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는 길은 늘 바쁜 걸음이다. 하나라도 더 문화재를 만나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여주, 양평을 거쳤다. 원주에서 횡성으로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치악산 좁을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길을 벗어났다. 원주 공군비행장 맞은편 소로로 길을 접어들어 치악산 쪽으로 가다가 보면, 소초면 소재지가 나온다.

주말에는 항상 밀리는 영동고속도로이다. 올라가는 차들이 심상치가 않다. 아무래도 길이 막힐 것 같아 길을 서둘러 돌아 나오는데, 마애공양보살상의 안내판이 있다. 길옆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암벽이 없다. 마애보살상이란 암벽에 새긴 것이라 바위만 찾아본다. 낮은 등성이 있는 산 어디에도, 마애불을 조각할 만한 바위가 보이지를 않는다.



길에서 조금 아래 개울가에 솟은 바위 암벽에 선각된 마애불, 선각을 해서 멀리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개울가에 자리한 바위, 그곳에 마애불이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산 밑을 바라다보니 돌계단이 있고 그 밑 기슭에 암벽하나가 솟아 있다. 세상에 저 밑에 저렇게 숨어있었다니. 암벽에 보살좌상 1구가 선각 되어 있다. 높이 3.7m, 넓이 6.2m 크기의 암벽에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보살의 높이는 3.5m이다. 이 보살은 측면상으로서 머리에 보관을 썼는데, 하단에 좌우로 관대가 보인다.

보발의 표현이 부드러우며 상호는 원만한 상으로 양미안과 비량 등은 잘 남아 있으나, 입은 파손되었다. 삼도가 돌려지고 천의는 편단하였으며, 오른발을 구부려서 앉고, 왼발은 직각되게 펴서 왼손을 받치고 있다.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전반기로 추정 된다. 이 보살입상에서 특이한 것은 왼손을 넓게 펴고, 그 위에 연꽃등의 공양물을 올려놓아 오른손으로 이것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작은 동산 한편 물이 흐르는 작은 골짜기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천년을 보내다니. 암벽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음각을 한 선이 굵지가 않아서 언뜻 눈에도 띠지 않는다. 그렇게 천년 세월을 이곳이 앉아 역사의 변화를 보면서, 묵묵히 한손에 받친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저 보살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총탄을 맞은 마애공양보살, 역사의 아픈 흔적

작은 계곡 앞에 철버덕 주저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다만 보고 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암시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저 손에 들고 있는 공양물이 혹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줄 정신적인 먹을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로 와서 배를 채우라는 고함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눈을 들어 앞을 바라다보는 마애공양보살상은, 말없이 한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만 같다.

이 보살상의 입은 심하게 파손이 되었다. 누가 일부러 무엇인가 단단한 것으로 찍은 듯하다. 그도 마애보살상은 우리에게 암시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 그저 입단속 잘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입만이 아니다. 얼굴에도 신체 부위에도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나 있다. 아마도 전쟁 중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나보다.



이렇게 훼손이 된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고, 전쟁 통에 부서지고, 그것도 부족해 별별 이유로 훼손이 되어가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된 이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은 이렇게 아픈 역사를 보듬고, 천년 세월을 개울가에 무릎을 꿇고 있다.

전국에는 수많은 석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에는 여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석조관음상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많은 석불 중 통영 용화사 관음암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경남유형문화재 제43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증평군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된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에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50호인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 입상이 있다.

그 외에도 몇 기의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관음상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석조관음상이 귀한 것은 아마 그 조각을 하는 공정이, 딴 석불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관음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이곳은 예전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관음입상은 건흥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

낯선 관음입상에 매료당하다.

12월 11일 찾아간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은,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는 낯이 설기 때문이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의 전체 높이는 3.5m 정도에 석불의 높이는 3,05m 정도이다. 이 석불이 관음입상이라는 것은 그 몸에 두른 법의나 손에 들고 있는 정병 등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석조관음입상의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개가 솟아 있으며, 관음상에서 보이는 보관은 없어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상은 석가모니불을 새긴 보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뜨고 있다. 얼굴의 가운데 길게 새겨진 코는 약간 손상이 되었다. 손상된 코로 인해서 얼굴의 윤곽이 조금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보개는 높이 솟아있고, 보관은 사라졌다. 목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가 있다.

특이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석조관음상

이 석조관음입상은 일반적으로 신라 때의 석조물에 비해, 미소가 줄어든 형태로 표현이 되었다. 하기에 그 모습이 인자하기 보다는, 조금은 엄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깨는 약간 각이 져 있으며, 평범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 장식이 느리어져 있다. 이런 꾸밈으로 인해 장방형의 모습과 더해져 보살상 특유의 유연함이 부족한 듯하다.

양 어깨에는 단조로운 모양의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 단조로움을 허리를 감아 도드라지게 표현한 띠로 인해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한 것도, 상림리 관음입상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천의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듯 표현을 하였다. 얼핏 무사들이 입는 옛 갑옷을 연상케 하는 천의의 형태이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대좌는 팔각으로 조성을 하여 연꽃무늬를 둘렀다.

이 관음입상은 오른손은 몸에 붙여 팔을 아래로 내려 정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아래는 팔각으로 조성을 했으며, 그 위를 원으로 조성해 연꽃을 새겨 넣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석조관음입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천의의 꾸밈이나 정병, 목걸이 등이 당시에 유행하던 지방의 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정병을 든 오른팔의 팔뚝에는 띠를 두르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코가 훼손이 되 측면으로 보면 조금은 이상한 모습이다. 오른손 팔뚝에는 겹으로 된 띠를 둘렀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하나하나 우리 문화재를 알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지식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에, 그저 피곤한 줄을 모르고 돌아다닌다. 이 다음에 더 많은 자료가 쌓이는 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에 힘든 답사의 여정을 재촉하는지도 모르겠다.


목걸이와 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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