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8-1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담장 옆에 서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무량사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柱)’가 서 있다.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한 것이다.

 

이 깃발을 걸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쇠 등으로 만든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청주,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등에 드물게 철당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당간을 붙들어 매는 버팀돌인 두 기둥만이 남아 있다.

 

고려 전기에 마련한 무량사 당간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 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다. 또한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겨 넣었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위 아래로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세울 수 있는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 세월 그 자리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눈을 밟는 것만으로도 죄스럽다. 당간을 보기 위해 담장 밑으로 다가선다. 당간을 받는 중앙에 돌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대충 손으로 쓸어내니, 가운에 당간을 받는 자리가 보이고, 주변은 둥그렇게 돋을새김을 해 놓았다. 이렇게 돌로 다듬어 세워 놓은 당간지주.

 

남들은 그저 두 개의 돌기둥을 왜 세워놓았을까 조차도 생각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둥은 나름대로 절의 크고 작은 행사 때 당을 매달기 위한 구조물이다. 이 당간에 얼마나 많이 당이 걸렸던 것일까? 천년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간지주가 새삼 경이롭다.

 

 

많은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을 만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낸 석조물들. 절을 찾을 때마다 그런 옛 문화재들에 대해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지난 선조들과의 조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다녀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 사철을 돌아다니고 있는 내사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마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숱한 정성을 만난다. 그런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 옆에 서서 비바람과 눈을 맞으면서 천년 세월을 서 있는 무량사 당간지주. 그 아무렇지도 않게 버틴 천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고마움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이다.

귀부란 비석받침을 말한다. 비를 세울 때는 밑에 비석받침은 거북이의 몸체를 이용한다. 신라시대의 귀부는 거의가 거북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치면서 귀부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몸체는 거북이의 몸체에, 얼굴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비란 어떤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거나, 벌어진 일을 적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기에 비석받침인 귀부는 딴 석조물에 비해 상당히 무겁게 조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귀부는 비석의 받침으로 이용을 하고, 그 위에 비를 세우게 되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용을 조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비의 형태이다. 그러나 예전 비의 모습을 보면 이런 통상적인 비 받침의 형태를 벗어나는 것들도 있다.

 

 

머리가 비뚤어진 귀부, 무슨 이유인가?

 

부여군 부여읍에 자리하고 있는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는 많은 석조물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탑과 석조불상 등, 그리고 각종 석물로 된 옛 자료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그 중에 귀부가 보이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비석받침과는 동떨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한 마디로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서천군 군사리에서 발견이 된, 고려시대인 11~13세기 조성된 귀부가 있다. 거북의 등껍질인 육각형의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그리고 등에는 육각형 문양 외에 나뭇잎과 같은 무늬가 둘러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물인 구례 연곡사 동부도에는 날개와 같은 조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서천 군사리의 귀부 등에는 나뭇잎과 같은 조각이 보인다.

 

 

얼굴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귀부에서 흔히 보이는 험상궂은 용의 안면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북이의 안면도 닮지 않았다. 얼핏 보면 장승의 해학적인 모습과도 같은 모습이다. 거기다가 얼굴이 똑바로 놓이지도 않았다. 약간은 삐뚤어진 형태가 해학적이다. 발은 거북이의 발이라기보다는 구부러진 것이 용의 발을 닮았다.

 

누워버린 귀부의 얼굴

 

박물관 한편에는 많은 석조물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이곳에 잇는 귀부는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몸체는 네모나게 조형이 되었으며, 등에 흔히 표현을 하는 육각형의 귀갑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몸체를 네모나게 조각을 했는데, 목은 한편이 땅에 닿도록 비틀어져 있다. 얼굴은 거북도 용도 아닌 해괴한 모습이다.

