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28에 소재한 국립충주박물관. 국보인 중앙탑 앞쪽에 위치한 충부박물관의 야외에는 많은 석조물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곳에는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등 많은 불교관련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불사 석불좌상. 높이 98cm 정도인 이 석불좌상은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곳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하는 불신에 덧칠을 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도식화된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충주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이 석불좌상은 머리위에 상투 모양인 육계를 너무 과장되게 크게 조성했으며, 오른쪽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조상하였으며, 마모가 심해 눈, , 입 등의 윤곽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깨의 선은 당당하다. 이렇게 어깨의 선이 당당한 것으로 보거나 법의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아래에는 여러 개의 장식을 곁들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편견단이다.

 

법의는 평행사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는 도식화 되어있으며, 양 다리와 후면의 들 뒤에도 주름을 조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신체의 표현감각이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지방의 장인이 조성한 불상인 듯

 

이 성불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때 석조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듯하지만, 도식화 된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육계가 너무 크게 표현을 하는 바람에 마치 머리 위에 투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 그러나 신체의 비례는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배 아래편에 대고 있지만, 손의 형태가 떨어져 나간 듯 정확한 손의 형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편 무릎은 금이기고 쪼개진 것을 맞추어 놓았다.

 

등 뒤편에는 법의를 굵게 틀어 모아 세 줄을 만들었다. 그 중 두 줄은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사선으로 내려갔으며, 한 줄은 꼬듯이 모아 밑으로 처트렸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석불좌상이나 입상의 경우 광배가 있을 때는 뒤편에 이렇게 조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성불사 석불좌상은 뒤편에까지 조각을 해 놓았다.

 

육계가 필요이상으로 크게 조성이 되었다든가, 손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보아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불사 석불좌상. 비록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비지정 석조물이긴 하지만, 천 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 그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한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 앞으로는 현재의 답사 자료와 함께 오래 전에 답사를 했던 자료들을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석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모셔져 있다. 현재 이 전각을 세운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곳이 백제시대 절터의 강당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다.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림사라는 명칭도 고려시대의 절 이름이다.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명문을 통해 고려시대에 백제 때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석불좌상.

 

날씨가 차갑다. 지난 날 온 눈이 녹아 정림사지 안은 온통 질퍽하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어 걷기조차 힘들다. 전각의 계단 위에는 온통 진흙투성이다. 달라붙은 흙을 이곳으로 털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을 들여 정림사지를 정비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신발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흙이 달라붙지 않도록 마당정비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전각은 7칸으로 짓고, 중앙을 위시해 좌우로 문을 내었다. 대개 절의 대웅전 등은 가운데 문은 ‘어간문’이라고 하여 일반인들은 출입을 삼간다. 좌우 문을 통해 출입을 하는 것이 예의지만, 정림사지 전각은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 안도 온통 흙투성이이다. 날씨가 이러하니 괸람객들도 별 도리가 없겠지만.

 

전각 안에 모셔진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 올려다보는 순간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고려 때 조성이 된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거대석불의 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나 석불 등은 크기에서 어느 시대의 것보다는 거대불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가 보관은 머리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제작이 되어 얹혀 있다.

 

 

심하게 파괴가 된 석불좌상

 

이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가 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는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대좌 등의 솜씨로 보아 당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다시 만들었다고 하지만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형태는 왼팔을 가슴께로 끌어올렸으나, 오른팔은 어깨서부터 떨어져나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다만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를 통해 당시 이 석불좌상의 위엄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다. 이 대좌는 남원 만복사지 경내에 남아있는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된 대좌는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대좌의 아름다움으로 마모된 불상을 기억하다

 

대좌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각을 하였으며, 가운데 중대는 좁고, 상대와 하대가 넓은 ‘공(工)’자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대좌도 많이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석불좌상에 비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팔각 받침돌로 구성을 하고,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겨 넣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을 했다.

 

여러 단의 돌을 놓고, 그 안에 갖가지 조각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대좌. 그 대좌 하나만으로도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위상을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아마도 백제 때의 중심사찰이었던 이곳에 정림사를 세운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강성한 나라를 꿈꿔왔을 것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내 눈이 열리고 있기 때문인지.

문화재 답사는 답사라는 특성상 날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그때그때 답사를 해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 기사가 일반적인 뉴스의 생성과 달리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2박 3일 정도 답사를 나가게 되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담아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에서 조금 위편에 보면, 경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일대가 바로 승안사지이다. 승안사지는 통일신라 때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승안사는 성종 12년인 1481년에 편찬된 『둥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는 절이다.

