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송정(松亭)이다

 

송정은 절경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들판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산죽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무성리 정극인의 동상이 서 있는 우측, 성황산을 소로 길을 오르다가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나온다. 무슨 일로 하마비가 이렇게 성황산을 오르는 길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마 과거에는 이곳이 무성서원을 들어가던 길목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하마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단아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송정(松亭)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 숲에 자리한 정자라는 뜻일까? 아니면 소나무처럼 그렇게 마음을 푸르게 살고 싶어서일까? 송정이란 단순한 이름을 붙인 것이 어쩌면 이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세상을 등지고 세월을 보낸 7광 10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린 선비들

 

송정은 광해군 재위시절 지어진 정자이다.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정자를 지었다. 광해군의 재위가 1608 ~1623년이었으니, 송정이 처음 지어진 지는 이미 400년 가까이 되었다. 이곳에 낙향한 선비들을 세상 사람들은 7광, 10현이라 불렀다. 이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이 송정에 올라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명예를 초개같이 대했다. 아마 주변에 무성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7광(狂)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쳐버린 7명의 선비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해보지만 딱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10현(賢)이란 어진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르킨다. 10현이라 함은 7광에 이름이 있는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 등을 말한다.

 

 

 

이들 7광 10현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담소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들 중 광해군의 재위를 마친 후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정자에 모인 이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자연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송정의 모습에서 알 수가 있다.

 

자연 속에 묻힌 정자 송정

 

송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 정도의 작은 정자다.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추를 놓았다.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마루다.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다. 마루 한편 밑을 보니 아궁이가 있다. 여기에 불을 때서 겨울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헸다. 주변에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고, 바람에 날리는 산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다. 스스로 자연인양 자랑을 하지 않는다. 송정이란 정자의 이름이 '왜'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만 같다. 7광 10현이 모여 스스로 자연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변함이 없는 마음, 그리고 산죽과 같이 곧은 마음을 갖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송정에 깃든 속내를 읽은 후에, 정자의 작음은 오히려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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