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이 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에 소재한 ‘엄찬 고택’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알려진 집이다. 원래 이 집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문간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중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광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의 집을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와 사랑마루

 

넓은 마루가 시원한 사랑채

 

밖에서 본 엄찬 고택은 한 마디로 멋진 집이다. 녹음이 우거진 짙은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담장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현재 엄찬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된 중문을 사이로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칸은 넓은 툇마루를 놓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사랑마루에서 벗들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햇다면, 세상 모든 정취가 시 한수로 대신했을 것만 같다. 이 집을 지었다는 성삼문의 외손 엄찬도, 예전에는 이 사랑마루에서 앞의 경치를 바라보며 글을 읽고는 했을 것이다. 중간에 한 칸은 좁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어진 부분은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이다.

 

밖에서 본 행랑채

 

마구간도 있었을 줄행랑

 

중문 밖으로는 한 칸의 행랑방과 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 광은 집의 구조로 보아 마구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자형의 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광채는 행랑방을 합하여 모두 여덟 칸으로 마련이 되었는데, 그 중 좌측 세 칸은 문을 달아 놓았다.

 

ㄷ 자형의 안채는 겹 마루를 놓아

 

전체적으로 대지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엄찬 고택은, 남쪽으로 중문을 두고 동쪽으로 본채를 두었는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우진각으로 꾸몄다. 이 엄찬 고택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마루다. 모두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대청은 겹 마루를 놓았다. 중간에 기둥을 두고, 그 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형태이다.

 

 

안채의 마루는 기둥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겹마루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렸는데,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다락, 그리고 연이어 방을 세 개를 놓았다. 안방과 윗방으로 구분이 되는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안채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엌이다. 이 부엌은 중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이단으로 되어 있다. 즉 경사가 진 대지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보니, 아궁이가 깊어서 아래쪽은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로 하고, 그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이중으로 난 아궁이. 비탈이 진 비형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의 아궁이를 층이지게 조성하였다. 위는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그림 같은 고택의 아름다움, 보존에 신경 써야

 

성삼문의 외손집이라고 해서 그 집이 잘 보존이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엄찬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엄찬 고택을 찾았을 때 집이 퇴락해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잡풀이 그득하고 주변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을 밑에서 바라보는 엄찬 고택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랑채 앞에 자리를 하고 있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두 여덟 칸으로 되어있는 광채는 한 눈에 보아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집은 여기저기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보인다.

 

 

 

1670년대에 지어졌다는 엄찬 고택. 그저 성삼문의 외손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장황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을 했으면, 잘 보존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 앉아 불볕 햇볕을 피해본다. 예전에는 꽤나 행세를 했을법한 집안인데, 손길 사라진 집에서 느끼는 한기가 불볕더위마저 서늘하게 만든다.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1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 팽성 객사는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객사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어가는 곳이며,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에 중대청을 놓고, 양편으로 동, 서헌을 둔다.

팽성객사는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주택으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해체, 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문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광 등을 드렸으며, 동편을 꺾어 ㄱ 자형으로 마련하였다.



관리청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팽성객사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 양 옆에 동, 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객사 본 건물의 중앙에 마련한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절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진다. 중대청의 지붕은 양 옆에 마련한 동, 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 서헌은 각각 중대청과 가까이에 한 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이 동 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팽성객사의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조 현종 때 크게 중창을 하였고, 영조 36년인 1760년과, 순조 1년인 1801년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한다.

문은 잠가놓고, 쓰레기는 쌓이고

2월 12일 오후 팽성객사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팽성객사를 방문한 것은 2007년 10월 21일이었다. 그 때도 문은 굳게 잠겨있고, 관리사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객사의 대문은 잠을 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그리고 관리인이 묵는 관리동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잠겨 있다.



화장실 앞에는 지저분하게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담장 밑에도 담배꽁초와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동까지 지어놓고 정작 관리는 하지 않는 문화재. 관리동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이 건물은 벽도 떨어져 나가 흉물로 변하고 있다.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가만 두면 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주객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누구나 들어가 동, 서헌 마루에 앉아 쉴 수가 있다.





문화재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인식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무조건 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고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 관리사를 짓고 사용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대체 왜 혈세를 낭비하면서 문화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당 지자체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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