 

승안사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12월이 다 지나기 전에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승안사지다. 좁은 길로 마을들을 이리저리 지나 도착한 승안사지. 이곳에는 보물 제294호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석불좌상과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고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정조 23년인 1799년에 발간된 『범우고』에는 승안사지가 사라지고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안사는 언제 무슨 일에 의해서 사라진 것일까? 현재 있는 석불좌상의 크기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의 거대불로 보인다. 고려시대 때에 이렇게 큰 거대불을 조성한 이유는 북벌의 상징이다.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 파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안사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례가 맞지 않아 어색한 석조여래좌상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 많은 석조문화재가 조성이 되었다. 그 중에서 석조불상과 석탑 등은 상당수에 이른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시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어 본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머리는 민머리인 듯한 이 석조여래좌상은 모든 비율이 제대로 맞지가 않는다. 눈은 움푹 들어간 듯 보이며 코가 유난히 크다. 얼굴이 길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여래좌상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석인과 같은 모습에 가깝다. 좁은 어깨로 인해 전체적인 체구는 왜소해 보이며, 유난히 큰 코와 일자로 꽉 다문 입으로 인해 엄격한 인상을 풍긴다.

 

목 부분이 떨어진 것을 붙여놓은 자국이 남아있으며,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쳤다. 옷의 주름도 사선으로 비스듬히 나타나고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의 비례가 잘 맞지가 않아 어색해 보인다.

 

잘린 팔과 사라진 하반신

 

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거기다가 좌상의 발 부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현재 좌상의 다리 부분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심하게 훼손이 된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거대한 석불의 팔과 다리 부분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훼손이 되었을까?

 

 

조선조 성종 12년 부터 정조 23년 사이에 이곳에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융성하던 승안사라는 사찰이 사라지고, 이렇게 거대석불이 심하게 훼손을 입을 것을 볼 때, 어떠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추정할 뿐이다. 기록문화에 약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바로 이런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에, 바쁜 답사 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여주 원적산은 오대산의 끝자락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산이라는 이야기다. 이 원적산의 산자락인 여주군 도곡리 산 7번지에 소재한 도곡리 석불좌상은, 9세기의 통일신라 불교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석불좌상이다.

 

산자락에 외로이 앉은 석불좌상

 

도곡리를 지나면서 이정표를 보고 찾아들어간 석불좌상. 1998년도에 여주군에서 보호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돌려가면서 살창을 만들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전체를 보려면 이 보호각의 살창으로 인해 다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맨 땅에 세워놓은 것보다는, 보호각이라도 있다는 것이 보기에도 나아 보이니 어쩔 것인가?

 

 

원적산의 산자락에서 북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이 석불좌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두툼한 코와 팽팽한 뺨,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에서 자연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수인은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2개의 손가락을 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알맞은 신체비례를 갖고 있는 통일신라 말의 석불로 보인다.

 

삼단으로 된 대좌의 뛰어난 조각

 

세 매의 화강석으로 구성된 대좌는 위에 올린 불상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하대석은 연화문을 두르고 있다. 중대석은 육각형으로 되어있으며, 상대석과 하대석에 비해 너무나 얇게 조각이 되어 보기에도 불안해 보인다. 중대석의 여섯 면 중에 앞면에 있는 사면에는 신장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많이 마모가 되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이렇게 돌에다가 느낌을 들 정도의 조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상대석은 4단의 받침을 갖춘 복엽연판문이다. 각 연잎마다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선정인을 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상대석에 이렇게 불상을 조각을 했다는 것은, 당시 이 석불좌상을 조성한 장인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9세기 통일신라 말의 이 석불좌상은 주변이 평편하고 석재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절터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당시 이곳에 자리한 사찰의 대웅전에 모셔졌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다만 이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던 절의 명칭이나 규모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연을 훼손하는 이런 일은 삼가야

 

도곡리 석불좌상은 그동안 몇 번이나 답사를 했다. 항상 지나는 길마다 근처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변화는 없었는지, 또는 관리가 잘못되어서 훼손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등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요즈음은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관리가 되지 않는 소중한 자원들이 많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관계당국에 연락을 하고 질책을 하기도 하지만, 워낙 많은 숫자이다 보니 일일이 그런 일을 하는 것도 버겁다.