 

 

이런 비석받침과는 대조적인 비석받침도 있다. 조각이 난 채로 전시가 되어있는 사실적인 비 받침은,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 터에서 발견이 된 비석받침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보양이 사실적이면서도 힘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귀부의 형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각의 형태와,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형된 형태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저 재미로 보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귀부이긴 하지만, 그 안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단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석받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혹 대단하지 못한 세상을 산 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탄 때문에 이런 조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당시 지금의 세대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제대로 보려고 그렇게 누웠을까? 빗뚫어지고 고개를 돌려버린 비석받침. 그런 비석받침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기회를 삼는다.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을 가서 살았다는 ‘궁집’을 돌아보고 난 뒤 앞 정원을 거닐다가 작은 석교(石橋)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리를 건너보니 작은 돌다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가 않은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작은 돌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자라, 다시 다리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2.5m 남짓인 이 돌다리가, 그냥 예삿다리가 아니라는 알았다.

 

 

 

하나의 돌로 조형한 돌다리

 

돌다리는 둥글게 위가 불룩하니 구름다리 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양편 다리 끝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해태가 앉아있어, 사방에 해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다리는 턱이지게 올려졌다. 다리의 옆부분에는 길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바닥을 놓고, 그 밑으로는 원형의 꽃문양을 세긴 버팀목을 질렀다.

 

그런데 이 다이가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갖은 조형물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어디 한 곳도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갖고 참 정교하게 조형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어디 한 곳이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놀아운 조상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

 

돌다리를 살펴본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 돌다리는 커다란 화강석 한 장을 이용해 조성을 한 것이다. 조형물을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커다란 돌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 작지 않은 돌다리를 한 장의 석재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 조상님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긴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을 보고 있노라, 서산에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적도 있었다. 부도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에 새겨진 받침의 용두와 머릿돌의 꿈틀거리는 용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한 뛰어난 석재를 다루는 선조들이었다.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널린 석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내 위에 걸린 이 돌다리는 그것들 중에서도 눈에 띤다. 단 한 장의 석재를 깎아내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이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 돌다리 하나가 7월 17일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답사를 한 나에게, 선조들의 배려인 듯해 고맙기만 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곳은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리 사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으로는 지릅재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절터.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터에는 현재 미륵리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미륵리 사지. 현재는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중창 중에 있는데, 본존불인 석불입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커다란 귀부가 하나 놓여있다. 그 귀부의 크기로 보아, 이곳으로 운반을 하는 데만도 대단한 역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미륵리 사지에 소재한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이 귀부는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나 된다. 그 모습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과연 귀부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귀부는 머리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귀부의 형태는 거북이 등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의 경우는 거북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우선 등에는 거북등에 있는 육각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쪽 왼편 등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타고 오르듯 양각되어 있다. 그것도 주변을 파내고 양각을 한 형태이다. 등을 보면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올라있다. 이 형태도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다. 머리는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길게 - 자형으로 판 입과 그 위에 작은 콧구멍, 그리고 양 옆에 동그랗게 표시한 눈 등이 사실적 표현을 했다. 앞발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다.


거북이 등에 파 놓은 비좌는 거북 모양에 비해 크지가 않다. 1970년대부터 발굴을 시작한 미륵리 사지에서, 수차례 발굴을 했으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귀부 위에 올려 질 비의 몸돌은 조성되지가 않았다는 것인지. 이 미륵리 사지에 이러한 귀부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완성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미륵리 사지에 있는 귀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생긴다. 그 첫째는 바로 이 귀부를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더구나 이렇게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있는 그 앞에 자리한 귀부. 등에 내 놓은 비좌로 보아서는 귀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등에 파 놓은 홈이 과연 비좌일까 하는 점이다.



