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 선생. 자는 순오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이용우의 아들로 입양된 이상설은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여 고종 31년인 1894년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이상설은 의정부 참찬에까지 올랐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상소한 후 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곳에서 교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47세의 나이로 병사를 하였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이상설 생가. 유허비와 뒤편에 동상, 그리고 생가의 모습이다

숭열사와 생가가 한 자리에

숭열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이다. 1972년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맞배집으로 된 사당과 숭모비 등을, 1997년 현재의 자리인 산척리 생가 곁으로 옮겨 놓았다. 숭열사에는 사당과 솟을문, 추모비와 동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한편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설 생가는 초가 세 칸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초가집은 황토벽으로 발라놓았다. 이 집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광복을 전후 해 무너진 것을, 근년에 옛 분들의 고증을 받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집 옆으로는 1957년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세 칸 초가인 안채와 맞은 편에 있는 헛간채

초라한 세 칸 초가가 품은 인물

지금은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 선생에 태어날 당시에 생가는 더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세 칸 초가는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이 있고, 안방과 윗방이 있다. 앞으로는 툇마루도 놓지 않았으며, 방은 겨우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윗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방은 뒤편으로 난 문이 조금 크다는 것뿐, 일반 민초들이 사는 집보다도 초라하다. 윗방 앞에는 조금 돌출이 되게 내달아 곡식을 넣어두는 곳간을 만들었다. 부엌은 조금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아궁이를 두었다. 벽 한편에 돌출이 된 곳은, 예전 등잔을 올려놓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윗방 앞으로 달아낸 곳간채와 안방. 안방은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만한 공간이다.

이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세계에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선생이 이 집에서 자란 것은 7세 때까지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이용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생가에서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다

눈발이 날린다. 마음을 먹고 나선 답사 길이 폭설로 인해 중단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변동이 오히려 이상설 선생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요즈음 사람들은 자라나는 환경만을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인지.



거적으로 된 부엌문과 아궁이, 그리고 벽에 불거진 것은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이다.

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인들은 자라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라는 환경이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그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을 이상설 선생. 오늘 그 생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 동안 참으로 세상을 잘못 살아왔음을 깊이 반성하면서.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그저 부끄러움에 그 눈발이 고맙다. 부끄러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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