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는 사지가 전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사지를 ‘한계사지’라고 한다. 11월 14일 오후에 찾아간 한계사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미리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사지를 둘러보았다.

한계사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이 절은, 조선시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계사가 있던 자리라고 본다. 1984년의 발굴 결과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금당터와 부속 건물터 등을 확인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을 오르는 고갯길에서 만나는 한계사지. 그러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계사

이 사지의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석탑과 석등, 석불 등의 재료와, 고려와 조선시대의 명문기와가 많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한계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계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는지, 정확히 언제 적에 사찰이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간다. 좌측 길 아래 장수대라는 정자가 보이는 도로 우측에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자리한다.



한계사가 서 있던 곳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들이 서 있어, 한계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었는지 가늠이 간다.(위)  한계사에서 발굴된 각종 석조물들과(가운데) 전각터(아래)  


어렵게 허락을 얻어 들어간 한계사지, 놀라워

관리사무소에서 한계사지 뒤편을 보면 기암괴석이 솟아있다. 앞으로도 마치 뾰족한 원뿔모양의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놓여있다. 한계사지로 오르는 길에는 굳게 철문이 막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덜려있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은지라, 철문을 열고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걸어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밑에서 보이던 기암괴석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인다. 오악(五嶽) 중 한 곳인 설악이 아니던가. 바라다만 보아도 그 장엄함에 눈을 땔 수가 없다. 폐가가 서 있는 뒤로 한계사지가 펼쳐진다. 한계사지 안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두 기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석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눈앞에는 많은 석물들이 철책 안에 자리한다. 각종 주추들이며 문 자귀틀, 그리고 석조로 조형한 짐승(사자인 듯하다)과 여러 조각으로 난 석물들이 즐비하다. 그 한편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옛 전각 터들이 보인다.

석물로만 보아도 옛 한계사를 그려볼 수 있어

석물 중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도 이 석조물들로만 보아도 한계사라는 옛 절이 그리 조그마한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에는 안상을 새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아마도 배례석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금당터 등은 석축이 남아있어 알 수 있지만, 여기저기 돌 축대 흔적으로 보아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좌나 다양한 문양으로 새겨진 주춧돌만 보아도, 이 한계사가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사가 언제 적에 누가 창건을 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석조물과 기와 등 명문으로 살펴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조에 와서 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도 멈춘 인제 한계령 고갯길 한편에 남아있는 한계사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더욱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나 말없는 석조물들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암괴석 위에 걸린 늦가을의 푸른 하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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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성기석 문화가 발달이 되어있다. 성기석은 일종의 주술적인 기원을 띠고 있다. 대개는 성기석을 마을에 조성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을의 지기를 누르기 위한 방법으로 조성을 한다. 마을에 화가 미치거나, 재앙이 잦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그러면 ‘음(陰)’한 기운을 눌러 마을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을에 남자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여자아이가 많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럴 경우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성기석을 갉아서 물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등이다.

마을에 조성하는 성기석은 대개는 길고 위가 뾰죽하게 조성을 하기 때문에, 쇠침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 음한 기운이 감도는 지맥을 차단하여, 마을에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한 방법이라고 예전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했다.


김제 귀신사에는 석수가 있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번지에 소재한 귀신사(歸信寺). 귀신사에 대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에 각주에서 언급한 화엄십찰의 하나인 국신사(귀신사의 옛 이름) 때문에, 귀신사의 창건연대를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으로 짐작할 뿐이다.

귀신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연대적으로 의상이 창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귀신사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이 귀신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수가 경내에 자리한다. 2월 17일 오후, 눈이 내린 길을 따라 김제에 자리한 귀신사를 향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찾아간 귀신사였지만, 설경이 보고 싶어서다. 고찰은 눈이 내렸을 때, 그 모습 또한 색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 절 안에 있는 문화재 답사만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귀신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대적광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수’이다.

석수 위에 세운 돌기둥은 무엇일까?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짐승이란 뜻이다. 귀신사에 전하는 석수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남서쪽 솔개봉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자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자상은,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성기석을 닮은 석수 위의 석주. 한편이 닳아있다(아래)

눈이 내려 사자상의 얼굴이며 등에 눈이 쌓였다. 그런 모습도 운치가 있으나, 좀 더 정확한 모습을 보기위해 얼굴 위에 덮인 눈을 치운다. 앞다리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사자상. 그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위에는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등 위에 올린 돌기둥은 그렇다 치고, 돌기둥 위에 올린 또 하나의 돌은 영락없는 남자의 성기모습이다.

득남을 기원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이었을까?

도대체 왜 이런 성기석 모양의 돌을 절에 세운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우리 풍속에는 화재 등을 막기 위해 해태를 조각하여, 화기를 막는 등 금수를 이용한 재액의 방액을 한 경우가 많다. 이곳의 지기가 좋지 않아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석수를 조각해 세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는 해석이다.



문제는 그 석수 위에 올린 성기석이다. 주름진 원통의 돌기둥 위에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성기석을 조각한 듯하다. 그 한쪽 면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 필요에 의해 그 면을 갉아갔다는 생각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꽤 오래 전인가 보다. 귀신사를 처음으로 방문할 때 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귀신사 석수의 위에 올린 성기석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처럼 들린 귀산사에서 만난 석수. 흰 눈을 맞은 석수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훼손된 부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요즈음은 돌을 갈아 마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석수 위에 성기석을 바라보다가 괜한 웃음만 웃어본다. 글쎄다, 저렇게 사자 등에 남자의 성기석을 올렸다는 것은, 그렇게 용맹스런 남자아이를 얻기 위한 기자속은 아니었을까?


내가 석수를 보고 웃은 까닭은, 저 석수위의 돌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고, 정말 장대 같은 아들을 낳기는 했을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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