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일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의 개막식에 펼쳐진 어가행렬.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이르러 장용외영의 군사들과 화성유수의 영접을 받고 입궁을 하려고 하자, 난데없이 징을 두드리면서 사람들이 정조대왕의 앞으로 뛰어들어 엎드린다. 이른바 격쟁(擊錚)’을 시작하는 것이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 담장위에 올라가거나, 대궐로 뛰어 들어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는 왕이 행행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왕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격쟁은 조선조 성종 때부터 시작해, 실록에 보면 총 300회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와 숙종 때 가장 많은 격쟁이 이루어졌다.

 

 

격쟁 이전에는 태종조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가 있었다. 신문고는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문고는 원래 취지인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치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일부러 한양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고의 제도가 효용도 없게 되자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왕에게 하소연을 하는 제도인 격쟁

 

조선조에는 각종 민원을 제기하는 방법인 정소(呈訴)’가 있다. 정소란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을 문서로써 관에 요구하고 청원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소는 신분 성별에 제한 없이 모든 백성이 가능했으며, 부녀자와 노비도 할 수 있었다. 정소 절차는 경국대전에 보면,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는 서울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함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문고 제도가 사라지면서 대신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 격쟁이란 억울한 일이 잇는 백성들이 임금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왕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것이다. 신문고를 폐지한 후 정서를 올려 불복한 자로 하여금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게 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격쟁으로 인한 폐단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지방의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사소한 일까지 들고 나와 임금의 앞을 막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히여,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으며 대전회통에서 증보되었다. 격쟁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자손이 조상을 위하여, 처가 남편을 위하여, 동생이 형을 위하여, 종이 주인을 위하여 하는 4가지였다. 이밖에 민폐에 관계되는 것도 가능하였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장을 치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하지만 심하게 임금의 행행을 막고 읍소하는 자가 많아지자,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격쟁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잘못된 경우는 형벌로 논하게 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일로 격쟁을 논하는 자는 장 1003,000리 유배의 벌을 내렸으며, 읍민이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격쟁하는 것은 장 100에 처하였다.

 

이렇게 무례한 격쟁에 대한 것을 막기 위해 엄하게 다스리기도 했다. 무고하게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부민고소율(部民告訴律)’, 사소한 일을 해당 도의 관찰사나 수령에게 고하지 않고 격쟁으로 직접 왕에게 아뢰는 자는 월소율(越訴律)’, 사실과 다른 허위로 상소한 자는 상서사부실률(上書事不實律)’로 처벌했다.

 

명종 15년인 1560년에는 궁정에 함부로 들어와서 격쟁하는 자가 많아, 이들을 엄벌에 처하였으며, 정조 1년인 1777년에는 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정하였다. 그 이후 철종 9년인 1858년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에만 격쟁할 수 있다는 법을 정하였다.

 

 

격쟁을 가장 많이 처리한 정조대왕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의 격쟁 중에는 정조 15년인 1791년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통해 사회의 폐단을 금지시켜줄 것을 호소한 사건이 있다. 사실 격쟁은 조선시대 백성이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모순의 심화로 일반백성들의 생활이 극심하게 어려워지자, 자신들의 괴로움을 호소하고자 격쟁을 많이 이용했다.

 

 

정조 15년인 1791122일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아전과 백성이 결탁하는 일, 2.상민이 족보를 위조하는 일, 3.소를 함부로 잡는 일, 4.산 소나무를 함부로 자르는 일, 5.지방 토호들이 토지겸병을 마음대로 하는 일, 6.노비를 30명 이상 가지는 일, 7.장토(庄土)30결 이상 소유하는 일 등을 금해줄 것과 그밖에 군역에 대한 수포를 20척으로 줄여줄 것을 청했다.

 

이 격쟁을 들은 형조에서는 일반평민이 감히 노비나 토지, 군포 문제를 거론했다고 죄를 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격쟁내용을 검토한 뒤 노비문제와 토지, 군포에 관한 것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외의 사항은 각 도에 명령하여 엄금하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규제대로 한다면 박필관은 부민고소율과 월소율에 해당 해 장 100을 맞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격쟁을 고한 박필관의 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 상이 아니겠는가?(자료 인용 / 구글 검색) 사진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김기수

줄광대는 줄 위에서 갖은 묘기를 부린다. 줄 위를 바라보며 목을 있는 대로 뺀 구경꾼들은, 발이라도 삐끗할작시면 바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밑에서는 어릿광대가 관객들과 줄광대 사이를 부추기며 돌아다닌다. 악사들은 장단을 덩덕쿵~ 치면서 흥을 고조시킨다. 높이 3m 정도에, 길이는 10m. 그 위에서 20여분을 줄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줄광대는, 온갖 묘기를 다부린다.

