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1-5번지에는,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석조관음보살 입상 한 기가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증평 시내에서 보강천을 건너 서북쪽으로 2km 쯤 떨어진 미암1리 미륵댕이 마을에 있는, 이 관음보살입상은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륵사라는 전통사찰 입구에 서 있는 관음보살입상은 1940년경에 송산리에 거주하는 서정옥씨가 불상 옆에 암자를 짓고 기거를 하였으나, 1950년에 암자는 없어졌다. 그 후 1957년에는 마을의 주민들이 보호각을 짓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하여 정성을 드리고 있다.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이 관음보살입상이 서 있는 보호각 앞으로는 수령 320년 정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증평군 보호수인 이 느티나무는 높이가 17m에, 둘레는 4.8m 정도이다. 보호각 안에 서 있는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높이가 2.6m 정도가 된다. 보호각은 주춧돌을 높이 놓고, 살창으로 주위를 둘렀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서 있는 앞으로는 갚게 연못처럼 돌을 쌓아 축조를 했으며, 보호각 앞으로 샘이 솟는다. 아마 이 샘물은 후에 새롭게 조성을 한 듯하다. 느티나무는 뿌리를 들어내고 있을 정도로 고풍스러운데, 관음보살입상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 중기에 제작된 석불

보호각 안에 모셔진 석불입상은 눈썹 사이에 백호가 뚜렷하다. 얼굴은 넓적하고 긴 편이며 눈, 코, 입술 등이 가지런하다.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고 몸체는 살찐 느낌을 준다. 목 부분의 뒤로는 훼손이 있었는지 시멘트로 보완을 하였다. 법의는 얇은 비단 통견으로 표현을 해, 어깨에 걸쳐 옆으로 내려졌고 왼손은 복부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연경 한 가지를 들고 있는데, 꽃봉오리가 돋을새김으로 돋아져 나와 흡사 어깨에 혹이 하나 달린 듯하다. 보관의 중앙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보개의 표현이나 의문과 상호 등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불상이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법의의 밑에는 주름을 잡아 통치마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발은 법의 안에 가려져 표현을 생략했다.




고려 중기의 석불 연구에 소중한 자료

증평 미암리 사지 석보관음보살입상은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불상들과는 색다른 형태로 조성이 되어 있다. 이 지역의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석불입상을 보면 높이가 4m 이상이나 되는 거대석불이 많고, 눈, 코, 입 등의 조각수법이 조악한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얼굴의 형태도 토속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미암리 사지 석불입상은 얼굴의 짜임새가 뛰어나다. 이런 지역의 거대석불과 미암리 사지 석조 관음보살입상과 비교해 볼 때 좋은 연구 자료가 된다.


고목이 된 느티나무와 보호각 안에 보셔진 석조 관음보실입상. 그리고 앞으로 조성이 된 우물 등. 여름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잎을 달고 있을 때, 꼭 한 번 다시 찾아보고 싶다. 올 봄 꽃피는 계절이면 저 석불입상의 어깨 위에 꽃봉오리도 꽃을 피우려나?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위치한 각연사의 주위로는 보배산, 칠보산 등이 둘러쌓고 있다. 각연사의 일주문에는 '보배산 각연사'라고 적혀있다. 신라 법흥왕 때인 515년에 유일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각연사는, 그 역사가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이다. 그만한 절이 이 곳 산중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각연사는 어떤 모습일까?

괴강삼거리에서 올갱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각연사로 행했다. 도로에서 각연사로 향해 마을길로 접어들자 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눈은 치웠다고 하나, 여기저기 얼음이 얼어 미끄럽다, 거기다가 앞에서 차가 나오는 바람에 100여m를 후진을 해야만 했다.


절을 찾을 때도, 뒤로 할 때도 몇 번이고 후진을 해야 하는 길. 중간 중간 차가 비켜설 수 있도록 길을 내주면 좋으련만. 이 산중에 있는 고찰을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찾는 사람들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자칫 초보운전이라도 되는 날은 그냥 울고 싶을 것이다.

까마귀와 연못에 얽힌 전설

각연사에는 전설이 전한다, 어느 절이나 그러하지만, 천년 넘는 고찰에는 그럴듯한 전설 한 가지는 전하기 마련이다. '각연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이러한 전설과 연결이 된다.


각연사 일주문과 경내에 있는 석물.좌대인 듯하다. 각연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유일대사가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에 있는 절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절을 짓고 있는 곳으로 까마귀 떼들이 날아들었다. 이 까마귀 떼는 절을 짓는 현장에 있는 나무토막과 대패 밥 등을 들고 어디론가 날아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는 기이한 까마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날 까마귀 떼를 쫒아갔다. 그랬더니 현재 각연사의 자리에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물 위에 나뭇가지와 대배 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가 연못 안을 들여다보니 석불이 있고, 그곳에서 광채가 일었다.

유일대사는 깨달음을 얻어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각연(覺淵)'이라 하였단다. 지금 각연사의 비로전이 선 자리가 바로 그 연못이 있던 저리이고, 비로전 안에 모신 보물 제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연못 속에 있던 석불이라는 것이다.」


대웅전과 돌계단. 장대석에서 각연사가 고찰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재위기간이 514년~540년이다. 이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이 신라말기의 작품이라면 년대 차이가 많이 난다. 하지만 전설이란 전해지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이 비로전과 각연사라는 절의 명칭이 그런 연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화 삼아 알 수 있다면, 그 또한 귀가 솔깃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는지.

