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나갈 때는 사전에 동선부터 정해놓는다. 그것은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동선을 정해놓지 않으면 가까운 거리에 문화재를 놓고도, 멀리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전에 촬영을 할 문화재를 정해놓지만, 가끔은 지나는 길에 생각지고 않은 문화재를 만나는 수도 있다.

 

충남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16-6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2보령수부리귀부 및 이수(保寧水芙里龜趺螭首)’가 바로 문화재 답사 자료에는 없었던 문화재이다. 보령시 웅천읍에 있는 독살을 촬영하러 가는 길에 만났으니, 이럴 때는 꼭 많은 돈을 얻어 횡재라도 한 듯 기분이 좋다.

 

독살을 만나러 가는 길

 

독살은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해안가에 소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6호이다. 보령지방은 조석간만인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예로부터 갯벌에 살을 매어 고기를 잡았는데, 돌로 성을 쌓아 만든 살을 독살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서해안에서는 갯벌에 울타리를 쳐서 고기를 잡았다. 대개의 독살은 대나무를 이용하지만, 이곳은 돌을 사용하였다.

 

 

돌을 촘촘히 쌓아 v자 형태로 만든 살을 독살이라는 하는데, 썰물 때마다 멸치, 새우, 숭어, 전어, 학꽁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을 수 있어 좋은 수입원이었다. 독산리라는 지명에서 보이 듯 웅천읍 독산리에는 많은 독살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무너져 사라지고, 두 곳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한 귀부와 이수

 

수부리의 귀부와 이수는 영수암(예전의 단원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근처의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만이 놓여 있었다. 영수암 경내로 들어가 귀부와 이수만 남은 것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몸을 만들어 끼워놓았기 때문이다.

 

 

거북받침인 귀부는 머리가 용 모양이며, 귀와 뿔을 새기고 턱 밑의 수염은 목에까지 조각하였다. 이런 형태의 귀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초의 귀부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을 새겼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던 홈 주변에는 연꽃을 둘러 장식하였다.

 

주인 없는 귀부와 이수

 

머릿돌은 용과 구름무늬로 가득 차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액자모양의 공간을 두어 다시 자 모양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글씨는 적혀 있지 않다.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귀부와 이수가 누구의 것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대개 머릿돌인 이수의 중앙에 명문을 적어놓지만, 이 이수에는 명문조차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신을 원 규격을 측정하여 몸돌을 만들어 놓았다. 사라진 몸돌인 비와 명문이 적혀있지 않은 머릿돌인 이수.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문화재. 이런 문화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 옆에는 팔각원당형 부도편이 있으나, 이 부도 역시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웅천읍 독산리 독살을 만나러 가다가 만난 귀부와 이수. 결국 예정에 없던 이 문화재를 하나를 만나서인가, 정작 보고 싶던 독살은 물이 차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문화재라고 찾아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답사 때는 물때를 미리 점검을 해야겠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만나는 많은 문화재 중, 그래도 마음이 더 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이 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이 된 나무들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나무들만 보아, 책으로 엮어도 재미있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은, 대개 한 가지의 이야기쯤은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 나무들을 만나면 그 나무들에게서 받는 기운이 있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나무들 때문이기도 하다. 보령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끝으로 만난 문화재가, 바로 귀학송이라는 소나무였다.

 

 

충남기념물 제59귀학송(歸鶴松)’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0-2, 오서산 명대계곡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도로변에 서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한산이씨 동계공파에서 소유하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귀학송, 또는 육소나무라고 부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15391609)의 이복동생인 이산광(15501624)이 낙향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귀학송의 수령은 460년을 넘었을 것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7세손인 동계공 이산광이 명대로 낙향하여 심었다는 소나무. 귀학송은 둘레 5.5m, 높이 25m 정도의 소나무이다. 한 뿌리에서 6개의 가지가 있어서 육소나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아쉽게도 한 가지가 죽어서 5가지만 남아있다.

