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가한 포구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수군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때는 충청도 수군의 총 사령부가 있었다는 곳. 충청수영성은 경관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천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청수영성. 벌써 몇 번째 찾아온 충청수영성.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501호인 보령 충청수영성을 찾은 것은 106일이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인 1896년에 폐영이 되었다. 충청수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몰 즈음에 만난 오천항의 장관

 

10월의 해는 짧다. 더구나 잔뜩 흐린날이라 그런지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어둑하다. 차를 달려 찾아간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성. 지금은 아치로 조성한 서문의 석문과 진휼청만이 남아있다. 서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바닷가로 삐죽 얼굴을 내민 성벽 위에 진휼청이 서 있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진휼청은 충청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을 하고 있다. 진휼청은 정면 5, 측면 2칸의 집이다. 진휼청은 그리 크지 않은 집으로 대청과 부엌, 온돌방, 툇마루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진휼청을 돌아본 후 성벽 위에 올라서 오천항을 내려다본다. 저 오천항에 수많은 어선들이 묶여있는 곳에, 예전에는 모두 군선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충청수영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방지했다고 한다.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충청수영성. 해질녘 내려다보는 오천항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하기만 하다.

 

충청지역 해로의 요충지 충청수영성

 

선조 29년인 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인 15977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충청수영은 서해안을 지켜내는 요충지였지만, 많은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성내의 정자인 영보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전한다. 서문 밖의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다.

 

해가 설핏하다. 서둘러 성벽 위를 걸어 한 바퀴 돌아본다. 근래 들어 도로개설이나 해변의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872년에 그려진 충청수영성의 고지도에 보면 세 곳의 성문을 비롯해. 한 곳의 서소문과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현재는 객사와 내삼문이 남아있지만, 한때는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인 충청수영성은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성지이다. 귀중한 유적인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 잔뜩 검게 낀 구름으로 인해 서해로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1,10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 한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에 소재한 국보 제8호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신라시대인 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비를 만난 것은 106일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무열왕의 8세손이다.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태어나,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인 845년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중요한 신라역사를 알 수 있는 탑비

 

무염이 이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무염이 진성여왕 2년인 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려주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 몸돌에 새겨진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를 세운지 벌써 1,123년이나 되었다.

 

 

이 비에 적힌 기록을 보면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이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비는 성주사 절터 서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다양한 문양과 힘 있게 조성한 탑비

 

6, 12일의 보령시로 답사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성주사지이다.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성주사지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로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 탑비이다.

 

 

벌써 몇 번째 찾아 본 낭혜화상 탑비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그만큼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탑비는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다. 받침돌인 귀부는 머리의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귀두 부분이 깨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백미

 

귀부의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인 문양을 새기고, 중앙에는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는데, 안상을 파고 그 안에 꽃을 새여 넣었다. 귀부 위에 올린 비몸은 앞면에는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인 이수는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문화재답사는 문화재와 함께 호흡을 하고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어 찾아가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낭혜화상 탑비.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로 조성한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백미로 꼽힌다. 모처럼 찾아가 만난 그 탑비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진지를 말한다. 흙이나 돌로 쌓아 적과의 교전시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구조물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성곽이 있다.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 소재한 보령성곽은 평지에 구축한 상으로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성곽 일부만 남은 보령성

 

보령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 기존에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은 성이다. 원래 이 성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봉당성(고남산성)의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쌓았다. 현재 이 보령성은 남문인 해산루와, 해산루에 붙은 성벽 70m, 그리고 북쪽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남문터에 남아 있는 보령성을 보면, 평지에 성을 축성한 관계로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 남문 부근을 제외한 남은 부분은 바깥 부분만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30m에 성곽의 높이는 3.5m 정도라고 한다. 처음 이 성을 지었을 때는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대가 8개소, 남문과 북문, 동문 등 문루가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432년에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제민당, 공아, 병기고 등 140여 칸의 간물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우물이 3개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들의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지면서 모두가 다 소실되고, 현재는 남문인 해산루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 구간의 성벽과 성벽을 타오르는 담장이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해산루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보령성의 남문인 해산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해산루는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편을 성곽에 걸쳐 조성하였다. 예전에는 이 성곽 양편에 걸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자취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해산루는 당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같은 형식으로 조성한 관아문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누각은 상벽 위에 마련한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누각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이 곳에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략을 짰을 것이다. 남문 누각 정면에 걸려 있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역사의 흔적엔 초여름의 뙤약볕만 남아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린다. 성벽에는 담장이 넝쿨이 타고 올라가 고풍스런 멋을 보인다. 남문 뒤편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점심시간이라도 되는가 보다. 천천히 길지 않게 남은 성곽을 둘러보고 해산루에 올라본다. 그저 흔히 보아오던 누각이지만 이곳의 정취가 남다르다. 앞으로 펼쳐진 시골 작은 마을의 가지런히 뻗은 길에는 차 한 대가 보이질 않는다.

 

보령현은 고려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효종 3년인 1652년에는 보령부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하였고, 세종 14년인 1432년에는 현감 정대가 140여 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의정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 편액의 글씨(위)

 

처음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이 되었다는 성곽이다. 임진왜란과 의병들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이 되었다는 관아와 성곽. 그저 역사가 어떠한 형태로 뒤바뀌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해산루 인근을 보면 담장이가 타고 올라간 모습만 모아도 이 성의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뙤약볕으로 인해 흐르는 땀을 해산루에 올라 추슬러본다.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마져도 존재할 수가 있으려나. 괜한 걱정을 하며 또 다른 길을 걷는다.

 

 

오랜 세월에 흐릿환 흔적의 편액과 해산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가한 모습의 보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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