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부터 작정을 했다. 올해는 23일 여행을 계절별로 해보아야겠다고.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발목을 잡혀 제철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이번에는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짐을 꾸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생각 외로 짐 보따리가 묵직해 질 것만 같다.

 

23일 여행 채비를 하려고 준비를 해보았다. 그런데 꽤 소소한 것들을 많이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준비를 해서 여행을 떠나야 할까? 앞으로는 이런 준비물보다 더 소규모화가 될 수 있는 여행 보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앞으로 2~3년 안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지금도 소형화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앞으로는 PC를 대신할 소형화된 제품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거기다가 카메라와 휴대폰이 서로 상응을 해 그 자리에서 바로 시진을 편집할 수 있고 글을 올릴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번잡하게 준비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23일간 어디로 갈까?

 

긴 시간을 돌아볼 수가 없으니 피서 겸 그리 멀지 않은 곳을 택하고 싶다. 어차피 가까운 곳이라야 무슨 일이 있으니 바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수시로 일이 생기다 보니, 어디 가서 진득하니 며칠씩 묵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하기에 가까운 곳에서 가고 싶었던 곳을 찾고 싶다.

 

 

그중 가장 바람직한 곳은 역시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거리도 가깝지만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도보를 이용하면서도 많은 문화재를 담아올 수가 있다. 거기다가 강화도에는 성곽까지 자리하고 있으니 금상참화가 아니겠는가? 예전에 전등사를 들어가면서 둘러본 성곽 말고도 또 다른 성들을 둘러보고 싶다.

 

강화도의 매력은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많은 고인돌들이다. 거기다가 해안가에 마련한 수많은 진들과 각종 문화재들. 또한 민속자료 등도 산재해 있는 곳이다. 아마도 23일의 일정으로는 강화도의 일부밖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을 돌아보고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 기고 싶은 곳은 판소리 발원지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가고 싶은 곳은 바로 판소리 발원지이다. 판소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동편제와 서편제만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中高制)가 있었다. 중고제는 한수 이남과 금강 이북의 지역인 경기 충청간의 소리이다. 송서율창이라고 하여 마치 선비가 달밤에 글을 읽는 듯한 소리라는 중고제의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다.

 

중고제 중 경기도의 소리인 경제는 여주 신륵사에서 득음을 한 염계달의 창법이다. 또 하나의 창법은 판소리사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3대 명창을 배출한 김성옥-김정근-김창룡, 김창진의 기문인 김문이다. 이들의 고향인 바로 강경 일끗리라고 한다. 그곳과 이동백의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희이산, 김정근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살았다는 서천군 장항읍의 빗금내를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부여 부소산성과 공주 공산성 등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의 백제의 흔적을 만나보고 싶다. 시간이 23일 밖에 안되는데 갈 곳이 너무 많아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곳 날을 잡아 준비 해놓은 짐을 들고 길을 나서리라 마음을 먹는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창건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찰들은 저마다 계절별 아름다움이 있다. 절이라는 곳이 사시사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무량사는 겨울에 특히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고찰이다. 무량사는 사실 우리소리문화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운 곳이다.

 

 

2층으로 지은 불전 무량사 극락전

 

무량사의 중심건물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이 된 무량사 극락전이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2층 불전으로,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정면이 3,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 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불교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배흘림기둥과 활주가 고풍스러워

 

무량사 극락전은 이 사찰의 경내가 극락세계임을 뜻한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뒤 인조 11년인 1633년에 중창하였으며,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이다.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전각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2층 불전으로 지었으며,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 주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겉에서 보면 2층집이지만, 내부는 통으로 되어있는 이러한 불전은 오층 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과,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화엄사 각황전이나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도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다. 이 불전들은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극락전의 기단은 장대석 세벌대로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배흘린 원형기둥을 세워놓고, 1, 2층 모서리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놓았다. 아래층 문살은 가운데가 네 짝이고 점차 두 짝, 한 짝씩으로 줄었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아냈으며, 2층 정면도 원래는 살문을 달아있다고 한다. 이는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마련한 것이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동양 최대의 소조삼존불을 모셔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1565호인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이 심존불은 흙으로 빚어 조형한 것으로 동양 최대의 삼존불이다. 중앙에 좌정한 아미타불은 높이 5.4m이며, 양쪽에는 높이 4.8m의 관세음보살과 역시 4.8m의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두고 있다.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존상은,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특히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8-1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담장 옆에 서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무량사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柱)’가 서 있다.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한 것이다.

 

이 깃발을 걸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쇠 등으로 만든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청주,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등에 드물게 철당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당간을 붙들어 매는 버팀돌인 두 기둥만이 남아 있다.

 

고려 전기에 마련한 무량사 당간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 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다. 또한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겨 넣었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위 아래로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세울 수 있는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 세월 그 자리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눈을 밟는 것만으로도 죄스럽다. 당간을 보기 위해 담장 밑으로 다가선다. 당간을 받는 중앙에 돌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대충 손으로 쓸어내니, 가운에 당간을 받는 자리가 보이고, 주변은 둥그렇게 돋을새김을 해 놓았다. 이렇게 돌로 다듬어 세워 놓은 당간지주.

 

남들은 그저 두 개의 돌기둥을 왜 세워놓았을까 조차도 생각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둥은 나름대로 절의 크고 작은 행사 때 당을 매달기 위한 구조물이다. 이 당간에 얼마나 많이 당이 걸렸던 것일까? 천년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간지주가 새삼 경이롭다.

