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춥다. 이렇게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사람들은 움직이기가 만만치가 않다. 혹 감기라도 거릴까봐 밖에 출입을 했다가도 일찍 귀가를 한다. 집에 들어오면 나가기가 귀찮아진다. 추운날씨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웅크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에도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들이 있다.

 

수원 화성 남문인 팔달문에서 지동교 사이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곳은 버스정류장을 비롯해 지동교 방향으로 들어오면서 길 한편에 보면 항상 자리를 잡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나름 자신의 자리가 있는 듯,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노점상들이다. 자신의 점포가 없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지만 소중한 물건들이 있어

 

노점상들이 파는 물건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 노점상들 중에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이 파는 물건들은 거의 농산물들이다. 잡곡이며 야채, 나물 등으로부터 별별 것들이 다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도 가끔 만날 수가 있다. 사실 이런 노점상 할머니들을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노점에서 다양한 것들을 팔고는 계시지만 엄연히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으시려고 한다. 고작해야 한 두어 마디가 고작이다.

 

할머니 날이 추운데도 나오셨네요.”

집에 있으면 몸만 아프니까 움직여야지

물건은 누가 갖다 주시나요?”

차로 운반할 때도 있고, 더러는 이곳 가까운 곳이 맡기고 다니기도 하고

, 자녀분들이 이렇게 추운 날 나오신다고 하면 말리지 않으세요?”

“............”

 

이상하게 자녀들이나 가족들 이야기만 나오면 그때부터 함구를 하신다. 이럴 경우 대개 이 할머님들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자식들까지 들춰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자리 좀 지키게 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일까? 이곳에서 노점상을 하시는 분들 중 팔달문 옆 버스정류장 쪽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지동교 쪽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들보다 유난히 물건이 적다. 왜일까? 그것은 단속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적은 물건을 얼른 보따리에 싸서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사를 하는 것도 서러운데, 가끔 단속반들이 오면 얼른 보따리에 싸서 숨어야 해. 봐달라고 해도 신고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다는 거야.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도 아닌데 너무 할 때도 있어. 그냥 자리라도 좀 편하게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채 말끝을 맺지 못하신다.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씩 쫓겨 다니기도 했다고 하신다. 단속반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버스정류장이나 상가 앞거리에서 노점은 단속대상이기 때문이다. 팔달문 상가 조정호 회장은 어차피 낮 시간에 차 없는 거리로 운영이 되는데, 이곳에 노점상들이 장사를 할 수 있으면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양성화를 시켜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기관에서도 나름 고충이 있다는 것이다. 심심찮게 노점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민원으로 접수가 되는 전화를 받으면 단속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

 

관광상품으로 양성화 시킬 수는 없을까?

 

하지만 물건이라 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대개 변두리에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 버스를 이용해 나오시기 때문에 많은 양이 아니다. 그저 한 보따리 정도를 이고 나오셔서 길에 깔아놓는 것이 고작이다. 물건도 우리가 도심을 벗어나면 논밭두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노점상을 자주 이용하시는 주부들도 계시다.

 

 

이 할머님들 물건이 정말 싸고 좋아요. 직접 농사를 지으신 곡물과 들과 산에서 채취한 나물들을 잘 다듬어서 갖고 나오시잖아요. 가끔은 진한 시골 된장도 살 수가 있어요. 이분들이 무슨 점포를 갖고 계신 상인들처럼 많은 것을 파시는 것도 아닌데, 이분들이 조금 편하게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침부터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오늘도 할머니는 우산 하나 펼쳐놓고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바라볼 것이다. 그러다가 해질녘이면 어디론가 가버리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하루쯤 쉬셔도 될 텐데. 비가 오는 겨울날이 반갑지가 않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가 뿌리는 8월에 찾아간 양평 용문사. 그저 바쁠 일이 없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넓지 않은 길을 걷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로 인해 그 많던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은 뜸하기 때문이다. 8월 우중에 걷는 산길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바로 사찰기행이 아이겠는가? 거기다가 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함께이니.

 

 

대장경을 봉안했던 용문사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빗길에 만난 한 여름의 용문사

 

용문산용문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차 한 대가 뒤에서 빵빵거린다. 길이 좁으니 조심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갈 길이 바쁘니 얼른 비켜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이 좁은 길을 굳이 차를 몰고 들어와야 하는 것일까? 괜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절을 찾아갈 때는 가급적이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걷는 편이다. 굳이 차를 절 경내까지 차고 들어가기를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구도를 원칙으로 하는 도량이라면, 그리고 그곳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사고는 언제나 짜증만 유발시킨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몇 번이고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전통다원 앞에 도착을 했다. 그 전서부터 높이 42m11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는 전화에도 불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름 신령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 앞에서 잠시 경의를 표한 후 경내로 접어든다.

 

기품 있는 사찰 용문산용문사

 

용문산 용문사는 그리 크지는 않은 절이다. 하지만 천년고찰인 용문사는 기품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여름 날 만나는 용문사는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두고 여기저기 둘러 서있는 전각들 때문일까? 늘 용문사를 들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생각이다.