 

이산광은 광해군의 폭정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했다. 이곳에 귀학정(歸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글을 쓰며 후진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자신이 낙향하여 심어놓은 소나무 곁에 지은 귀학정에 학들이 날아들자, 정자 이름은 귀학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귀학송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와 이산광

 

이복형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의 내력을 알면 이산광을 알 수가 있다. 아계 이산해는 중종 34년인 1539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내자시정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지번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며, 작가 겸 문장가 이산보는 그의 사촌 동생이었다.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은 아버지 이지번의 동생이다. 토정 이지함이 이산해와 이산광의 삼촌이 된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5대조 이계전이 조선 세종, 문종, 단종조를 거쳐 조선 세조 때 정난공신이 되었고, 고조부 이우는 공조참판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고조부 이우의 사촌 형제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 이개였다.

 

형제자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형제로는, 계모 충주지씨에게서 10년 터울의 이복동생 인 이산광이 있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글씨에 능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했다

 

아마도 보령은 이산해와 이산광의 은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귀학정을 짓고 후진들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이산광도, 이복형인 이산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환란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피해 이곳 명대계곡으로 낙향하였기에, 그의 여생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곳이 오기(誤記)일까?

 

문화재 답사를 나가기 전에 대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답사를 할 문화재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지역과 문화재에 대한 상식 등을 깨우쳐 간다. 그래야만 편안하게 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이 귀학송은 이산광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산광의 6대손인 이실이 심었다고 표기가 돼 있다. 6세손이면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귀학송이 수령은 500년 가까이 보인다. 그런데 왜 이산광이 아닌 이실이 심었다고 보령시 현장 안내판에는 기록을 한 것일까?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 내용을 알게 될 후손들에게 부끄럽기만 하다.

 

충남 보령시 동대동 809-1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대천한내돌다리’. 한내돌다리는 조선시대 남포, 비인, 서천지역의 사람들이 보령현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되었던 12간 돌다리이다.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의 기록에는 고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축조된, 전라도 함평의 고막천석교와 같은 비슷한 유형으로 조성되었다 전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사람들과 우마차등이 통행하였고, 일제초기까지 주 교통로로 이용했다고 한다. 규모는 폭 2.38m, 길이 50m 정도였다고 하니 적은 다리는 아니다. 다리를 조성한 석재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인근 왕대산의 돌과 같아, 채석 후에 뗏목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반 한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초까지도 20m 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되었다.

 

 

우마차 통행에 적당한 돌다리

 

대천한내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인 시렁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고 한다.

 

 

다리의 구조는 1.5~2m 정도의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놓았다. 이것으로 다리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4.5m, 70~90cm, 두께 30~40cm의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바닥을 구성하였다.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루어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된 다리이다.

 

한내돌다리를 밟아보다

 

지난 6일 찾아간 보령시 문화재 답사. ‘한내돌다리는 그동안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돌다리들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돌다리마다 갖가지 사연도 많지만, 돌다리들의 모습들이 하나 같이 독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돌다리들이 무지개모양의 아치 모형으로 구성을 하고 있는데 비해, 한내돌다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꼭 들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지만, 그것이 대수랴. 대천천 한 옆에 복원을 해 놓은 한내돌다리. 주변 정리를 해놓고 다리 밑으로는 수초가 자라났다. 물의 깊이를 보니 옆으로 흐르는 대천천과 비슷한 수위를 갖고 있어, 대천천과 연결이 된 것은 아닌지. 돌다리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 얹은 시렁돌 틈 사이로 물이 보인다. 다리 위를 걸어본다. 예전 이 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것일까? 아마도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짚신 두 켤레 덜렁거리며 한양으로 올라간 사람들. 소고삐를 잡고 불어난 물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 그런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렇게 대천한내다리에 빠져있는데,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구경도 좋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그보다 큰 낭패는 없다. 그동안 많은 카메라를 망가트리면서 다닌 문화재답사이다. 비록 몸이야 젖어도 카메라만은 젖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돌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우선은 비를 피하는 수밖에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기도 좋아야하지만, 적지 않게 들어가는 답사 경비로 인해 늘 주머니가 가벼워 지기 때문이다. 지난 6일 돌아본 보령시의 문화제를 답사할 때도, 비는 간간히 뿌렸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라도 더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남포면 읍내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남포관아문을 만났을 때는 신이 난다. 이렇게 읍성과 함께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 등을 만날 수가 있고, 거기다가 충남 기념물 제10호인 읍성까지 돌아보았으니.

