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고달사지 경내에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오르면서 조금 못미쳐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보호철책 내에 정비되어 있는 석실을 볼 수 있다. 무덤 서쪽에는 연도폐쇄석이 놓여 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에 해당하는 곳. 경기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채를 상방하원형이라 부른다. 상방하원형이란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가 달려 있으며,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란 명칭이 붙여졌다.


지상구조는 2층의 제단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 1층의 규모는 동서가 442cm, 남북이 412cm, 높이 46cm로 장방형을 이루었고, 기단 2층은 동서가 322cm, 남북이 280cm, 높이는 50cm이다. 기단하부의 석실은 돌을 쌓아서 평면원형의 현실과 평면장방형의 연도를 만들었고, 평면의 모양은 열쇠구멍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달사지를 답사한 후 석실묘를 답사하기 위해 산길로 올랐다.  산림욕도 즐길 겸 천천히 이야기를 하면서 20여분 만에 보게 되는 석실묘. 그런데 언제 정비는 했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석실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보호철책을 둘렀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보호철책에는 문이 없다. 석실 내부를 보아야 석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데, 보호철책에 문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석실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 석실묘 입구 잡풀이 무성한 석실묘. 정리가 안된 문화재.

  
▲ 석실 내부 원형으로 된 석실내부

 

문제는 보호철책을 넘어 들어가서다. 석실 입구를 막은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창살 틈으로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어두운 석실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떠야 한다. 이때쯤이면 화가 치민다. 도대체 문화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보호만 하겠다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들어갈 수 없는 철책을 두르고, 거기다가 열 수 없는 문을 만들었다면 문화재를 보라는 것인지, 보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닫고 감추고 하는 것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고 느끼고 가야 올바른 문화재의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고려 말기의 묘제 연구에 소중한 자료인 상교리 석실묘. 하루 빨리 묘실 안을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출처 : 오마이뉴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