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비(塔碑)’란 옛 고승들이 입적을 한 후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그 옆에 승적기를 새긴 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는 광종의 명에 의헤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워진 법인국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안에 소재한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옛 보원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보원사 터에는 보물 5점과 함께 많은 석재들이 있으며, 주변에는 국보인 용현리마애삼존상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신과 관계하는 꿈을 꾸고 난 탄문

 

법인국사 탄문의 탄생일화는 신비하다. 국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관계를 맺는데, 한 중이 홀연히 나타나 금빛 가사를 주고 갔단다. 이 날 탄문의 어머니는 임신을 하였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법인국사의 자는 대오이며, 성은 고씨이다.

 

 

 

 

 

탄문은 15세에 출가할 뜻을 비쳐, 북한산 장의사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5년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안산을 기원하니, 태어난 이가 바로 광종이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후에 새로 낙성을 한 귀법사의 주지와 왕사가 되었다.

 

광종 25년인 974년에 법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국사로 임명을 하였다. 그가 서산 보원사로 길을 떠나자, 광종은 친히 왕후와 태자, 백관 등을 대동하고 개경 교외까지 그를 배웅하였다고 한다. 보원사로 온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국사가 된 이듬해에 기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75세, 법랍은 61세였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귀부와 이수

 

법인국사의 탑비는 경종 3년인 978년에 세웠다. 대개 거북이의 몸과 용머리를 가진 비의 귀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를 거치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탑비받침인 귀부 역시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의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인 이수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귀부의 등에 새겨 넣는 문양이 없이 밋밋하게 구성을 하였다.

 

또한 비 머리인 이수의 용 조각도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형태는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단순하다. 거북의 앞발도 일반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있는 표현이 아니라 형식적인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 법인국사 탑비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산 보원사 터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과 법인국사 탑비. 아마도 이 탑비는 법인국사의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978년에 이 탑비를 세우고 ‘법인’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묘. 현재는 사적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 어느 왕릉보다도 화려하게 조성이 된 김유신묘는 석물과 무덤을 두르고 있는 십이지신상들로 인해 유명하다. 묘의 입구에 서 있는 문은 <흥무문>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왕의 격식을 갖춘 묘

 

김유신의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비에 숨은 비밀, 왜 그랬을까?

 

이 비와 마주보고 서 있는 또 하나의 비. 그 비는 1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에는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비의 맨 아래글자인 능(陵)자가 물에 젖으면 묘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왕으로 추증을 받아 흥무대왕이란 호칭을 받았지만, 김해 김씨들이 관리를 하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유신묘를 찾아간 날은 날씨가 좋아 <묘>자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관리인인 듯 한 분에게 물을 부어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대답이다. 삼국을 통일하고, 왕으로까지 추증을 받은 김유신.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시시비비를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천년이나 지난 세월에, 굳이 그렇게 임금이 아니었음을 강조를 했어야 했을까?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또 다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참 우리네 인간이란 것들은 참 묘하다. 왜 굳이 그런 일을 벌어야했는지, 하기에 사람은 살아생전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라고 성현들이 말씀하셨나 보다. 오늘 이 묘비 하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비란 어느 인물의 행적을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에 비문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이는 비의 머릿돌을 갖고 있고, 비 머리에는 제목을 적어 넣는 네모난 부분을 마련했으면서도 정작 비에는  단 한 자의 비문이 없는 비. 이러한 비를 '백비'라 부르는데, 이 비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 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조각기법이나 그 솜씨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거북이의 몸으로 되어있으나, 귀두가 깨어져 나간 것인지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비를 받치는 귀부는, 대개 몸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를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연곡리의 귀부는 말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연곡리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과 비의 받침인 귀부

말머리에 백비, 누구의 비인가?

보물 제404호로 지정이 된 연곡리 석비는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와 몸돌인 비, 그리고 아홉마리의 용을 조각한 머릿돌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받침돌인 귀부는 등의 무늬는 거북 등의 무늬와 같이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 상당히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거북이의 앞발은 파손이 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는 마치 말머리와 같은 모습이다. 이 귀두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닌 듯하다. 앞부분이 절단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귀두를 보면 머리의 옆에 지느러미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보이는 귀두인 용머리인 것으로 처음에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귀두는 앞부분이 어떻게 이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일까? 그 외에 귀두부분은 용머리 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해서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받침돌의 거북은 그 문양들을 볼때 상당히 기능이 뛰어난 장인에 의해서 섬세하게 조각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귀두라면, 당연히 중간에 누구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비문이 없는 백비, 누구의 비일까?


비에는 전, 후면을 비롯해 측면에도 글자 한 자가 없다. 

찬찬히 돌아보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는 했어도, 전체적인 비의 모습은 뛰어나다. 등 무늬인 귀갑문은 정교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몸을 받치고 있는 받침부분은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잎은 작고 양감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귀부로 꾸며진 받침돌과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 형채 등은 고려 초기의 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비의 위에 얹은 머릿돌에는 모두 9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용들은 서로 몸을 꼬아 뒤틀고 있는데, 정교한 그 조각은 가히 뛰어난 작품이다.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기 위해 다투는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뛰어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곡리 석비. 도대체 그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단 한 자의 기록도 없는 비만을 갖고는 그 주인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말머리에 비문이 없는 백비. 그리고 전체적인 조각기법이 뛰어난 이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일부러 비문을 적지 않았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헤 훼손이 되어 비문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혹 이 비에 어느 인물의 일대기를 적으려고 마련을 했다가, 갑자기 폐사가 되는 바람에 적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백비로 남아있는 뛰어난 연곡리의 석비는 그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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