 

 

한 곳에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이다. 앞에는 중층 누각인 진서루가 서 있고, 그 뒤편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헌 마당을 지나서 외동헌을 만나게 된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무리를 해서 찾아간 곳이다. 진서루 옆 은행나무에서 많은 은행들이 떨어져, 은행나무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날이 궂은 날에는 냄새가 더욱 심하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사면에 난간을 세웠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누각에서 남포현감은 주변 경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7,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 칸은 한단 올려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문은 출입문 앙 옆을 살창으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정면 7,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외삼문인 누각과 옥산아문, 동헌 등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옛 동헌답게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전국의 아문이 똑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남포관아를 돌아보고 난 뒤, 읍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성은 동헌 뒤편에 성곽이 이어진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남포읍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동쪽과 서쪽, 남쪽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남포읍성은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치성을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도 보인다. 성 안에는 세 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외동헌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가을이 열리고 있는 성벽

 

기록에 의하면 읍성 안에 우물이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남포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아문과 성안에서 읍성을 돌아보고 난 뒤, 성 밖으로 향했다. 비는 멈췄지만 바람이 세차게 분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함께 조화를 이룬 남포읍성이 한 장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성을 따라 조금 걸어본다.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은 남포읍성. 한 곳에서는 마을주민인 듯한 여인이 밭에서 무엇인가를 수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편 성벽에는 늙은 호박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 읍성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언제 떠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괜한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그 답도 내 멋대로 지만 말이다.

 

대개 절을 다니면서 보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두고, 이어서 금강문 또는 사천왕문, 마지막이 불이문 등으로 나열을 한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금당(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등)을 짓고, 금당 앞에 탑, 금당 뒤에 요사채, 강당 등이 있다. 이렇게 절의 배치를 하는 것을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이란 범어의 승가람마(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약하여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을, 람마란 원의 뜻하는 것으로, 가람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를 합해 중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찰의 대표적인 구성요소로는 문과 루, 종각, 법당, 회랑, 탑 등 다양한 축조물들이 있다.

 

가람의 배치는 어떻게 하나?

 

가람의 배치란 절의 건물 배치를 말한다. 이는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뜻하는 말로,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절이 있었다. 이 절들의 배치는 주로 일탑일금당식이나, 혹은 쌍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법을 하였다.

 

쌍탑일금당식은 일탑일금당식과 마찬가지로, 금당 앞에 동서로 불탑을 2기 세우는 배치법이다. 통일신라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절이 산 속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산지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었다. 그런 연유로 금당 앞에 쌍탑이 두거나, 일탑일금당식, 혹은 경우에 따라 탑이 없는 무탑 절도 생겨났다.

 

많은 탑을 조성한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4탑 형식의 독특한 가람배치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와 주춧돌 등으로 본 성주사지는 웅장하였다. 중문지를 지나면 석등과 그 뒤에 웅장한 오층석탑이 서 있다. 그리고 금당지가 있고, 좌우로 동남회랑지와 서남회랑지가 있다. 동남회랑지의 뒤편으로는 삼천불전지가 자리하고 있어, 성주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금당의 뒤편으로는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3기의 석탑 뒤에는 강당지가 있고, 그 한편에는 석불입상이 서 있으며, 한편에서 조금 비켜선 북서쪽에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가람의 배치는 금당 앞에 오층석탑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탑일금당식과 같은 가람의 배치이다. 금당 뒤편에 3기의 탑은 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이 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3기의 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탑으로,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딴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성주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선종 중심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9산 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은 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만을 남겨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성주사.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음은 옛 성주사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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