 

승도(繩度), 주색(走索), 색상재(索上才), 답색희(沓索戱), 고무항(高舞恒), 희승(戱繩), 항희(恒戱)등의 어려운 명칭을 갖고 있는 줄타기는, 남사당패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흥겨운 판이다. 줄타기는 대개 관아의 뜰이나 대갓집의 마당, 놀이판이나 장거리 등에서 많이 연희가 되었다. 가끔은 절 마당에서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절 걸립을 시작하거나 마쳤을 경우에 펼쳐진다.

 

 

외줄에 목숨을 걸다

 

줄을 타는 줄광대를 어름산이라고 부른다. ‘산이란 경기도 지역에서 전문적인 연희꾼을 일컫는 말이다. ‘어름이란 줄 위에 올라가 줄을 어른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속설에는 얼음판처럼 위험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즉 어름산이는 얼음산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줄타기는 항상 생명을 걸어놓고 연희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대령광대(待令廣大)계열인 나례도감에 소속된 줄광대가는 유한계층을 대상으로 연행하는 재인청 '광대줄타기', 유랑예인계열의 서민 계층을 대상으로 순연하는 남사당 여섯마당 중 하나인 '얼음줄타기'가 있다.

 

 

줄타기를 할 때는 줄광대인 어름산이와 재담을 맞받아주는 어릿광대,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가 함께 한다. 어릿광대가 없을 때는 악사 중에 한 사람이 재담을 받아주기도 한다.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악사 등을 두루 갖추고, 줄 위에서 재담과 춤, 그리고 줄 위에서 하는 40여 종의 잔놀음과 살판까지 하면 판줄이라고 부른다.

 

어릿광대 없이 줄광대 혼자 재담과 잔놀음을 간단하게 노는 것을 토막줄이라 부른다. 하지만 줄을 타는 어름산이에게는 판줄이나 토막줄이나, 그 위험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하기에 줄 위에 오르고 나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된다.

 

 

인간문화재의 줄타기

 

24()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 줄이 걸렸다. 한 해 동안 이곳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시작하는 날에, 그 끝에 줄타기가 선을 보인 것이다. 올해 줄을 타는 줄광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58호인 줄타기의 기예능보유자인 김대균이다. 인간문화재가 줄을 타는 것은 상당히 보기 드문 구경거리이다.

 

경기도 연천에는 재인폭포가 있다. 옛날에 문선준이라는 줄광대가 이 재인폭포를 건너 줄을 매고, 그 폭포 앞으로 줄타기를 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줄광대들은 나름대로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는가 보다. 지금은 줄타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기예능보유자였던 고 김영철(1988년 작고)의 기능은, 현 보유자인 김대균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를 비롯해 몇 명의 줄광대가 놀이판을 펼치고 있다.

 

줄타기의 보유자인 김대균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에 입문하여 김영철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198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전수조교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로 인증을 받았다.

 

 

불이 벌건 화로를 들고 줄 위에 오르다

 

흔히 줄타기의 마지막은 살판을 한다고 한다. 이 살판이란 잘하면 살고, 못하는 죽는다.’는 소리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살판은 남사당패의 연희 중에서 땅재주를 말한다. 텀블링과 같은 재주 등 갖가지 묘기를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살판이라고 그 이름을 붙인 것일까?

 

말 그대로 살판이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하는 말대로라면 불이 벌겋게 붙은 화로를 안고 땅재주를 넘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칫 실수라고 할양이면, 불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그 살판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줄 위에서 했다고 하니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흔히 남사당패에 의해 연희가 되는 줄을 어름줄타기라고 한다. 이는 줄 위에서 갖은 재담과 춤, 줄놀음 등을 섞어서 연희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줄만 타는 것은 광대줄타기라고 불렀다. 이 광대줄타기는 양반들을 위한 줄타기로, 줄을 타는 기능은 어름줄타기를 하는 줄광대보다 뛰어났다는 평이다.

 

하지만 민초들을 상대로 하는 어름줄타기는 재담이 해학적이다. 줄 위에서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 등을 재담으로 엮어나간다. 그래서 억눌린 민초들의 분풀이를 하는 데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줄타기를 마칠 때가 되면, 박수를 치면서 앙코르를 외친다. 그래서 줄광대는 외롭지가 않은가보다. 떠날 듯한 함성이 항상 같이하기 때문에.  (사진 수원시청 정책홍보담당관실 이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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