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경남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제를 지내기 위해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세운 사당이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찾아간 충렬사.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들어가면서부터 행복을 느낀 곳이다.

 

우선 충렬사의 입구를 들어서면 정당으로 올라가는 우측에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보인다. 이 동백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로,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일 년 간의 어업의 안녕을 위해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강한루에서 아픔을 느끼다

 

정당으로 오르는 길에 이층 누각 한 채가 서 있다. 앞에서 보면 ‘강한루’요, 뒤로 올라가면 ‘영모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강위는 강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이곳의 풍광을 읊었다.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어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쫙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 구나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아련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강한루 누마루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 계단을 지나야 정당으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계단으로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강한루의 지붕에 기와들이 많이 흐트러져 있다. 아마도 이 일대를 강하게 휩쓸고 간 태풍 때, 저리 기와가 제 자리에서 벗어났는가 보다. 그 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렇게 볼썽사납게 놓아둔 것인지.

 

적어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데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문화재의 보수는 절차를 거쳐서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왓장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어찌 정리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파온다.

 

장군께 향을 올리다

 

강한루를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서 좌우측을 보면 충렬묘비명을 비롯한 몇 기의 비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 사적비, 충무공 이후로 덕수 이씨 후손들 중에서 12명의 통제사가 있었는데, 그 중 121대 통제사 이태상, 138대 이한창, 143대 이한풍, 167대 이항권, 172대 통제사인 이승권 등 5명의 공적비 등이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 위에 내삼문이 서 있다. 내삼문에는 문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 활주는 육각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는데, 그 밑에 해태상을 조각해 놓아 특별하다. 통용문인 양편에 협문을 낮게 만든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 또한 선조들의 마음자세를 배워야 할 듯.

 

 

 

정당은 충렬사이다. 이춤무공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으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지어져, 300년이란 긴 시간동안 역대 통제사들이 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정당의 지붕 용마루에는, 주역의 팔괘를 기와로 그려내었다. 아마도 이런 충렬사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큰지도 모르겠다.

 

 

 

사당 앞에 향이 놓여있다. 장군께 향을 올린다. 뒤에서는 해설사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올 때 본 강한루의 망가진 지붕이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이제는 말끔히 수리가 되었길 속으로 빌어본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에 소재한 봉녕사. 봉녕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가람의 으뜸이라 칭한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성창사라 하였다. 1400년경에는 봉덕사로 개칭하여 오다가,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 혜각국사가 중창하고 사명을 봉녕사라 하였다.

 

혜각국사는 수원 광교산 일대에서 오래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광교산 중턱에 있었던 창성사에서도 혜각국사의 흔적이 발견이 된 것을 보면, 광교산 일대에 99개의 사암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허튼 소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각국사는 세조로부터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으며, 간경도감의 경전언해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져

 

그 이후 봉녕사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971년 비구니인 묘전스님이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봉녕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묘전스님은 봉녕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에는 비구니 묘엄스님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설립한다. 1979년에는 묘엄스님이 주지와 학장을 겸직하고, 1983년에는 승가대학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에는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처음으로 금강율원을 개원하였다.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사찰인 봉녕사에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 삼존불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신중탱화와 현왕탱화가 모셔져 있다.

 

 

 

 

지난 10월 5일, 사찰음식문화대향연을 취재차 찾아간 봉녕사. 대적광전 앞으로 올라가 참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조와 어우러진 꽃들, 연화세계가 여기든가?

 

대적광전과 수령 800년이 지난 향나무의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런데 여기저기 놓인 석조마다 가득 꽃을 품고 있다. 그만 그 꽃구경에 취해버렸다. 정작 사찰음식대향연은 뒷전으로 미루고, 꽃에 반해버리다니. 아마도 누구보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석조와 어울리는 꽃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취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정작 취재를 할 것보다 더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한다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땀을 흘리며 꽃을 찍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나도 그 꽃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꽃과 바람, 산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고 했는지. 대적광전과 향나무 인근에 꽃들을 촬영하고, 대적광전 앞으로 가 잠시 머리를 숙인다. 누군가 열심히 절을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등 뒤로 땀이 축축이 배어있다. 아마 오랜 시간 저렇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마음속에 간구하는 것이 있어 저리도 열심을 낸다면, 그 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작은 내 마음 한 자락 덜어내어 그 절을 하는 이의 마음에 보태고 싶다.

 

 

 

아마도 아직 봉녕사에는 그 석조에 담긴 꽃들이, 찾아가는 이들을 반겨줄 것만 같다. 서리가 오기 전에는 시들지 않을 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멀지 않은 길이라면 봉녕사를 찾아 꽃들과 대화를 해보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사물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하신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그것이 바로 법문이었다는 것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440-7에는 수령 380년의 거목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벌써 십여 년 전에 정월 열 나흩 날 이곳을 찾아갔을 때, 누군가 나무에 대고 정성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수고 20m에 밑동의 둘레가 3.3m인 이 느티나무에는 그럴 듯한 전설도 있다고 한다.

