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읍에서 동남쪽으로 29km, 처음 이 청량산을 찾아갔을 때는 주변의 산 정점을 넘는 봉우리가 비포장이었다. 오프로드를 한답시고 차를 몰아 덜컹거리는 길을 따라 찾아간 곳, 청량산 청량사. 각종 기암괴석이 솟아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 곳에 뒤로 암벽을 두고 주변에는 수많은 봉우리로 병풍을 친 청량사가 숨어 있다.
 
해발 870m의 청량산은 금탑봉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봉우리 12개, 8개의 동굴과 12개의 대와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세운 청량사를 비롯한 절터와 암자, 관창폭포 등 수많은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천혜의 자연보고이다.
 
 

 

청량산 도립공원 내에 자리한 청량사, 절을 오르는 길이 가파라 숨이 턱에 닿는다. 하지만 오르면서 올려다 본 청량사는 구름 끝에 매달려 있고, 청량사에 올라 둘러본 경관은 선경이었다.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 현재는 그동안의 잦은 소실로 인해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천년 고찰로 그 주변의 정경만 보아도 옛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곳이다.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길지 중의 길지로 손꼽는다. 6.6봉(12 봉우리)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중 청량사가 바로 연꽃의 수술자리라는 것이다.

 

  
그저 탄성만 하고 말았다. 말이 필여없는 경치다

  
어디서 바라보나 역시 절경이다

 

청량사 주변의 산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시간이 없어 청량사만 돌아보고 왔지만, 언제 틈을 내 며칠 이 청량산을 둘러보며, 그 전설이 담긴 곳들을 하나하나 찾아볼 생각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청량산이요, 청량사다. 청량사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원래 이름은 탁필봉이지만 주세붕 선생이 지형을 보고 봉우리 이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수많은 인재들이 들어와 공부를 했다는 청량산. 퇴계뿐만 아니라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등의 역사 속의 걸출한 인재들이 바로 이 청량산에서 나름대로의 뜻을 세웠댜. 퇴계의 '청량산가'에 나오는 6.6봉은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축융봉 등 12봉우리를 말하며, 하나같이 솟아 바위병풍을 두른 듯하다. 또 신라 때의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았다는 김생굴을 포함하여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방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 8개 굴이 있다.

 

  
구름 끝에 걸린 절 청량사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니 전설 하나쯤은 전할 것이다. 옛날 김생이 이 굴에서 9년 동안 공부를 한 후, 스스로 명필이라 자부하고 하산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나타나 자신도 9년 동안 길쌈을 했으니 솜씨를 겨뤄보자고 했단다. 두 사람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서로 솜씨를 겨루었는데, 길쌈해 놓은 천은 한 올 흐트러짐이 없는 데 반해 김생의 글씨는 엉망이었단다. 김생은 스스로 자신의 자만을 나무라며 1년을 더 정진한 후 세상에 나와 명필이라 칭송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청량사 경내에 산신각

 

어디 이런 전설뿐이겠는가? 그만큼 청량산은 아름답다. 그리고 산 밑에 걸린 청량사는 어디를 보아도 가히 절경이다. 올 가을 단풍이 청량산을 물들일 때 다시 한번 찾아 옛 전설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다.

와선정(臥仙亭), 신선이 누운 자리일까? 아니면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일까?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골띠말. 좁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끝 계곡가에 자리 잡은 와선정이 있다. 정자 건너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와선정이 돌담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와선정은 흡사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와선정이라고 했을까? 날이 추워서인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와선정은 사철 경계가 다 다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여름철 이 노송들과 함께 주변의 느티나무가 어우러지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글이 있다. 2004년도에 이 다리를 축조하면서 곁에 세워둔 비다. 다리에는 오현교(五賢橋)라 적혀있다. 이 정자를 지은 태백오현(太白五賢)을 상징하는 다리다. '병자호란(1636)에 벼슬도 버리고 太白山下 춘양에 은거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온 태백오현의 덕을 기리고 교유회동의 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고 오현교라 이름 짓다'라고 적혀있다.

 

다리를 건너 와선정으로 다가간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이라 칭하는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5~1654), 포옹 정양(鄭瀁, 1600~1668), 잠은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가 이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와선정이란 이름은 주변의 경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사덕암이라는 바위는 덕을 기리고, 은폭이라 하여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은색인데, 그 밑 바위가 신선이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와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며 와선정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

꾸미지 않은 간단한 현판도 태백오현의 심성을 닮았다

 

태백오현은 모두 이 와선정에서 10리~30리 거리 내에 은거를 하였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이곳 와선정에 모여 회합을 갖고, 풍류를 즐겼다.

 

와선정은 계곡 쪽만 놓아두고 돌담으로 둘렀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와선정의 출입구다. 현판은 그저 퇴락한 옛것 그대로 걸려있다. 안은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지만 누마루방이다. 아마 여름 한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 정도로 지어진 정자는 사방에 문을 내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초계천이 시원한 산바람을 몰고 들어올 수 있도록, 사방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했나보다.

 

와선정은 난간을 두르고 계곡물이 흐르는 쪽으로는 모두 뮨을 내었다.

  
방은 온돌을 놓지않고 누마루로 깔았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사방에 난 문을 열면 은폭과 사덕암, 그리고 흐르는 물과 늙은 노송, 맑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다. 태백오현은 이곳에 모여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경계에 눈을 떠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봉화는 군내에만 100여 개가 넘는 정자들이 있다. 와선정은 그 많은 정자 중 빠지지 않는다. 실록이 우거진 여름 철,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겨야겠다

경체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경체정은 뒤편에 낮은 산을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한다. 그저 바라다보면 단아한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정자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정자다.

 

전국에 있는 많은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거개의 정자들이 문을 닫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정자를 만나면 그저 담 밖으로만 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설명이야 안내판이 있으니 대략적인 것은 알 수가 있다고 해도, 그 속을 모르니 답답할 때도 있다.



 

사면에 다른 글씨로 현판을 달아

 

  
경체정에는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중에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확인을 할 수가 없는 정자는 늘 안타까움만 더한다

경제청은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조 철종 때인 1854년에 지어진 경채정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경체정이라는 현판이 4개나 달려있으니 어느 글이 추사 것인지 밖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경체정은 강윤(예조정랑, 승지),강완, 강한 세 형제의 덕행과 학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이 지었다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세웠으며 앞으로는 누마루를 깔고 뒤로는 방을 드렸다.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으니 외형만 보고 정자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주변에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마루 밑에 있는 외바퀴 손수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주인의 마음을 닮아

 

담 밖에서 경체정을 둘러보니 정자의 누마루 부분은 기둥을 세워 받쳤고, 방을 드린 뒤편은 흙으로 쌓았다. 그 한편에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을 놓은 듯 하다. 기둥이 선 뒤편에는 무엇에 사용을 한 것인지 외바퀴 수레가 놓여있다. 정자 주위를 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 마감을 한 담장, 앞쪽에 낸 작은 일각문, 그리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경체정. 주변과 잘 어우러지며 서 있는 정자는, 그저 선비 같은 모습으로 말이 없다.

 

정자를 볼 때마다 그 정자를 닮아가는 마음이 없다면, 정자가 그저 단순한 전각 하나로만 보일 텐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만난 경체정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을 것 같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7) - 봉돈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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