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사람을 볼 때마다 부끄럽다. 세상을 살면서 나름 열심히 산다고 생각을 하지만, 유독 이 아우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일 년 동안 이 사람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이 생각난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일 년 동안 하는 일을 좀 짚고 넘어가보자. 정월이 되면 쌀 몇 말을 떡을 뽑아 일일이 봉지에 담아 이웃의 홀몸어르신들께 나누어 준다. 정월에 떡국이라도 끓여먹으라는 것이다. 정월 대보름 전에는 온갖 나물에 오곡밥을 지어, 일일이 도시락 통에 담아 찾아오는 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린다.

 

 

초복이 되면 이 집은 식당이 된다. 삼계탕을 200그릇이나 준비를 한다. 그 준비하는 과정만 해도 만만찮다. 하루 전날부터 끓여대기 시작한다. 초복에는 집안이 온통 여기저기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삼계탕을 드신다. 거기다가 중복에는 육개장을 맛있게 끓여 대접을 한다. 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끓이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700~1000포기를 해 이웃 어르신들께 일일이 배달을 한다.

 

그렇게 일 년이면 철마다 이웃 어르신들을 공경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은 날을 잡아 경로잔치를 베푼다. 경로잔치를 할 때면 고기며 과일, 떡에 음료수, 술까지 내어놓는다. 이 날만 해도 300분 정도가 경로잔치에 와서 즐기고는 한다. 어느 단체가 하는 일이 아니다. 개인이 일 년 동안 하는 일이다. 돈으로 환산해고 아마 수천 만 원은 될 것이다.

 

 

대보름에 맛있게 드시라고 준비 했어요

 

13일 오전, 취재를 나가 있는데 전화가 왔다. 도와달라는 전화다. 그러고 보니 이 날이면 이 집은 상당히 분주해진다. 대보름에 홀몸어르신들이나 마을에 어르신들이 드실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거주하는 고성주(, 60). 집에 들어서자 음식냄새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다. 몇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편에선 오곡밥을 시루에 쪄내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또 한편에서 도시락에 나물이며 오곡밥, 식혜와 햇김치, 물김치 등을 담아 포장을 한다. 어르신들이 찾아와 봉지 하나씩을 들고 가신다. 그 안에 나물이며 오곡밥 등이 들어있다. 오늘 준비한 것만 해도 100여 분의 어르신들이 가져가신다고 한다. 이웃까지 합하면 족히 300인분은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대보름에는 원래 묵은 김치를 먹는 것이 아녜요. 그래서 햇김치를 새로 담갔어요.”

사람들과 열심히 용기에 이것저것 담고 있던 고성주씨가 하는 말이다. 일일이 손을 가야 하는 나물만 해도 10여 가지가 넘는다. 취나물, 콩나물, 호박나물. 시레기, 가지나물, 도라지, 시금치, 거기다가 김에 나박김치, 햇김치, 식혜를 정성스럽게 용기에 담아 포장을 한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이런 일 하나요?”

 

이렇게 철마다 남에게 베풀고 있는 햇수가 자그마치 30년이라고 한다. 그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웃에 대접을 하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밖에는 안돼요. 남들처럼 많은 돈을 기부를 할 수도 없고요. 이렇게 철마다 정성을 들여 음식으로 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리고는 하는 것이, 모두 저희 자식들을 위하는 길이거든요.”

 

 

고성주씨는 흔히 시회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박수라고 하는 무속인이다. 이렇게 철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다 자신을 찾아오는 수양부리(단골들은 신도라는 말 보다는 수양부리라고 하여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는다. 물론 신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들이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봉사를 하면서도 한 번도 자기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남들 같았으면 벌써 자랑을 해도 골백번은 했을 일이다.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베푸는 일인데,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소문을 낼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이렇게 베풀면 우리 수양자식들이 다 잘되니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연신 손은 쉬지를 않는다. 곧 점심시간이 되면 어르신들이 몰려올 것이라면서 바쁘게 재촉을 한다. 고성주씨 앞에서 내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자체들, 혹은 언론사, 혹은 국가가 수여하는 상중에 봉사대상이라는 상이 있다. 그런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나름대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는 수상을 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검증을 거쳐서 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는 봉사자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오히려 그 분들 중에서 봉사대상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내 속 좁은 생각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매년 천만 원에서 억이 넘는 막대한 돈을 슬그머니 갖다 놓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라는 사람도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해마다 자신이 많은 돈을 들여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알지 못해야

 

진정한 봉사는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을 보면 별로 크지 않은(적어도 그 사람의 자산을 보면 큰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것을 내놓고 있는 대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세상은 자꾸만 각박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개미 눈곱만큼 내놓고도 엄청 선심을 쓰는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 참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남들은 이 사람을 그저 마음 착한 동네 이웃정도로 생각한다. 늘상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그랬다. 한 두 해가 아니다. 자그마치 30년이 넘는 세월을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저 혼자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도 30년 넘게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을 두고 보았다. 정월에는 떡국을 끓여 동네 어르신들에게 대접을 한다. 초복이 되면 삼계탕을 맛있게 끓여 온 동네 어르신들을 초청해 대접을 한다. 그 삼계탕에 200그릇이 넘는다. 삼계탕 집을 해도 이 정도 그릇을 채우려면 버겁다. 하지만 삼계탕만이 아니다. 음료수에 떡과 과일까지 곁들인다. 이렇게 봉사를 할 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나와 봉사를 돕고는 한다. 그만큼 주변에서 인심을 잃지 않은 탓이다.

