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흔히 수원을 들려가는 곳쯤으로 알고 있다. 서울에서 기차로 30분, 전철이나 승용차, 버스를 이용하면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에는 년 중 수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그들이 수원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몇 시간, 그리고는 에버랜드나 한국민속촌을 들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그것은 서울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수원에 오면 그저 아침 일찍 왔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간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수원을 온전하게 돌아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몇 번에 나누어서 수원을 돌아본다면 못 볼 것도 없다. 하지만 요즈음은 1박 2일이 대세 아닌가? 수원에는 1박 2일 코스가 없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전국 어디보다 좋은 아름다운 코스가 있다.

 

 

수원의 1박 2일 코스, 1박 2일 팀 한번 와보라

 

요즈음 사람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을 묶어 나들이를 한다. 하지만 아직도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를 묶어서 가족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코스가 있다. 당연히 수원의 가장 아름답고 좋은 곳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이다. 이 코스를 보지 않고는 수원을 보았다고 논하지 말라.

 

토요일과 일요일을 잡아보자. 토요일 오전에 길을 나서 수원 화성의 연무대 앞에 주차를 시킨다. 굳이 연무대를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연무대에는 활을 쏠 수가 있다. 그곳에서 활을 쏘고 난 뒤 화성열차를 이용해 화성을 구경한다. 열차요금은 대인 1,500원, 중고생 및 군인 1,100원, 어린이는 700원이다. 이 열차요금과 화성관람을 할 수 있는 관람료는 함께 묶여있다.

 

 

 

화성열차는 화성을 돌아 팔달산 성신사 앞까지 간다. 그곳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 성신사 옆 약수터에서 서장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서장대까지는 200m 정도.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도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는다. 서장대를 돌아보고 나면 화서문 방향으로 내리막길이다. 그곳을 걸어 화서문까지 도착을 하면, 화서문서부터 동문인 창룡문까지는 성 밖으로 돌아보기를 권한다.

 

성안에 있는 시설물도 중요하지만, 역시 성은 밖에서 보아야 제 멋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게 동문까지 왔으면, 그곳에서 지동 벽화길로 들어서면 된다. 지동 벽화길은 1차 350m, 2차 680m의 골목으로 연장 1km 가 넘는다. 2차 골목길은 아직 조성 중에 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다. 올 11월 말이면 2차 벽화길도 마무리가 된다.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화성 야경은 압권

 

지동 벽화길을 둘러보고 나면, 해가 설핏 하는 시간이다. 이때쯤 지동제일교회 종루에 마련된 해발 97m의(지동교회 13층) 노을빛 전망대에 오르면, 서쪽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환상적이다. 그리고 일몰 후 17분이 지나면 화성에 조명이 들어온다. 이곳에서 보는 야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오면 지동시장 순대타운이 기다리고 있다. 곱창볶음 1인분에 8,000원인데 야채와 합해 철판에 가득 내어준다. 그 또한 별미 중 별미. 저녁을 먹은 후 소화를 시키려면 조금 걸어 올라가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의 야경을 볼 수가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이 아니던가?

 

 

그리고 잠은 행궁 앞 수원문화재단 뒤편의 사랑채를 예약하면 된다. 사랑채는 31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인터넷 예약이 가능하다. 만일 시간이 조금 일러 잠이 오지 않는다면 수원천 옆 통닭거리로 나가면 된다. 사랑채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다.

 

2일차 오전 관람 또 다른 재미

 

둘째 날의 수원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사랑채에서 묵은 후, 아침은 사랑채에서 해결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화성 행궁을 돌아보고 난 뒤, 11시에 행궁 신풍루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를 관람 후 공방거리를 돌아볼 수가 있다. 공방거리 끝에서 팔달문을 거쳐 남수문과 봉돈을 돌아 본 후, 다시 내려와 수원천을 걷는다.

 

수원천에는 자연 그대로 풀이 우거지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한다. 그리고 다리 밑에는 새로 마련된 벽화가 있고, 화성박물관이 있어 수원 화성의 축성과 장용영 군사들의 면모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리고 화홍문으로 올라가 인근에 있는 갈비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있다. 여유가 있으면 수원갈비를 먹으면 되고, 주머니 사정이 만만치 않으면 갈비탕으로 해결을 하면 된다. 이렇게 돌아보는 1박 2일 코스. 수원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이러한 1박 2일의 역사코스를 가족들과 함께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수원의 자랑거리인 이러한 1박 2일 코스를 돌아보지 않고 수원을 논하지 말라. 이참에 한마디 하고 가자.

 

“1박 2일 팀, 어여 오시오. 이렇게 좋은 1박 2일 장소를 놓아두고 어딜 돌아다니는 게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현재 남아있는 가옥의 안채는 조선 정조 7년인 178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사랑채는 그보다 늦은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정광보가 마을에 들어온 시기인 1400년대 후반으로 본다.

