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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