비좌로 보기에는 형평에 맞지가 않는다. 적어도 이만한 귀부에 올릴 비문이라면 그 비의 몸돌 역시 상당히 클 것이다. 그런 큰 비문의 몸돌을 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를 올리는 비의 받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이것이 비를 받치는 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시대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등에 새기는 문양이나, 거북이 몸에 용머리 등,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미륵리 사지의 귀부는 단순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 거북이 형태로 다듬어 놓은 귀부의 뒤편 우측 꼬리 부분이다. 꼬리 부분에는 돌을 쪼아 내려는 듯 여러 개 구멍이 나 있다. 이렇게 일렬로 나 있는 구멍으로 보아, 이 귀부는 미완성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귀부라면 이해가 간다. 귀부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각을 하는 도중에, 중단이 되어 그대로 방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석굴식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 등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 절에서, 왜 유독 이 귀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륵리 귀부가 주는 의문점

미륵리 사지에는 현재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첫째는 하늘재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 탑이다. 그리고 본존불인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충청도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식 법당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사이에는 석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 역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경내에는 당간지주와 불좌대 등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이 미륵리 사지의 창건 당시의 사격이 어느 정도였는가 가늠이 간다.



이 몇 기의 문화재의 연대가 모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밝혀져, 미륵리 사지는 고려 초기에 있던 미륵대원이라는 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불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북녘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부는 언제 조성이 된 것이며, 무슨 연유로 이렇게 거대한 돌 거북을 조각한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이 거북의 머리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본존불인 석불입상과 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에서 조성이 되었다면, 이것을 귀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인근의 사지인 원주 부론의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와,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도 같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도 비가 서 있으며 이 비의 귀부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때 미륵리 사지의 귀부가 과연 귀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등에 새겨지는 문양이 없다는 점. 필요이상으로 크기가 크다는 점,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귀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석조물은 아니었을까?

거북이 등에 새겨진 두 마리 작은 거북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귀부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 쌓인 미륵리 사지를 오랜 시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귀부가 눈에서 떠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는 사지가 전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사지를 ‘한계사지’라고 한다. 11월 14일 오후에 찾아간 한계사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미리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사지를 둘러보았다.

한계사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이 절은, 조선시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계사가 있던 자리라고 본다. 1984년의 발굴 결과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금당터와 부속 건물터 등을 확인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을 오르는 고갯길에서 만나는 한계사지. 그러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계사

이 사지의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석탑과 석등, 석불 등의 재료와, 고려와 조선시대의 명문기와가 많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한계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계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는지, 정확히 언제 적에 사찰이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간다. 좌측 길 아래 장수대라는 정자가 보이는 도로 우측에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자리한다.



한계사가 서 있던 곳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들이 서 있어, 한계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었는지 가늠이 간다.(위)  한계사에서 발굴된 각종 석조물들과(가운데) 전각터(아래)  


어렵게 허락을 얻어 들어간 한계사지, 놀라워

관리사무소에서 한계사지 뒤편을 보면 기암괴석이 솟아있다. 앞으로도 마치 뾰족한 원뿔모양의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놓여있다. 한계사지로 오르는 길에는 굳게 철문이 막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덜려있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은지라, 철문을 열고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걸어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밑에서 보이던 기암괴석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인다. 오악(五嶽) 중 한 곳인 설악이 아니던가. 바라다만 보아도 그 장엄함에 눈을 땔 수가 없다. 폐가가 서 있는 뒤로 한계사지가 펼쳐진다. 한계사지 안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두 기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석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눈앞에는 많은 석물들이 철책 안에 자리한다. 각종 주추들이며 문 자귀틀, 그리고 석조로 조형한 짐승(사자인 듯하다)과 여러 조각으로 난 석물들이 즐비하다. 그 한편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옛 전각 터들이 보인다.

석물로만 보아도 옛 한계사를 그려볼 수 있어

석물 중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도 이 석조물들로만 보아도 한계사라는 옛 절이 그리 조그마한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에는 안상을 새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아마도 배례석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금당터 등은 석축이 남아있어 알 수 있지만, 여기저기 돌 축대 흔적으로 보아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좌나 다양한 문양으로 새겨진 주춧돌만 보아도, 이 한계사가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사가 언제 적에 누가 창건을 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석조물과 기와 등 명문으로 살펴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조에 와서 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도 멈춘 인제 한계령 고갯길 한편에 남아있는 한계사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더욱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나 말없는 석조물들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암괴석 위에 걸린 늦가을의 푸른 하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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