 

중복에는 육개장을 끓여 어르신들을 대접한다. 미처 먹지 못한 어르신들은 나중에라도 드실 수 있도록 그릇에 담아 갖다드린다. 가을이 되면 이 집은 김치공장을 방불케 한다. 웬만한 주민센터보다 김장을 더 많이 담는다. 그리고 그 김장을 한 것을 홀몸어르신들이 사는 집에 배달까지 해준다. 자그마치 700포기에서 1,000포기의 배추로 김장을 한다. 이렇게 30년 세월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이런 봉사를 지자체에서도 알지 못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년 경로잔치로 어르신들 위문해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창룡문로 56번길 18)에 거주하고 있는 고성주씨(, 60). 이 집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성주씨의 하는 일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무속인이다. 하지만 고성주씨는 그냥 무속인이 아니다. 춤은 물론, 소리까지 곁들인 당대의 재인이다. 그런 고성주씨의 한 해는 그야말로 봉사로 시작해, 봉사로 일 년을 마감한다.

 

매년 한 차례씩 이집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경로잔치를 하기 때문이다. 떡과 과일, 고기, , 전 상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차려놓는다. 그리고 소리꾼들이 모여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모여 춤으로 흥을 돋운다. 어르신들도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춘다. 근동 어르신들은 고성주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민센터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들어 온 쌀은 재포장을 해 이웃에 나누어준다. 오직하면 정미기계를 집에 마련해 두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동짓날이 되면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낸다. 엄청난 양이다. 이날도 어르신들이 모여 팥죽을 드시고 한 통씩 싸들고 가신다.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하는 봉사치고는 엄청난 경비를 사용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30년 이상을 계속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봉사왕은 바로 이 사람이다.

 

고성주씨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로당과 불우한 사람들이 있는 곳을 즐겨 찾아다닌다. 그곳에 가서 춤도 추고 소리도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수원 연화장에 왔을 때, 고성주씨는 그곳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신칼대신무 춤을 추기도 했다. 누구도 선뜻 나서 춤을 추려고 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만큼 어디나 무엇이나 봉사로 따진다면 그를 따를 자가 없다.

 

그런데 세상은 참 이상하다. 남들에게 그렇게 많이 주는 상. 별로 봉사를 하지도 않은 듯한데 한 사람이 몇 장씩 갖고 있는 그 상장 하나가 없다. 한 마디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가서 침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봉사라고 한다.

 

상을 받기 위해서라면 소문이라도 내었을 것을. 30년 이상의 세월을 핸 해도 거르지 않고 절기에 맞추어 봉사를 하는 고성주씨. 진정한 봉사왕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본인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흔한 상 한 장 마련함이 옳지 않겠는가?(신칼대신무 사진은 뉴시스에서 인용)

 

SBS 현장21 ‘짜장 스님과 맥가이버 목사

 

24일 오후 855. SBS 8시 뉴스가 끝나고 난 뒤 현장21’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이 되었다. 성탄절 특집으로 방송이 된 이 프로그램은 스님짜장을 들고 전국을 돌면서 봉사를 하는 수원출신 스님인 운천스님(남원 선원사 주지스님)과 봉사를 하는 목사님들, 봉사를 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이 소개가 되었다.

 

운천스님은 법명보다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직접 외로운 사람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짜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이 만든 짜장의 그릇 수만 해도 260회에 12만 그릇이 넘을 정도이다.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짜장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수원도 20여 차례나 봉사해

 

운천스님은 지난해부터 수원을 찾아와 봉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더 많이 오고 싶지만, 오히려 더 조심스럽다고 한다. 그동안 이목동 바다의 별을 시작으로 서호노인복지관, 우만사회종합복지관, 율천동, 지동 등 많은 곳에서 봉사를 했다. 지난해에는 짜자옹사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수술을 하고 병원신세를 지기도.

