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10일이 지났다. 장마가 올라온다고 하더니 하루가 지나가지 않아 장마전선이 다시 남하했다고 한다. 태풍 너구리의 간접영향에 들었다고 하는 제주에는 많은 비가 뿌렸다는데 이곳은 그저 잠시 빗방울만 보였을 뿐이다.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사람들은 나가 다닐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오전에 잠시 일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요즈음 같은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안에 깔린 두툼한 보료와, 좁은 거실에 차지하고 있는 정수기 하나가 도대체 이 더위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로 한 여름을 난다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가까운 장에 나가 몇 가지를 두어 번에 나누어 사들고 돌아왔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잡은 앞뒤로 모두 길이다. 사람들이 지나치면 그대로 방안이 다 노출이 된다. 그래서 늘 방의 창문을 닫아놓고 생활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올 여름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워낙 더운 날이기 때문에 한 낮에는 가만히 있어도 방안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다.

 

 

발을 이용해 맞바람이 불게 해

 

그동안 고장 난 전등이며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형광등과 청소기를 먼저 과감하게 바꾸어버렸다. 거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철지난 컴퓨터(그래도 사용은 할 수가 있었다)도 고물상에 주워버렸다. 그것만 해도 집안이 조금은 밝아진 듯하다. 입구에 버티고 있던 화분대로 사용하던 정수기통도 밖으로 내놓고, 신발장도 한 곳으로 정리를 하였다.

 

길에서 들여다보이는 창문에는 왕골 발을 늘어 직접적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어둡고 침침한 컴퓨터가 놓였던 곳도 컴퓨터를 치우고 말끔하게 정리를 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제 기능을 잃은 청소기 교체와 더불어, 여름철 바구미가 생겨 애를 먹게 하는 쌀통의 교체일 것이다. 그 두 개를 바꾸는 데만 125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썼으니, 이번 달 생활비가 빡빡할 듯하다.

 

 

시원한 여름으로 바꾼 방안

 

하루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역시 방이다. 2개를 사용하지만 하나는 옷방으로 사용하고 있어, 두개의 방이라고 해도 하나 밖에는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있는 이 방에는 수많은 자료와 책, 컴퓨터 2(노트북 포함)와 조금은 구닥다리 TV 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그동안 사용하고 있던 조금은 두툼한 보료와 큰 베개를 치워버렸다. 그리도 그 자리에 대나무 돗자리를 깔았다. 비록 강화 화문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안이 한층 밝아지고 시원해 보인다. 대나무에는 꽃무늬까지 그려져 있어 더 시원한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동교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고 있는 편백나무 베개까지 샀다. 그리고 보니 여름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다. 집안의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무엇인가 분위기 쇄신이 필요할 때

 

사실 이렇게 갑자기 집안 분위기를 바꾼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 며칠 전 갑자기 40년간이나 피어오던 담배가 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처럼 담배를 끊겠다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표를 한 일도 아니다. 그저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48시간이 지났다. 눈앞에 담배와 재떨이 등, 평소에 집안에서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던 곳에 그대로 놓여있는 담배가 보인다. 그런데 피우고 싶다는 마음이 나질 않는다. 그저 거기 담배가 있나보다 하는 정도이다. ‘작심삼일이라고 한다. 혹 작심삼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집안 분위기를 바꾼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아직은 장담을 할 수 없다. 이제 3일째로 들어섰는데, 새벽에 나가 담배를 보면 으레 찬물을 한 잔 마시고 담배를 입에 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었는데, 오늘 새벽엔 나는 나대로 담배는 담배 대로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바뀐 집안 분위기만큼과 사용한 경비만큼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아대로 죽 담배는 담배 대로 살아야 할 텐데 잘 되려나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는데, 설마 그 말이 맞는 말은 아니겠지?’

문화재란 참 기묘한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문화재를 답사할 때는, 가급적이면 철마다 한 번씩 찾아간다. 물론 일부러 철마다 찾아가는 곳도 있으나, 대개는 그 지역을 지나칠 때 들려가는 경우가 많다. 10월 29일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시민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곳 가까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가을마다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다. 가을경치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전 역시 여기저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고 북적인다. 경기전 안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 분위기 정말 좋아

가을에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답사일정을 많이 잡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아울리는 문화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철마다 왜 문화재의 모습이 그리 달라져 보이는 것인지. 그렇다고 문화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화재 주변의 경치가 달라지는 것이지.

29일 찾아간 경기전의 예종대왕 태실과 비도 마찬가지이다. 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은 형형색색의 단풍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냥 볼 때는 조금은 삭막한 석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지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문화재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도,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 주변에 단풍을 심을 수는 없을 테니,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문화재 중에 복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까?

태 항아리를 가져간 조선총독부, 좋아할 수 없는 이웃

이웃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일본은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 있다니,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웃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두 사람이 태실의 돌난간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마저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해주기만 한다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내판이라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여 땅에 묻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은 태를 묻은 곳이란 뜻이다. 예종대왕의 태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이다. 원래 이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묻었다가, 영조 10년인 173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태실이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근처에 방치가 된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결국 이 태실 안에는 예종대왕의 태는 없고, 그 태를 감쌌던 석조물과 비만 남은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태실과 비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화려하지 않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조성한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배가 부른 원통형의 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도탑의 형태이다. 난간은 두 개의 6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난간을 둘렀는데, 이음새 부분에는 문양을 한 받침돌을 놓았다.


석비는 태실과 함께 옮겨온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있고,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연대를 음각하였다.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의 얼굴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앞뒤로 새긴 용은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날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는 평범하게 조각이 되었다. 다만 거북의 귀갑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갈 것인가?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를 보면서, 이 가을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 태를 훔쳐다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단풍도 그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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