 

이런 고목은 흔히 누군가에 의해서 심어지거나, 고승의 지팡이 등이 변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옛날에 광교산 인근에는 89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이 89개의 절을 다 돌아보기 위해 이곳에 신발을 벗어놓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비가 많이 내려 신발이 다 썩어 느티나무 뿌리가 내렸다.

 

수령 380년의 보호수인 느티나무

 

뿌리에서 생겨난 느티나무는 점점 크게 자라 어른의 팔로 몇 아름이 되었다. 이 느티나무를 팔려고 나무를 베려고 했는데, 베는 도중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전설은 그렇게 한 나무를 ‘영험한’ 나무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먼저 취하다

 

뜬금없이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30도를 훌쩍 넘긴 복중 오후에(7월 29일) 길을 나섰다. 원 목적은 옛 절터인 창성사지를 찾아볼 심산이었으나, 느티나무와 그 앞에 펼쳐진 왕복 3km 정도의 이팝나무 길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창성사지가 어디로 도망을 갈 것도 아니니, 이곳부터 걷자고 동행한 김홍범 기자(경기리포트 사회부 차장)에게 제안을 했다.

 

왕복 3lm의 광교 이팝나무 길, 꽃들이 지고 있다

 

느티나무를 찾아 광교산 입구서부터 걸어 올라가다가 보니, 웬 신선들이 한가롭게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고 있다. 사진 한 장을 찍고 눈을 돌리니,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철문과 소나무, 그리고 구름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리고 그 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정경.

 

수원의 광교산을 오르는 길에 누군가 벼농사를 지었다. 지금이야 유명한 등산로가 많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지만, 원래 광교산 인근에는 농사를 짓는 토착민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다. 도심에서 볼 수 있는 논과 그 뒤에 집 한 채. 참 아름답다.

 

 

이팝나무 길을 걷다.

 

흰 꽃이 나무를 덮을 때 마치 흰쌀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밥나무’가 변해서 ‘이팝나무’라고 한단다. 남쪽지방에서는 정원수나 풍치수로 심는데 목재는 건축·가구재로 쓰고, 목부에서 염료를 추출한다. 식물 전체를 지사제나 건위제로 사용하며, 꽃은 중풍치료에 쓰이기도 한다. 키는 20m에 이르며, 가지의 색은 회갈색이다.

 

이 이팝나무가 하광교 느티나무에서 상광교로 오르는 길목 1.5km 정도의 도로 양편에 서 있다. 나무의 굵기로 보아 수령이 15년 정도는 지난 듯하다. 이 이팝나무는 도로 정비를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들이 요즈음 한창 꽃을 떨구고 있다. 도로 양편 인도와 차도까지 온통 이팝나무의 꽃이 떨어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아이들과 함께 왕복을 해도 좋을 거리인 왕복 3km 정도. 이런 아름다운 거리를 왜 사람들은 그저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는 것일까?

 

앞서가는 김기자의 등에 땀으로 흠씬 젖었다. 이 더운 여름 날 ‘길’ 취재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많이 힘든 것 같다. 누가 이 더위에 아름다운 길을 찾겠다고 이렇게 땀을 흘릴 수가 있을까? 길 건너편으로는 산행을 마친 몇 사람이 한가롭게 걷는다. 저들은 이 길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걸을 것이다.

 

도심에서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그 아름다운 길 끝에 불쾌한 마음이

 

느티나무에서 시작하여 다시 느티나무로 돌아왔다. 한 편은 인도가 되어있어 괜찮지만, 건너편은 좁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불안해 보인다. 안전 펜스라도 쳐주면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길인데, 그런 점이 조금은 아쉽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느티나무 주변 의자에 앉아 쉬려고 다가섰더니 주변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참 이런 모습에 어이가 없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야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바닥에 꽁초를 버려야만 했을까? 자칫 물이라도 꺼지지 않은 꽁초로 인해 느티나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텐데. 금연표지판이라도 붙여 놓아야 할 듯하다.

 

 

아름다운 이팝나무길에 꽃비가(위) 이팝나무 길을 담이 흥건히 젖어 걷고있는 김홍범 기자(좌)와 등산객들

 

아름다운 길. 어젠가는 이 느티나무에서 시작해 돌아오는 왕복 3km의 이팝나무 가로수 길이 또 다른 명소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길에 안내 표지만 하나가 있었으면. 이 글은 언제 이팝나무를 심었고, 어떤 이유로 심었는지. 그런 것 하나가 아쉽다.

 

 

길 끝에서 만난 불쾌함. 의자 주변으로 담배꽁초가 널려있다.

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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