 

운천스님이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태안기름유출사고 때문이다. 그곳에 가서 짜장 천 그릇을 봉사하고 온 처사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짜장을 들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 더구나 사찰음식으로 만든 스님짜장은 일체의 설탕이나 기름, 소금 등 화학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10여 가지의 직접 유기농으로 지은 야채를 이용해 만드는 스님짜장은 담백하다. 사람들은 그런 스님짜장이 먹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지 차를 몰고 달려간다. 스님의 차에는 항상 짜장면을 만들 재료가 쌓여있다. 언제 어디서나 스님짜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곧 바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돼지감자로 차를 만들어 경비를 조달해

 

운천스님이 봉사를 하는 스님짜장을 만드는 경비만 해도 엄청나다. 야채가 많이 들어가는 스님짜장의 원가는 1,300원 정도라고 한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밀가루와 비용 등을 후원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봉사를 한 스님짜장의 원가만 해도 16천만 원이 넘는 큰돈이다.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운천스님은 11월이 되면 지리산 야생감자를 캐기 시작한다. 날이 추워 땅이 얼어가고 있을 때 지리산 주변을 다니면서 돼지감자를 채취해, 그것으로 국우차라는 차를 만드는 것. 국우차는 부인병과 당뇨, 성인병 등에 좋다고 한다. 한 봉지에 2만원씩을 받고 팔아서 스님짜장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스님의 하는 일을 듣고 주문을 한다는 것.

 

네팔에 선원사초등학교도 지어

 

내형제 내 부모님에게 하듯 남한테도 그런 마음으로 살면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이 있고 사는 재미라고나 할까요.”라는 운천스님. 스님은 구미 불산사고 때도 가장 먼저 구미로 달려갔다. 사고를 당한 마을 사람들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가 스님짜장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런 운천스님이 이번에는 네팔 스리칼리마이에 선원사초등학교를 짓는다. 이달 30일에 네파로 가서 선원사초등학교 완공식이 참석을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워갈 수 있도록 선원사 스님의 보시금과 신군, 송진구씨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네팔 땅에도 우리말을 베우는 어린이들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저 많은 봉사를 할 것만 같은 짜장스님. 내일은 또 어디로 봉사를 하러 가시려나? 마치 봉사를 하기 위해 스님이 된 듯한 운천스님을 TV화면으로 만나면서 더 반갑다는 생각이 든다.(사진은 TV화면을 촬영한 것입니다)

 

올해는 1222, 2012년에는 1221일이 절기로 동지(冬至)’이다. 일반적으로 동지는 대설이 지난 후 15일째 되는 날이다. 동지에는 동지추위라는 것이 몰려온다고 한다. 아마도 이 추위가 겨울 중 가장 추운 추위일 것이다. 동지란 말 그대로 하면 겨울에 이른다는 것이다.

 

동지에는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동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가 하루에 1분 정도씩 길어진다고 한다. 옛 풍습에는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지금도 우리의 속설에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 추석과 동지를 4대 명절로 부르기도 한다.

 

 

농한기인 동지, 그러나 농촌은 더욱 바빠져

 

사람들은 흔히 동지가 되면 농촌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동지 때가 되면 들로 일을 하러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그보다 몇 배가 더 많은 일을 집안에서 해야만 한다.

 

우선 동지 때 아녀자들은 겨울 찬거리를 준비한다. 김장은 이미 해 놓았다고 해도, 이것저것 밑반찬 거리를 만든다. 채소 등을 자르고 말려, 일 년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남자들이라고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다. 밭으로 나가 보리를 밟기도 하고, 내년에 사용할 새끼 꼬기도 해야만 한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 동지를 전후 해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동지팥죽은 왜 시작이 되었을까?

 

동지에 팥죽을 먹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설화에서 기인한다. 신라 때 어느 가난한 선비의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그 나그네는 선비에게 부자가 되는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선비는 나그네의 말대로 따라했더니, 정말 가세가 부흥이 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돈은 많아졌으나 선비는 날마다 말라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던 스님이 선비에게 이르기를 그 나그네는 도깨비이다. 도깨비를 퇴치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다.’고 하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말을 잡아 그 붉은 피를 사방에 뿌리라는 것. 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선비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사방에 뿌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설화 속의 팥죽의 유래이다.

 

이와는 달리 6세기경 중국 양나라의 종름이 쓴 연중 세시기인 형초세시기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하고 있다. 공공씨의 아들이 죽어 역질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붉은 팥을 무서워 해 팥죽을 쑤어 역질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짓날이 되면 집집마다 팥죽을 쑨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린 다음 집안의 대문, 장독대, 측간, 부엌, 뒤뜰, 마구간 등에 한 그릇씩 갖다 놓는다. 그런 다음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석구석에 골고루 뿌린다. 이는 물론 잡귀들이 붉은 색을 싫어해서이다. 즉 붉은 팥으로 쑨 팥죽을 여기저기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는다는 것이다.