 

 

많은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을 만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낸 석조물들. 절을 찾을 때마다 그런 옛 문화재들에 대해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지난 선조들과의 조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다녀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 사철을 돌아다니고 있는 내사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마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숱한 정성을 만난다. 그런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 옆에 서서 비바람과 눈을 맞으면서 천년 세월을 서 있는 무량사 당간지주. 그 아무렇지도 않게 버틴 천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고마움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이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말 무염선사가 중수하고, 고려 고종 때 중창을 하여 요사채 3-여 동과 산내 12개의 부속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조선 인조 때 대중창을 하였으며, 1872년 원영화상이 중창을 해 오늘에 이른다.

 

천년 고찰인 무량사에는 보물 5점과 충남 지방문화재 8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2층으로 조성된 극락전 앞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런 사찰의 배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배치형식이다. 백제불교의 혼을 지니고 있다는 무량사. 눈이 쌓인 무량사는 정취가 남다르다.

 

선이 고운 무량사 석등

 

극락전 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그 앞에 자리한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 석등이 석등을 볼 때마다 참 선이 곱다는 생각이 든다. 지붕돌인 보개석 위에 눈이 한 편에 쌓인 석등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이 석등을 볼 때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의 버선코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석등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를 밝혀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 앞에 조성한 석등의 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량사 석등은 아래 받침돌 위에 기단부를 놓고 그 위에 간주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그리고 맨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화려하지가 않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오는 시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이는 석등은, 한 마디로 단아한 형태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있는 이 석등은 간결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이 석등을 만날 때마다 기품있는 반가의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간결한 연꽃이 기품을 더해 

 

무량사 석등의 기단부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간주석은 팔각의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을 놓았다. 윗받침돌인 상대석과 아래받침돌인 하대석에 새긴 연꽃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간결한 조형에 비추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좀 좁은 편이지만 간주석인 팔각기둥이 짧은 편으로,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고 날렵함을 표현하였다. 팔각으로 조형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게 했다. 화사석의 8면 중 넓은 4면에 화창을 내어, 전체적으로 조형미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마의 경사가 버선코를 닮아

 

화사석 위에 얹은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추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린다. 이렇게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올려진 귀퉁이의 선이 새색시의 버선코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올린 작은 연꽃봉오리모양의 보주 또한 단아함의 극치이다. 많은 상륜부가 없는 것이 오히여 이 석등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듯하다.

 

눈이 쌓인 날 찾아간 부여 무량사. 그곳에서 만난 석등 한 기가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단아하고 기품있는 석등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긴 하지만.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연꽃 문양 역시 신라시대의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만 같다.

 

부여 무량사. 참 이곳은 아픈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어찌 보면 우리 판소리사에 가장 비극적인 일화 한 마디가 이곳에서 전하고 있으니.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고찰이다. 천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고난의 역사와 아픔의 문화를 속으로만 숨죽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눈이 내려 가득 쌓인 날 무량사를 찾았다. 미처 치우지 못한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만 내놓았다. 만수산 무량사라고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석등과 오층석탑, 극락전이 나란히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은 중층으로 지어진 전각으로, 밖에서는 2층이지만 안으로는 위아래가 통해 있는 독특한 건물양식으로 축조되었다.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무량사

 

무량사는 보물 제1497호로 지정된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이 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남원 민복사지를 주무대로 한 <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로우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다. 서유영의 <배관기>에는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 이 초상화와 같은 표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통의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표현들을 한다. 흔히 문화적 요소를 띤 요소들이 성공을 하지 못하는 영화계에서, 서편제라는 영화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흥행에 셩공을 했기 때문이다. 그 서편제에 제자들을 키우고 난 뒤 쓸쓸히 아편쟁이로 세상을 마감하는 한 인물이 있다.

 

 

극락전 뒤로 난 소로길을 따라가면 작은 전각 하나가 보인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고, 커다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풍취를 자아내게 한다. 삼성각(예전에는 산신각이었다)이다. 이 삼성각에 한 사람의 명창이 10년 세월을 피를 토하듯 소리공부에 전념하여 득음을 하였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조선조말 5대 명창이던 김창룡 명창의 동생인 김창진이었다.

 

비운의 소리꾼 김창진의 숨은 비사

 

김창룡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한 김성옥과 그의 아들 김정근(무숙이 타령의 대가), 그리고 김창룡과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3대의 명창 가문이다. 김성옥은 여산의 한 굴에 들어가 맛소리의 멋을 더하는 진양조를 창안한 본인이다. 굴 속에서 소리공부에만 전념한 김성옥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 박동진 명창이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하여 부여 무량사에서 김창진 명창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정근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천 장항 빗금내로 이주를 해서 살았다. 형인 김창룡에게는 소리를, 동생인 김창진에게는 북(고수)을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리꾼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천하게 대접을 항 때였다. 김창진은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지내다가, 큰 뜻을 품고 부여 무량사로 숨어들었다.

 

10년 세월,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명창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원각사로 올라가 소리 한 판으로 5명창을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자신들의 판에 끼어든 김창진이 반가울 수가 없었을 명창들. 특히 친형인 김창룡명창이 가장 싫어했다는 것. 그런 고통을 잊고 싶어 내려온 곳이 서천 너더리(판교). 그곳에서 마지막 제자인 고 박동진 명창을 만났단다.(이 이야기는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 제작시 출연을 한 박동진 명창의 증언)

 

김창진 명창이 10년간 독공을 하여 득음을 했다는 무량사 산신각(현재는 삼성각)을 돌아보고 있는 다큐멘터리 화면속의 고 박동진 명창

 

그렇게 슬픈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무량사다. 눈 쌓인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여기저기 자국을 남긴 발자국이 오히려 죄스럽기만 하다. 날씨가 춥긴 하지만 쉽게 무량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디선가 김창진 명창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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