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海歌)’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구지가, 서로 달라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 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용이 아닌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은 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사연도 참 많다. 이런 저런 사연을 듣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그만큼 재미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이다. 왜 힘든 문화재 답사를 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답사의 재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주에 있는 보물 제121호인 굴불사지 사면석불. 극락정토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보인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사면에 석불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가 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사>라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절터로 추정

 

최근에 들어 이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으며, 출토유물 가운데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현재 백률사라는 절이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지나 있는데, 이 절은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라고 전한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높이 3.5m 정도의 커다란 암벽 사방에 부처와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이다. 흔하지 않은 사방불이라 그 가치도 높지만 사방에 새겨진 불상의 조각이 뛰어나다. 사면석불은 산을 향해 올라가면서 정면으로 보이는 서면은 아미타삼존불, 동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면에는 삼존입상, 북면에는 보살상이 돋을새김이 되어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중 아미타삼존불

 

뛰어난 조각이 돋보이는 사면석불

 

사방불을 조성할 때는 남방에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북방에는 미륵불, 동방에 약사여래, 서방에 아미타불을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굴불사지 사면석불도 서방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했다.

 

아미타삼존불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몸체는 돋을새김을 하여 놓았다. 머리는 따로 조성을 하여 몸체에 올려놓은 형태이다. 아미타불의 죄우에 모신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따로 조각을 하여 좌우에 모셔놓았다. 대세지보살의 경우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가 알아볼 수가 없다

 

11면의 관음보살, 마모가 심해

 

아미타삼존불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돌면 북면에 돋을 새김한 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크게 들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돋을새김을 한 보살상의 옆으로는 희미하게 음각을 한 선이 보인다. 분명하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11면의 얼굴과 6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 알아볼 수는 없고, 형체는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 암석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불상을 새겨 넣음으로써 극락정토를 그리며 살았을 것만 같다.

 

위 사진은 북면 보살상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북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이며, 아래사진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동면에 돋을새김한 약사여래상 이다

 

돔면을 상징하는 곳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머리는 크고 높은 육계로 표현을 했다. 상반신에는 희미하게 법의가 음각을 한 선으로 표현이 되어있으나, 이 또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희미하다.

 

훼손이 된 부조, 정말 아쉽고 또 아쉽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으나 오른손은 파손이 되어있다. 사면석불 중 그 어느 것보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아마 석불의 뒤편에 조성이 되어있어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훼손을 막은 듯하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 좌측은 아예 떼어낸 듯 사라졌다.

 

남면의 보살입상을 보면 좌측이 무엇인가 떼어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원래는 세 분의 보살입상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돋을새김한 두 분의 보살 중 한분은 머리가 사라진 상태다. 남면의 보살입상은 신체의 비례가 적합하고 조각수법도 빼어나다. 둥근 연꽃대좌를 만들어 발밑을 받치고 있으며, 배 모양의 신광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다양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해가 따갑다. 하루에 몇 군데를 돌기위해서는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보면 흐르는 땀조차 주체를 못한다. 물 한 병은 1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물병을 수두룩하게 짊어지고 다닐 수도 없는 답사 길이다. 그러다가보니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만나는 석불에게도 속으로 기원을 한다. 즐겁고 평안한 답사 길이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또 하나 흉측하게 변해버린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