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나혜석은 19864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의 작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화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아명은 나아지, 나명순이며 아호는 정월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을 했다.

 

경성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1931,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 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여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1927년에는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유럽여행을 한 여성이 되었다.

 

 

19232월 동명지에 첫 딸을 출산한 나혜석은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행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기고한 바 있다. 그녀는 출산과 자녀양육을 감동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녀에 대한 맹목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어미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여기서 나혜석은 스스로 나는 할 일이 많다. 이제야 예술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나는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라는 말을 통해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라는 점을 지적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는 정이 아니다.

 

20일 오후 팔달구 행궁동을 찾았다. 6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인 붉은 꽃 피고지고 다시피다.’라는 주제로 행궁동 일원에서 19일부터 21일까지 행사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팔달구 화서문로 45번길11-4에 소재한 행궁동 새마을문고는 주민들이 소통 공간으로 1층에는 문고와 열람실, 2층은 주민대화방(동아리방)과 나혜석 자료관 등이 자리한다.

 

이 새마을문고에서 축제 기간 중 길거리로 나온 나혜석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모()된 감상기전이 열리고 있다. 행궁동에 거주하고 있는 자식을 둔 어머니들이 나혜석의 감상기를 읽고, 스스로 나혜석이 되어 모된 감상기를 적은 것이다. 새마을 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길 계단 좌우벽에는 니혜석의 그림도 몇 점 걸려있다.

 

 

한편에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를 큰 종이에 적어 놓은 것이 보인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건이 생기도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여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優者),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왠일인가. 이 사실을 보아서는 그들의 소위 솟는 정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1922429일 큰딸 김나열의 1년 생일에 나혜석이 쓴 감상기 중 일부이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을 하기도 했다.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 같이 말하나, 스스로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혜석이 되고 싶은 어머니들

 

벽에는 행궁동 주민들이 모된 감상기를 쓴 내용들이 죽 걸려있다. ‘사랑하는 내 딸’, ‘양동이와 탕수육’, ‘엄마가 되는 것은 경이롭다’, ‘스물 둘에 첫아이 낳던 날등의 제목을 붙인 글들이다. 니혜석의 모된 감상기를 읽고 나서 스스로 나혜석이 되어 모된 성장기를 적은 글들이다.

 

벽에 붙어있는 글들을 읽어보는 중에 남다른 글 하나가 보인다. 모된 감상기는 부모가 자식을 갖고 난 후 그 느낌을 적은 글들인데, 그 중 하나는 그리운 아버지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아마도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님께 대한 감정이 남달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느낌도 어찌 보면 모된 감상기일수도 있겠다. 정숙녀의 글이다.

 

 

생전 농사꾼이셨던 울아버지

, 들기름, 참기름, 마늘, 양파, 고춧가루, 김장까지 4남매를 위해 챙겨주시고

엄마 역할까지 하신 울아버지

엄마 죽고 36세에 홀아비 되시고, 두 번의 결혼 실패

큰 딸의 오랜 지병으로 병원비 부담하시며

아내 없이 혼자 고민하시고 혼자 견디셨던 고독함을

자식들은 알 리 없었다.

 

눈물이 난다.

폐암 진단 이후 성빈센트 병원에서 6개월간 항암치료를 받고

요양병원 입원 중 폐 손상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지금은 새벽 2

눈을 감고 아버지의 만남을 기대해봐야겠다.

남자인 아버지 몫, 여자인 엄마 몫까지 잘해주신 정제훈 울아버지의 진심.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마재란 말이 쉬어간다는 곳이다. 남양주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진주 목사였던 정재원의 아들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다산 정약용(요한) 정약전, 정약현 등이 선조 28년인 1595년 마태오 리치가 펴낸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곳이다.

 

마재성지는 103위 순교성인이신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정정혜(엘리사벳) 남매의 탄생지이다. 일반적으로 성지란 순교한 장소인데 비해, 마재는 한 가정의 신앙 출발지라는 점이 다르다. 신유박해 때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했고,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귀양을 떠났다. 이 마재의 형제 중 정약전은 진주목사 정재원의 둘째아들이다.

 

 

독실한 천주신앙의 가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곳에서 1814년에 <자산어보>를 저술, 한국 최초의 어류생태서를 완성했다. 그는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한 개혁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했지만 유배기간동안 학문에 더욱 힘써서, <일표이서>를 비롯한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한 사람 강화도 출신인 황사영이 있다. 황사영은 1790년 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해서 진사가 되었으나 천주교에 입교를 한 후 관직에 나아기지 않았다. 정약현의 딸 명련과 혼인하셨으며, 정약용에게 교리를 배웠고 주문모 신부를 만난 다음 측근으로 활약하다가 1798년 아현동으로 옮겨 활동을 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 그곳 토굴에서 박해받는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고자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이다. 북경 동지사 편에 끼어 보내려고 했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어 92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아내인 명련과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마재성지를 돌아보다

 

마재성지는 딴 곳의 성지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한옥으로 지은 성당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건너편에 마재성지가 자리한다. 마재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 편에 사무실이 있고, 103위 성인들의 그림과 정약용 일가를 상징한 듯한 모임을 하고 있는 인형들이 보인다.

 

 

 

마재성지의 정씨 형재 중 정약종의 업적 가운데는 최초로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가 있다. 주교요지는 모두 43쪽으로 된 한글교리서이다. 이렇게 정약종의 형제들이 어릴적부터 천주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했던 터전. 성지 안에 조형물로 세운 칼 십자가 상이 있다.

 

정약종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그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십자가들이 빛나는 것을 본 교우가 약종이 맞게 될 수난의 증표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한 많은 작은 십자가를 입힌 칼 십자가 상은 바로 정약종의 꿈을 형성화 한 것이다. 형리가 그의 목을 베기 위해 나무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자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 보다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며 바로 누워서 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입구에서 우측으로는 십자가의 길 14체가 조성이 되었으며, 좌측동산 길은 마재 명상길이다. 성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박해 때마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요즈음 사람들은 과연 그런 고통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종교를 지킬 수가 있기는 할까? 어쭙잖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성인인체 하는 무리들이 가여워지기까지 한다.

 

화성을 축성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다산 장약용.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들렸던 다산유적지.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천주신앙의 가족발상지인 마재성지. 어찌 보면 다산이 그 많은 저서를 남긴 것도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재 명상 길을 걸어보면서 세상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싶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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