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8) - 서장대와 서노대

화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화성장대’라 불리는 ‘서장대’이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서장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사면팔방으로 모두 통하는 곳이다. 석성산의 봉화와 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는 곳이다.


서장대, 한 때 어느 취객에 의해 웅장한 서장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 문지방 위에는 정조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인 [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정조 이산의 꿈은 무엇일까?

정조임금은 이 장대에 올라 장용위 군사들을 호령했다. 이산은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갖고 북진을 하여, 옛 고토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장대 위에서서 사면팔방을 바라보면서, 막힘없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무한한 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엮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깃든 이산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난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정조임금의 꿈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저마다 큰 꿈을 키워나갈 수가 있을 텐데. 늘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장대에는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받치었고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층의 반자가 되었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다연발 화살을 쏘아대는 노대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척 5촌,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척 5촌, 높이 12척,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凸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




고 하였다. 장대 쪽으로는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부를 둘러 총안을 낸 여장을 둘러놓았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돌을 깔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쇠뇌를 쏘았을 것이다. 쇠뇌란 다연발로 발사하는 화살을 말한다. 쇠로 된 발사 장치를 갖고 있는 이 쇠뇌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임금 이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정조는 더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군사들의 위용을 보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이산의 꿈을 지금 이 땅의 젊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철모르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연인이 조금은 아쉬운 까닭이다.

삼년산성, 3년간이란 시간을 들여쌓았다는 석축 산성이다.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축조를 하였으니, 성을 쌓은 지가 무려 1,540년이 지났다. 그 뒤 소지 마립간 8년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 일대에 소재한 이 삼년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 신라의 석축 산성을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 초의 석축산성, 그 대단한 성 쌓기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소중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총 길이는 1,680m 정도이고,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이 되어, 이 성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시에는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공략하다가 크게 패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최고 22m에 달할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높게 쌓았다. 성벽위의 폭은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빗길에서 삼년산성을 걷다

비가 뿌린다. 그치려니 생각했던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성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들어섰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년산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석축산성이 아니다. 마치 서구의 한 웅장한 고성을 방불케 하는 그런 성이다.




엇갈려 쌓기를 한 삼년산성과 서문의 문을 달아냈던 자리(아래사진 2장)

성이 터진 곳이 서문지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문의 기둥과 문을 달아내었던 흔적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화를 겪었을 삼년산성이다. 새롭게 복원을 한 성벽은 그저 놀라울 정도이다. 납작한 돌을 이용해 쌓은 성벽은 한 줄은 가로쌓기를 하였고 한 줄은 세로쌓기를 하여, 서로가 엇물려 튼튼하게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년산성은 남쪽과 북쪽은 성을 안과 밖을 모두 쌓아올려 철옹성을 만들어놓았다.

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걸어본다. 비는 계속 뿌려대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수많은 산성을 보아왔지만, 삼년산성과 같은 성은 처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북치성을 비켜두고 보은사를 지난다. 성안에 쌓은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니. 당시 이 성을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일까?




삼년산성을 보고 그 위용에 놀라다
 
북동치성 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만큼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돌출이 된 치성이 보인다. 남동치성 쪽으로 돌아가니 허물어진 성벽들이 산비탈에 덮고 있다. 무너진 곳의 성벽을 보니, 일반 성과는 달리 안에도 돌을 엇갈려 쌓기를 하였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미 천여m를 걸었는데, 뒤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 남짓 걸어 다시 서문지 쪽으로 향한다. 복원이 된 이곳의 성벽을 바라보니, 그 장엄함이 눈에 보인다. 서문지 가까운 곳에 낸 치성은 둥근 원형에 가깝다. 치성 위로 오르니, 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1시간 여를 조금 더 걸려 삼년산성을 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와 땀으로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진다. 서문지 안 암벽에는 암각화가 보인다. ‘아미지’라 쓴 이 글은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는 삼년산성. 그 장엄한 산성의 모습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복원을 한 서문지 부근 성벽. 그 높이도 높지만 성 쌓는 방식이 특이하다. 치 위에 오르면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성을 범접 할 수가 없다.

서문지 안쪽에는 암각서가 보인다. '아미지'라고 쓴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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