 

 

먼저 보물 제5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정지국사 부도 및 비를 돌아보고 다시 경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각들을 찾아다니면서 젖은 몸이긴 하지만 참례를 한다.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과 삼성각을 들린 후, 차라도 한 반 하고 싶어 경내를 벗어난다. 그렇게 다니고 있는 동안 비가 그쳤다. 다원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은 잊었다. 8월의 산속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절집이 좋아 절을 찾는다. 그리고 그 절 안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또 다시 절을 찾는다. 8월에 만난 양평 용문산 용문사. 그 안에서 천년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6에 소재한 양평 용문사. 스령 12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인 용문사 은행나무로 유명한 절이다. 용문사 경내에서 동편으로 약 300m 정도를 가면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를 만날 수가 있다. 이곳을 찾은 시기가 여름철 비가 내리는 날인 듯하다.

 

이 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작은 물길을 건너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직 수행에만 힘을 써

 

정지국사 축원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충숙왕 11년인 1324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2년인 135330세에 자초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 나옹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각지로 다니며 수도하다가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조선조 태조 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다비를 거행할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와 정지국사라는 별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전한다.

 

 

단아한 자태의 정지국사 탑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의 몸돌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에서 보이는 화려함이 없이 단아한 형태로 조성이 된 정지국사 탑. 아마도 생전 정지국사의 오직 구도에만 애를 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빗길에 찾아 들어간 골짜기에 그저 찾는 이 하나 없이 서 있는 탑을 보면서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요즈음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수행자인체 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지국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은 비도 소중한 보물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탑과 비가 일괄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 탑과 비.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양평 용문사에서 소로 길로 접어들어 탑을 찾아가던 길에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수렁에도 빠져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소중한 문화재를 만났다는 기쁨은 그 몇배나 행복인 것을.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그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화성 한 바퀴를 돌기 위해 한 켤레의 짚신이면 충분할 듯하다. 사실 요즈음 현대인들이 짚신을 신고 화성을 한 바퀴 돈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50회 수원화성문화제, 3일 째.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등에는 모두 자루 하나씩을 메고 있다.

 

짚신신고 수원화성걷기라고 쓰인 헝겊으로 만든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 안에는 짚신 한 켤레와 완주를 하기 위해 화인을 받아야 하는 완주증, 그리고 윗옷 한 벌이 들어있다. 그 중에서 옷은 모두 입었으며 비가 오는 바람에, 비옷도 하나씩 챙겨들었다.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저마다 비옷을 착용하거나 아니면 우산을 쓰고 있다.

 

 

짚신은 왜 안 신으세요?”

 

사람들은 모두 짚신을 신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짚신만 신거나, 아니면 신발 위에 짚신을 덧 신기도 했었다.

 

짚신을 신지 않으셨네요?”

, 비가 와서요. 짚신을 신으면 짚신이 젖은 흙길에서 다 버릴 것 같아서 신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짚신을 주머니 안에 잘 챙겨 넣고 걷고 있었다.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친구끼리, 또는 직장의 동료끼리 모여들었다. 선착순 1,000명만을 사전에 미리 신청을 받았다고 한다. 29일 오후 130분에 사람들은 화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에 꼬리를 물며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

 

 

비가 와서 불편하시겠네요?”

,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주를 하려고요. 저는 이 대회를 올해 세 번째 참가를 하는데 참 의미가 있다고 봐요. 전라북도 고창군에서는 머리에 성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 행사가 있던데, 그런 행사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친구들도 좋아하고요.”

 

성남에서 일부러 짚신신고 화성걷기가 하고 싶어 왔다는 이혜인(, 23)씨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친구들과 함께 화성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화홍문에서 벌어진 춤판

 

사람들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좀 늦은 시간에 참가를 했다는 한 가족은, 바삐 걸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천천히 걷는다. 굳이 화성을 걷는데 빨리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날 행사는 창룡문을 출발하여 장안문을 거쳐 서장대에 올랐다가, 화성 행궁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화성을 따라 걷다가 보니,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 누각 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 그 위에서 춤판을 벌인 것이다. 참 볼 것 많은 화성문화제의 모습이다.

화성 걷기도 즐거운데 이렇게 가는 곳마다 볼거리들이 가득하네요. 정말 기분 좋습니다. 비는 약간씩 오지만, 차라리 이런 날이 덥지가 않아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복 받은 것이죠.”

걷기에 참가를 한 시민의 말이다.

 

 

오후 1시 반에 창룡문을 출발한 사람들은 최종목적지인 행궁광장 확인존 부스에서 완주증을 절취하여 제출하면 된다는 것이다. 오후 630분부터는 완주를 한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 행사까지 마련하였다. 화성문화제의 연계 행사로 펼친 짚신신고 수원화성걷기’. 비는 오지만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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