 

 

팥죽을 왜 이렇게 많이 쑤었지?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사는 고성주끼(남, 60세) 동지때마다 이웃과 함께 팥죽을 나누는 고성주씨는 팥죽을 몇 솥을 쑨다. 팥만 해도 가장 상품으로 세말이나 불렸다. 거기다가 새알이라는 찹쌀도 한 말이나 만들었다. 전날부터 사람들이 찹쌀로 새알을 만들고 팥죽을 쑬 준비를 한다. 그리고 동지 새벽부터 몇 개의 솥에 팥죽을 쑨다. 웬만한 사찰보다 양이 더 많다.

 

고성주씨가 이렇게 팥죽을 많이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평소 이웃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고성주씨는 팥죽도 이웃에 사시는 홀몸어르신들에게 나누어드린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팥죽 한 그릇 해 드시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팥죽이 다 끓으면 용기에 담아 이웃에 나누어주고는 한다. 주민의 이야기에서 평소 고성주씨의 됨됨이를 알 수가 있다.

 

그 분은 언제나 찾아가 도와달라고 해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 분이 마을에 함께 산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죠. 동지 날에도 수십 집의 어르신들께 팥죽을 나누어 드렸다고 합니다.”

 

봉사를 않으면 인생이 무의미 하다는 이미경씨

 

제 인생의 활력소는 봉사입니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세상을 올바로 사는 것이 아니죠. 봉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19일 오전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토금이라는 식당에서 자리를 함께 한 이미경(48. 수원시 필달구 진우아파트 1204)씨의 말이다. 봉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뜨끔하다. 순간 나는 봉사를 제대로 해보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미경씨는 정말 살아가는 자체가 봉사입니다. 저분이 봉사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요. 봉사를 하면서도 남들도 재미나게 만들어주는 이미경씨야 말로 봉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분이죠

 

이미경씨를 잘 안다는 지인 한 분이 하는 이야기이다. 봉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미경씨에게 듣는 봉사이야기, 듣다가보면 절로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결혼하면서 시작한 봉사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이 고향인 이미경씨는, 결혼을 하면서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수원시 팔달구 지동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왔다.

 

결혼을 하고 처음에는 지동에 집을 지어서 이사를 했어요. 그리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지동이라는 곳이 참 사람들이 정이 많고 좋은 곳이죠. 그리고 봉사를 하면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지동을 떠날 수가 없죠. 살아보면 이런 동네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봉사를 시작한지 25년이나 되었다고 하는 이미경씨. 그녀의 말대로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흡사 봉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이미경씨는 많은 활동을 한다. 꼭 자신이 가입되어있지 않은 봉사단체라고 해도 스스로 찾아가 일을 한다고.

 

 

지금은 지동 자치위원회(위원장 표영섭)와 행복 캄, 그리고 25명의 회원이 봉사를 하는 지야봉사회에서 함께 봉사를 하고 있어요. ‘행복 · 은 순수 민간봉사단체예요. 행복 캄은 캄보디아에 있는 수원마을 지원사업을 계속하여 펼치고 있고, 인도적 지원을 넘어서 사회, 경제, 환경, 문화, 교육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것을 회원들이 공동으로 해결하고 있어요

 

이미경씨가 회원으로 활동을 하는 행복 · 캄은 순수봉사단체 중 가장 값진 국제봉사를 하는 단체이다. 과거 우리가 도움을 받던 나라를 도와준다는 자긍심을 갖고 봉사를 하고 있다는 행복 · 캄의 일원으로 벌써 세 반이나 캄보디아를 다녀왔다고 한다.

 

벌써 세 번이나 다녀왔어요. 그곳에 가서 청소도 하고 빨래, 페인트 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불고기와 상추 등을 준비해 주민들에게 대접했더니 정말 좋아들 하세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봉사란 나도 기쁘지만 남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죠.”

 

 

봉사란 스스로가 더 행복해 지는 것

 

지야봉사회는 25명의 회원이 있어요. 201415일에도 회원들이 각자 쌀을 마련해 20kg 짜리 100포 정도를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해요. 25년간이나 봉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봉사를 하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봉사를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한다. 이미경씨를 처음으로 본 것은 2012년 지동 일일찻집에서였다. 그리고 올 해 125일 지동의 한 예식장을 빌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일일찻집에서 두 번째로 보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행사장을 누비면서 봉사를 하는 그녀를 주민 한 사람은 지동의 분위기 메이커이다. 이미경씨가 빠진 행사는 재미가 없다고 평을 할 정도이다.

 

저는 봉사를 하면서 남에게 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아요. 우선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고요. 남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올해는 예전에 비해 봉사를 줄였는데도, 그 많은 분들이 기억을 하고 찾아주세요. 그것 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행복이란 봉사에서 비롯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이미경씨. 내년에는 더 많은 봉사를 해야겠다고 한다. 인생의 활력소가 바로 봉사라고 말하는 이미경씨. 2014년에는 더 많은 봉사를 해야겠다는 그녀와 마주하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