뛰어난 경계에 자리한 각연사

각연사를 들어가는 길은 4km나 된다. 좁은 길이 계곡을 끼고, 숲이 우거진 길을 올라간다. 말은 오른다고 하지만, 평지나 다름없다. 걸어서가도 30 ~ 40분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봄철에는 주변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봄꽃의 향에 취해 걸어볼 만한 길이다. 아니, 이 길은 걸어야 각연사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을 듯하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과 비로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덤벙주초


일주문을 지나 10여분을 걸어 경내로 들어선다. 중앙에 낮은 구릉을 뒤로하고 대웅전이 자리한다. 대웅전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정면 세 칸, 축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집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 혹은, 고려 초의 통일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그동안 각연사의 대웅전은 몇 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융경 년간(1567~1572), 순치 년간(1644~1661), 강희 년간(1662~1722)에 보수를 하였고, 영조 44년인 1768년에 중건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1979년에 보수를 하였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비로전

각연사라는 명칭을 갖게 했다는 비로전. 전설에 의하면 이 비로전이 있는 곳이 연못이었다는 것이다. 비로전은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진 이 비로전은, 인조 26년인 1648년, 효종 6년인 1655년, 광무 3년인 1899년, 그리고 1926년에 중수하였다.

초석은 신라 때 사용하던 자연석 위에 원형으로 깎아 도드라진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비로전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그 뛰어난 조각 솜씨에 압도당한다. 앞에가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하다.

각연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두 가지 문화재인 보물 제1370호 각연사 통일대사 부도와,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으나, 아직은 길이 녹지를 않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경내를 돌아보면 기단을 쌓은 장대석이나 주추 등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적당히 자리를 잡은 전각들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꽃이 피는 봄에 다시 한 번 각연사를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보개산을 뒤로 한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번지에 소재한 각연사.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로 지정 된 석조비로나좌불상이 있다. 우선 이 불상에 대한 표현부터 먼저 하고 가자. 각연사를 찾아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조각. 사람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다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의 담당자를 찾아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종무실에 가서 비로자나불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시방세계를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

스님이 따듯하게 끓여 타 주신 차 한 잔을 마시고, 비로전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연신 감탄이 그치지를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이며,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섬세한 조각은 처음인 듯하다.

비로자나불은 시방제불을 포괄하는 법신불로 알려져 있으며, 노사나불이라고도 부른다. 각연사의 바로나자불 좌상은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좌대의 조각도 훌륭하지만, 광배의 조각은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이리도 정교하게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완벽하게 보전됐을까?

까맣게 칠을 한 작은 소라 모양으로 머리칼을 표현한 소발.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눈과 코, 입의 표현은 완벽할 정도이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앞에 마주 한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었는데, 옷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을 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무겁지 않게 하였다.



뛰어난 광배의 조각,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석불좌상의 뒤편에 놓인 광배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다. 흡사 오뚝이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일석으로 조성한 광배를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물방울처럼 생긴 광배에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불을 형상화 한 듯, 불꽃을 조각하여 놓았다. 그리고 머리와 불상의 양편으로 각각 3구씩의 작은 부처인 화불이 조각돼 있다.




머리 위에도 3구의 화불이 좌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광배에 아홉 분의 화불을 새겨 넣었다. 광배의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를 찬찬히 살펴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 그리고 뛰어난 조화로움. 도대체 인간의 조각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망치와 정 하나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가능하다니. 광배와 잘 어울리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선조들의 예술세계가 그저 놀랍다는 것뿐이다.


연화대좌에서도 뛰어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연꽃으로 둘러싼 대좌는 세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조각품인 각연사 석조비로나자불 좌상. 사진을 찍고 난 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삼배를 한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하는 것은, 이 석불좌상에 기원을 하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다시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이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다양한 문화재에 관련된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에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답사를 나가보았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소개하는 <러브人 문화유산>이라는 코너에, 소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문화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라고 곧잘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 ‘미쳤다’ 라는 표현이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적 파사성 / 2009, 10, 18 답사

‘힘들다’ 느낄 때에 채찍질이 되다

사실 요즈음은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여건이 점점 그렇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진다. 역시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은 ‘팔팔한 청춘’이라고 말은 하지만, 남몰래 저려오는 팔다리는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촬영 중에 프로듀서가 묻는다. ‘왜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인가?’를. 그렇게 질문을 하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왜? 라는 질문이 참 낯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왜’가 아닌, ‘당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적부터 그렇게 당연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일상이요, 당연이다. 답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조급하다.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에 찾아간 수옥폭포 / 2010, 2, 15 답사

나는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문화재 답사란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불이며, 탑, 마애불 등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그리고 나무들과 스스로 대화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답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왜'가 아닌 '당연'이라는 해답을 찾는다.

내가 선조들에게 묻는 것이 바로 ‘왜?’이다. 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조성하였을까? 왜?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피땀을 흘린 것일까? ‘왜’는 바로 내가 만난 문화재에게, 그리고 그것을 조성한 낯모르고 이름 모를 선조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 왜는 때로는 엉뚱한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서 왜? 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재는 바로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

문화국가, 문화재사랑. 참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문화재를 소중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나 과연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아마 다만 몇 사람만 있어도, 그 마음들이 모아지면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란 생각이다.

단종이 귀향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여주 골프장 안에 있다) / 2009, 11, 11 답사 

문화재가 국가소유, 지자체소유, 아니면 개인소유일까? 아니다. 그것이 비록 법적인 주인은 국가나 지자체, 혹은 개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혹 우리 것이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 우리 것이기에 소중히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 아마 그런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도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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