 

8월 8일 돌아본 동래정씨 종택. 현재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으로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 순으로 되어 있어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사랑채와 작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온기가 느껴지는 집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집이 생기가 도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대개 사람이 실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집이 좋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하다. 군포 동래정씨 종택은 집안을 여기저기 손을 보았지만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바깥담장은 장 정리가 되어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에 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 실한 연꽃만 보아도 이 종택은 간수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용도를 변경해, 중앙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사무실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으로 대문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후에 5칸을 더 지어 안채의 폐쇄성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은 보아지 않고 바로 사랑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과 작은사랑을 둔 종택

 

안채 앞으로 지은 사랑은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분을 하였다.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큰 사랑은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의 순으로 집을 구성했다. 서쪽 맨 끝에는 방의 벽면을 막고 그 앞으로 누정을 한 칸 앞으로 돌출시켜 올렸다. 누정은 삼면이 터지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장초석 위에 네모난 기둥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다.

 

 

 

큰 사랑채의 기단을 장대석으로 마감을 한 것에 비해, 작은 사랑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2층으로 기단을 쌓았다. 작은 사랑은 모두 세 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안채에서 바로 사랑으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찍고 열려있는 문으로 안채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새끼라도 해할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집을 돌아 중문으로 돌아가니 문이 닫혀있다. 귀농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한잔 찍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ㄱ 자형의 안채에서 느끼는 종택의 위엄

 

안채는 ㄴ 자 형의 중문을 마주하고 ㄱ자로 꺾어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채를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는 두 칸의 부엌을 조성한 듯한데, 현재는 그곳을 방으로 꾸민 듯하다. 댓돌 앞에 신이 놓여있다. 꺾인 부분에 대청을 놓고 이어 안방을 드렸다. 안방의 끝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도 유리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인이 없이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안채를 보면서 종택의 위엄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을 지은 정광보는 파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의 큰아들로, 맞은편 산 중턱에 조성된 정난종의 묘를 조성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독특한 사랑채의 구성과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자적인 집으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의 살림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다. 고택을 돌아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모든 고택에 사람들이 온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래등 같은 집에 온기가 없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대문채에 마굿간과 방앗간, 그리고 다락이 있는 집.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이집은, 지곡리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집이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이 되는 것을 1985년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겨 놓았다.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집은, 대문채와 행랑채, 헛간과 안채로 구분이 되어있다.

 

생활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문채

 

수산 지곡리 고가의 대문채만큼 특색 있는 가옥도 드물다. 우선은 대문채가 초가로 되어있는 것이야 일반 가옥에서는 많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지곡리 가옥의 대문은 싸리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우측으로는 다락이 있다. 다락의 밑으로는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다. 다락에는 각종 농기구들이 쌓여 있다. 대문채를 최대한으로 이용을 한 지곡리 가옥의 특징이다.

 

 

대문채를 나서 안채 쪽으로 들어가 보면 외양간과 방앗간이 대문채의 다락 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채의 밑으로 난 문은 외양간으로 바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들어 온 소를 안으로 돌아 들어오지 않고, 이 문을 통하여 바로 외양간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집이 있어, 고택의 답사길은 늘 즐겁다.

 

초가로 된 행랑채

 

지곡리 고가의 대문 안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헛간채가 있고, 초가의 행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로도 함께 사용을 하였다는 지곡리 고가를 찾았을 때, 한창 초가의 지붕을 새로 입히고 있었다. 초겨울이 되면 초가의 지붕을 덧입히는 것도 큰일이다. 일꾼들이 모여 짚단을 고르고, 그것을 잘 추려낸 다음 초가에 올릴 용마름을 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가 된 초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맨위는 대문채의 문인 사립문. 가운데는 대문채 외양간 위에 조성한 다락. 농기구 등을 보관한다.

 

- 자형의 이 초가는 사랑채와 같이 사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행랑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판문을 달은 안채에 붙은 방이 사랑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행랑채와 마주하고 있는 판문 밖의 안채 방에 툇마루를 달아 놓은 것을 보면,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판문으로 막은 안채

 

지곡리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판문으로 만들어진 중문이다. 행랑채와 안채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판문은 일각문 형태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솟을문으로도 보인다. 이 문을 판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담벼락이 판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판자로 담벼락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이런 형태의 모습이 지곡리 고가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청을 가운데 놓고 ㄱ 자형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사랑방과 한 칸 대청이 있고, 꺾이는 부분에 윗방과 안방, 부엌을 달았다. 전체적인 집안의 구조로 보아 안채가 협소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공간 구성을 잘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안방의 뒤로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놓은 것도 이러한 협소한 공간을 활용한 좋은 예이다.

 

판자 담벼락이 아름다운 부엌

 

지곡리 고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로 부엌이다. 부엌을 비교적 크게 둔 지곡리 고가는 아래 위를 흙으로 막고, 가운데를 전체적으로 판자로 막았다. 부엌이 이렇게 넓거나, 행랑채가 안채에 비해 방을 많이 들였다는 것은, 지곡리 고가의 주인이 비교적 부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외양간과 방앗간, 그리고 대문채의 다락 등도 이 집의 농사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엌의 벽은 집 뒤편으로 난 곳을 돌출시켰다. 그리고 돌출된 부분을 까치구멍을 내어 그릇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까치구멍을 통해 들어 온 바람이 그릇 등을 건조시키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지곡리 고가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집이라는 점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을 한 다양한 연출이 뛰어나다. 이러한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것이 역시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삶에 정취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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