 

 

석불입상을 보고 내려오는데, 길옆 풀숲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여름철 풀이 무성하면 볼 수 없었을 테지만, 마른 풀 숲에 드러난 것들이 있다. 좁은 내를 건너 숲으로 가보니 촛대와 대야 등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버리고 간 것이다. 옆에는 붉은 천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갖다 버리고 간 것이란 생각이다.

 

 

전국의 문화재 중에서 석불이나 마애불, 그리고 탑 등을 돌다가 보면, 주변에 이런 것들이 심심찮게 눈에 띤다. 심지어는 의식을 마치고 난 돼지머리 등을 버리고 가기도 해, 여름철이면 심한 악취가 나기도 한다. 신을 모신다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다니.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밭으로 올라오신다.

 

이곳에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니, 몰래 와서 뚱땅거리고 가기도 한단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기물(器物)을 버리고 가는 심사는 무엇인지. 이런 것 하나도 우리문화재를 훼손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 오랜 천년세월, 이 자리에 앉아 원적산 산봉을 바라보는 석불좌상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실까?

여주 점동면에서 삼합리 쪽으로 가는 길을 들어가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삼합리이다. 이 삼합리에서 충주 앙성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타난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오갑사지 석불좌상>이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이 표지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들어가는지, 거리가 적혀있지가 않다.

 

두 번이나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석불좌상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결국엔 찾지를 못하고 뒤돌아선 적이 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다. 두 번째 답사 길이다. 이번에는 앙성면 사무소를 찾아들어가 오갑사지 석불입상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약도까지 펼쳐 보이며 안내를 한다. 면사무소 직원이 적어주는 주소를 갖고, 번지를 찍어 보았다. 여주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한참을 가니 '동막마을'이라는 석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부터는 '대물낚시터'라는 저수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비게이션이 지난번에 들어왔던 곳을 도착하자, 찾는 곳의 근처에 왔다는 안내를 끝으로 멎어버렸다.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요즈음은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몇 집 되지도 않는 마을이라,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 그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았다. 마침 차가 한 대 나오기에 길을 막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한참 들어가야 한단다.

 

 

 

고개를 넘어 도로 같지도 않은 좁은 길을 들어섰지만, 마을회관이 보이지를 않는다. 차가 지나가면 서로 비켜주어야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재차 묻는다. 한참 가야 한단다. 이러니 내비게이션이 알려줄 수가 없었나보다. 길도 표시되지 않은 곳을 10여분을 가서야 겨우 마을회관을 찾았다.

 

파손이 심한 오갑사지 석불좌상

 

마을회관 집 뒤라고 알려준 대로,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아무 곳에도 석불좌상이 보이지를 않는다. 묶어 놓은 개 두 마리가 무슨 낮도둑이라도 되는 양 짖어댄다. 요즈음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개들하고 한창이나 실랑이를 해야 할 때가 많다. 마침 사람이 나오기에 재차 물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결국 두 번째 답사 길에서, 그것도 몇 바퀴를 돌면서 헤맨 끝에 만난 오갑사지 석불좌상. 한 마디로 너무 많은 훼손이 되어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파손이 되었다고 해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찾아온 여행자가 반갑기라도 한 듯, 석불좌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연꽃 문양을 한 대좌와 석불좌상

 

오갑사지 석불좌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작고 아담한 이 석불좌상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실주의적 기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연화대좌는 밑에 원형으로 받침을 만들고, 8각형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3단으로 조성이 된 대좌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한 면이 있다. 고려 석불에서 나타나는 대좌의 형식이다.

 

 

 

석불좌상은 얼굴과 머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손은 양팔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형태로 남아있어 정확한 수인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법의는 깊게 처리가 되어 있어, 조금은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은 얼굴 표정은 미소를 띠우고 있다. 발은 결가부좌를 해 발가락이 법의 밖으로 삐져나왔으며, 무릎도 파손이 된 것을 떼어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불균형적인 듯하지만, 조각 기법 등은 매우 우수하다.

 

오갑사의 주불상이었을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서는 '명창3년임자(明昌三年壬子)'라고 명문이 새겨진 기와와, '오갑사'라고 쓴 명문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명창 3년인 1192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보존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석불좌상의 뒷면까지 법의를 표현하였고, 다리를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도 조각을 하는 등,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중한 문화재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비록 높은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치는 수도 왕왕 있지만,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찾아나서는 길에 게으름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오갑사지 석불이 아무리 심한 훼손이 되었다고 해도, 그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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