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5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이동면 천리 75번지 적동저수지 입구 저수지 하단 제방 좌측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겨 정측 1칸의 전각을 짓고 안치 했었다. 후에 용덕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수가 좋은 절 용덕사

 

용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인시 이동면의 성륜산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용인에서 45번 도로를 이용해 이동면에서 31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찾아갈 수가 있다. 용덕사 뒤편 산언덕으로 오른 곳에 있는 극락전 뒤 바위에, 암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한다.

 

용덕사가 위치한 성륜산은 용인의 남쪽, 안성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은 높은 산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는 높고 깊은 산이다. 절은 이 산의 중턱에 위치하여 맑고 깨끗한 공기와 탁 트인 시원한 풍광, 그리고 맑은 약수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절 안 곳곳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축과 유물들이 있어 유서 깊은 사찰임을 보여준다.

 

절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용덕사가 신라 문성왕 때 염거(廉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절에 전하는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번창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 아래 이동면 일대의 땅 대부분이, 용덕사에 속해 있었을 정도의 사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입상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육계의 흔적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아있다. 가슴 앞에서 둥글게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文)이 길게 처지면서 하반신에서 양 다리에서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도식화된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이후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결은 시무외여원으로 보이나 오른손에는 보주를 쥐고 있다. 수인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도식화된 경향을 일부 보이고, 신체는 부피감 없이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이 이채로워

 

용덕사의 석조여래입상은 미륵전 안에 모셔져 있다. 예전 신라시대에는 거밀현의 관아에 모셔졌던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에서 나타나는 장신화 경행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속조여래입상은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끌어올려 만개하지 못한 꽃봉오리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미륵도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왜 관아에 있었을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문화재답사는 늘 궁금증이 커 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 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호인 ‘용인목신리석조여래입상(龍仁木新里石造如來立像)’.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용인시 원삼면 목신리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여래입상이다. 입상의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마멸이 심해 정확한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넓고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본래는 원만한 인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마멸이 심해 처음 조성했을 당시 형태는 아예 추정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면서 수도 없이 만날 수가 있다.

 

고려시대 이전의 석조불상으로 추정해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의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에 두껍게 걸치고 있는 형태이다. 어깨 부분에서 굵은 옷 주름이 보이고, 가슴에는 U자형의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맞댄 형태이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 시무외여원인의 모습이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석조여래입상의 형태로 보면, 옷 주름이나 신체 표현에서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고식적인 법의의 형태인 통견이나 손의 형태가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것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은 제작시기가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소중한 문화재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간수해야

 

찬찬히 살펴보아야만 그 형태를 그나마 추정이라도 알 수 있는 목신리 석조여래입상.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어, 제대로 된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눈과 코는 식별이 불가능하지만, 목까지 길게 내려온 귀나 도톰한 입술 등으로 볼 때 상당히 인자한 표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손과 발, 주름 등도 확연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게 파인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조성 당시에는 꽤나 걸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비바람, 혹은 막무가내 식인 훼손에 의해서 사라졌다.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문화재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언잰가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문화재 답사를 하고 있을 때, 어린 학생에게서 참으로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다. 구례 화엄사에의 문화재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항생 하나가 말을 건넨다.

 

“선생님 이 문화재는 언제 적 거예요?”

"신라시대에 연기조사가 조성을 했다고 전해지지“

 

낯 뜨거운 일화,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는 곳을 효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신라 때 문화재도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있는데, 왜 조선시대에 조상한 불상이나 탑들을 보면 다 부수어지고, 심지어는 머리가 없는 불상들이 그렇게 많아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문화국민이라고 말로는 떠들면서 정말 무책임한 어른들이네요.”

 

중학생 정도인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성인이라면 역사적인 사건이나 종교적 이야기 등, 할 말이 많았겠지만 이 어른 아이에게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얼굴만 벌게진 채 말을 이을 수가 없다. 그때처럼 낯 뜨거운 일은 없었던 듯하다.

 

하기야 백번 천번 그 아이의 말이 맞다. 우리는 우리 것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말로는 문화민족이라고 참 쉽게도 표현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화민족이라는 것일까? 담당자가, 국민이, 그리도 책임 있게 보존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 소중한 문화재를 올바로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그 뒤로 정말 최선을 다해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썼다. 그 이상은 부끄러운 선대로 아이들에게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후손들에게 모두 부끄러운 조상들이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전에서 논산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 부적면 덕평리 방향으로 가는 691번 도로가 연결이 된다. 이곳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마을 안을 지나면 산 밑에 넓은 사지가 있다. 그 입구에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소재지는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산 4번지로 되어있으나, 서 있는 곳은 평지와 다름이 없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으로 추정되는 이 여래상은 운제사(雲際寺)’의 옛 절터에 있던 석불입상이다. 이 불상을 사람들은 관촉사 은진미륵의 작은어머니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석조여래입상의 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은진미륵불과 마주한 형태로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복스럽고 자애로운 얼굴

 

오후에 찾아간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몇 년 전인가 이곳에 들려 보았을 때는, 그저 바쁜 걸음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번 답사 때는 주변부터 찬찬히 훑으면서 자세히 석조여래불을 들여다본다. 많이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풍만한 상이다. 고려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불신의 높이가 1.95m나 된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눈과 코, , 턱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얼굴의 상이 두툼하고 둥그런 형태에서 후덕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볼 부분이 떨어져 나가 귀의 모습을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머리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것이 복스럽고 인자한 모습이다.

