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비’란 말이 있다. 비가비란 양반가의 사람으로 소리꾼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 비가비는 우리 창극사를 통 털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가중호걸’이라 불리는 권삼득 명창이다. 권삼득명창은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가 처음으로 생긴 후 정조, 숙종 때 활약을 한 권삼득 명창은 전기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권삼득명창에 판소리 일대기에 기억할만한 소리꾼이다. 그러나 오래전의 명창인지라, 그 명성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몇몇 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 서책에는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권삼득명창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박경리의 『토지』(솔출판사, 1993)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곳에서도 권삼득명창을 책에 기술할 만큼 뛰어난 소리꾼이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소리조를 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를 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른 것도 권삼득명창의 소리가 우렁차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하한담(하은담)과 최선달에게서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소리꾼들은 초기소리를 한 명창들로, 우리 초기 판소리는 장원을 한 사람의 사당에 가서 축원을 하는 <홍패고사>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하한담, 최선달, 우춘대 등 초기명창을 지난 후 가장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도 이런 초기소리를 했을 것이다.

 

 

권삼득명창의 흔적을 찾아가다.

 

완주군 용진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를 따라 소양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마을이 보인다. 마을 길 안내판에는 <권삼득명창 출생지>란 작은 안내판에 하나 부착이 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권삼득명창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가 하나 서 있고, 그 안에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 뒤편으로는 ‘충현사’라는 제각이 보인다.

 

철책으로 담장을 친 안에 서 있는 작은 비 한 기. 비에는 <권삼득 선생 출생지>라고 머리말을 쓰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 명창이신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1771년(영조 47년) 안동 권씨 래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41년(헌종 7년)에 별세하였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하여 삼득(三得)이라 불리웠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 출신 광대로 창에 천부적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숲속에서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판소리사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전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된 문화의 거개이다. 하지만 그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가감이 되기도 한다. 하기에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복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콩 서 말을 지고 용소로 떠나다.

 

권삼득명창은 집에서 광대 짓을 한다고 쫓겨난 후,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향한다. 조선창극사에서 정노식은 초기명창의 이름을 들면서 하한담과 최선달, 우춘대 등에 이어 ‘고송염모’라는 네 명을 지칭한다. 고수관과 송흥록, 염계달과 모흥갑이다.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을 이 네 명의 이름밖에 놓은 것이다. 권삼득명창이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내려가 득음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면,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남원 지리산 자락 춘향이 묘가 자리한 맞은편, 용소폭포에서 득음을 위한 소리공부에 전념을 한 것 같다. 이곳에도 <국창 권삼득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뒤편으로는 육모정이 있고, 앞으로는 용소 푸른 물이 바위를 미끄러져 깊은 소 안으로 자맥질을 한다.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이곳에 온 권삼득명창은 소리 한 바탕이 끝날 때마다 콩 한 알을 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구룡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공부에 전념한 권삼득명창. 콩 서 말이 모두 용소로 들어가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대 명창으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오늘 이 두 곳의 소리꾼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바로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요즘처럼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진정한 소리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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