 

 

 

떨어져 나간 팔이 보기 흉해

 

가슴부분을 들어낸 통견으로 조성이 된 법의는 두텁고 무겁게 느껴진다. 옷 주름은 양 어깨에 걸쳐 가슴 아래서부터 U자 형으로 흘러내린다. 다리 윗부분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양 발에 큰 타원을 만들고, 옆으로는 주름치마로 표현하였다. 이런 형태는 경상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의 법의에서도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그 형태가 것으로 보이는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현재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55호이다. 현재는 법의 끝자락 까지만 나타나 있어, 그 밑에 어떤 모양의 대좌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석조여래입상의 왼손은 팔꿈치 이하 부분이 절단되어 있다. 오른손도 온전하지는 않다. 왼손의 위치와 함께 가슴 안쪽으로 들어 올려 여원인을 짓고 있는 오른손의 모양으로 보아,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으로 생각된다. 우수한 형태의 고려석불로 추정되는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배례석과 팔각기둥이 옛 모습을 말해주고

 

석불의 앞에는 방형판석 2매와 장방형의 연화문 배례석 1매가 놓여 있다. 그 옆 철책 안으로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팔각 돌기둥 1개가 있는데 높이는 1.08m이고, 상부에는 4각의 촉이 있다. 이 돌기둥은 아래쪽은 팔각이고 위쪽은 사각형인 특이한 형태이다. 이런 석조여래입상과 판석, 돌기둥 등으로 보아, 이곳에 제법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일까?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아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같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래불은 현재의 부처님이고 미륵불은 후세의 부처님이라는 점에서,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 어머니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비록 많이 훼손이 된 형태에서 그 온전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상으로 조성이 된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점점 힘들어지고만 있는 세상살이에서, 그 미소만큼이나 편한 마음 한번 가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경내 한편에 눈에 발목이 묻혀있는 석불 한기가 보인다. 날이 추워서인가 박물관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한 듯하다. 이런 추운 날 밖에서 저리 서 있다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다가 괜히 웃고 만다.

 

석불입상을 보고 웃은 이유는 그 모습이 균형미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 추운 날 만난 석불입상의 입가에 흘린 엷은 웃음 때문이다. 돌이다가 어떻게 저리도 따듯한 미소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웃음 하나가 세상 온갖 고통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하다.

 

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지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인근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이 거대석불 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석불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석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크다. 전체적인 모습은 굴곡이 없이 일직선의 신체로 표현을 하였다. 어깨와 하체가 일직선으로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살이 올라 풍부한 느낌을 준다. 반쯤 감은 눈과 입술 등의 윤곽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밋밋한 장식의 표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린 법의는 아무런 무늬가 없이 발밑까지 내려져 있다. 법의는 가슴께까지 깊게 파여져 있으며, 어깨부터 팔을 따라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표현한 주름이 이 석불입상에서 가장 표현을 강하게 한 부분이다. 두 손은 가슴께로 올렸으며, 그 아래ㅔ로 법의가 U자의 주름으로 발목까지 내려가고 있다.

 

 

손은 투박하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이유도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 때문으로 보인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트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손가락의 표현도 어디인가 멋스럽지 못하다.

 

충청도 일원에서 보이는 고려불의 특징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일원에서 발견이 된 고려불의 특징이다. 중앙의 장인들이 아닌,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된 석조여래입상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석불의 특징은 거대불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실내에 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래 기단부가 눈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봄철 눈이 녹으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받침돌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균형미는 떨어지는 석불입상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런 위로 덕분에 이 추운 날에도 길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찾은 날, 한 여인이 쉬지 않고 합장을 하고 석조여래입상의 전각을 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 빌고 있는 것인지. 하기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원이든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청풍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모양이 풍부하고 자비로운 상이다.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코는 한편이 마모가 되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되었으며, 콧방울이 무너져 내렸다. 인중이 뚜렷하고, 양 볼은 두툼하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양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이다. 그러한 석조여래입상의 주위를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도는 이유는 무엇인지.

 

"날이 많이 차네요."

"예."

"무슨 소원을 그렇게 비세요."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서요."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빌면 좋아지실 겁니다."

"예,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와서 이렇게 빌고 갈 때마다 많이 나아지는 듯해요."

"다행입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남편이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분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석불에 정성을 드린다고 정말로 나아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면, 무슨 소원인들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박한 모습에서 전해지는 정다움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목이 두툼하여 자칫 비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석조여래입상. 법의는 앙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걸치고, 안에는 내의를 받쳐 입었다. 배에서 매듭을 지어 V 자 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두발은 발가락까지 표현을 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밑에는 대좌를 밟고 있다. 전체가 일석으로 조성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누군가 단주 하나를 발 등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렇게 단주를 놓고 간 사람도, 마음속에 간절히 비는바가 있었을 것이다.

 

청풍 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자애로움이 있다. 생명이 없는 돌로 조성한 석불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의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 서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전각을 조성하고 복원을 한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굵게 표현이 되어 비대한 감마져 있다

통견으로된 법의는 v 자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누군가 발들 위에 단주를 올려놓고 갔다.

 

사연도 많은 문화재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문화재와 고택, 정자, 고분, 능원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다녔다. 벌써 그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늘 밖으로 불러낸다. 자다가도 문화재 답사라면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는 했다. 그 많은 문화재 안에는 정말 따듯한 이야기도 있었고, 가슴 시린 사연도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사연을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문화재는 일부러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느 문화재는 파손된 부분을 보수를 하면서 엉망으로 해놓아, 헛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누군가 문화재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들도 있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이번 답사 길은 제발 마음 아픈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도 문화재의 인녕과 함께, 이 여인 제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전히 비는 마음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