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이라는 마을이름보다는, 오히려 ‘못골’이라는 명칭이 더 정겹게 다가오는 곳이다. 마을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못골은, 그 이름만큼이나 정겨운 곳이다. 지동은 1912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수원군 남부면 지동이었다. 그 후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하면서 태장면 ‘지리’라고 하였다가,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이 되면서 수원시 지동으로 되었다.

 

1972년 동을 통폐합하면서 지동과 우만동의 행정동명을 ‘지만동(池滿洞)’이라 하였으며, 1988년 수원시의 구제 실시로 장안구에 편성되었다. 1990년 1월 1일자 시 조례 제1607호로 지만동을 지동과 우만동으로 분동하였다. 1993년 팔달구의 설치로 수원시 팔달구 지동으로 편동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사는 마을 지동

 

지동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사람들은 참 정이 깊다. 그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웃과 울이 없이 지낸다. 아마 지동이라는 곳이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단위 아파트촌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특별한 빈부의 차이가 없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친근한 이웃일 뿐이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정한 사람들도 흔치가 않다.

 

지동 사람들은 많은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화성의 성곽을 끼고 마을이 조성된 지동은, 자기 집조차 마음대로 뜯어 고칠 수가 없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 수원에서도 못 사는 마을이란 딱지를 붙이고 산다. 조금 사는 것이 남에게 미치지 못할 뿐인데도, 사람들은 지동이 무슨 어디 촌애 붙어있는 동네정도로 생각을 하는가 보다.

 

그런 지동이 요즈음 들어 달라지고 있다. 골목길은 말끔히 청소가 되고, 벽에는 수많은 이들의 땀과 정성이 깃든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골목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집 잎을 말끔히 치우기 시작했고, 더러운 곳은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지동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의 눈에는 크게 띠질 않겠지만, 그 작은 변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시작, 골목사람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깟 벽화그림 하나가 무슨 사람들을 변화를 시켰겠느냐’고 한 마디로 벽화는 그저 좁은 골목 안쪽 벽에다가 그린 그림일 뿐인데, 그것이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동의 벽화 골목에는 요즈음 외지인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사람들이 벽화를 구경하러 심심찮게 찾아든다.

 

그런 외지인들을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스스로 마을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을 끼고 조성이 된 지동은 상대적으로 재개발을 할 수 없는 마을이다. 거기다가 골목길은 좁고 음습해, 지동 사람들은 늘 외부에 나가 지동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려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동이 지난 해 350m의 벽화길 조성에 이어, 2012년에는 680m의 벽화길을 조성하였다.

 

지동은 단순히 좁은 골목에 벽화만 그린 것이 아니다.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노을빛 영화감상회, 노을빛 옥상음악회, 되살림 발전소, 황금마차, 핑퐁 음악다방, 거기다가 수원이 한 눈에 조망되는 노을빛 전망대 등 다양한 형태의 작은 축제로 주민들과 하나가 되는 사업을 펼쳐나갔다. 지난 해 골목축제에 이은 이러한 축제는 지역의 종교는 물론,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했다.

 

 

수원재래시장의 중심에는 지동이 있었다.

 

수원 팔달문 앞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200여 년 전 정조임금이 시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장의 근간은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런 형태는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깊게 참여를 하는가 하는 것이 관점이 된다.

 

이런저런 모습을 따지고 볼 때, 가장 재래시장 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못골시장이다. 그리고 그 옆에 미나리광시장과 지동 시장 역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생활에 빠질 수 없는 물품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이디. 사람들은 이 곳 지동에 소재한 시장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물품들을 구하고는 한다.

 

아마도 수원에서 그래도 과거의 장시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못골시장과 연계된 시장들일 것이다. 그만큼 지동은 수원 상권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이곳 사장의 상인들은 대물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곳 시장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키우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대형 할인점에 밀려 점점 쇠퇴해가는 재래시장들. 그러나 지동의 시장들은 날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동 시장들은 생명력의 근간

 

지동에 있는 시장을 가면, 우선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못골시장 안에는 유기농 식품들이 그득하다. 그것이 바로 수원사람들이 먹거리가 가장 좋은 곳을 따진다면 어느 곳보다 먼저 못골시장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먹거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요즈음 들어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쪼잔하게 구멍가게 상품까지 팔아먹고 있어 다들 죽겠다고 하지만, 지동에 있는 시장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발길을 붙둘고 있다.

 

그렇게 수원사람들만이 아니라 외지인들, 심지어는 외국인들까지 지동의 시장들을 이용하고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은 지동에 있는 시장들 안에는 착한가게들이 많다는 것이다. 유명한 지동시장의 순대타운이 아니라고 해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칼국수집, 만두집, 호떡집서부터 착한 가격의 이발소까지 있다.

 

사람들은 지동자랑을 좀 하라고 한다. 아마도 몇 년 전이라고 하면, 자랑을 할 만한 것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지동은 다르다. 몇 날을 두고 자랑을 해도 자랑꺼리가 남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살만한 마을 못골(지동).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지동을 일러, 세상에서 가장 정이 많은 동네라고 자랑을 한다.

예전에 MBC - TV 프로그램 중에 ‘행복주식회사 10,000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만원의 한계를 극복하는 초특급 프로젝트로, 스타들이 출연을 해 만원으로 한 주간을 버티는 프로그램이었다. 사회에서 돈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연예인들이 출연을 해 재미를 더해 준 프로였다.

 

요즈음 장을 보러나가면,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만원을 들고 장을 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돈의 가치는 하락하고 말았다. 하루에 만원을 갖고 살라고 해도 힘든 지경이다.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이니, 만원의 행복이란 그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목욕을 해라,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한 달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일 년이 행복하려면 새집을 구하라,

일생이 행복하려면 정직하라’

 

라는 말을. 사람들은 적어도 이발을 하고나면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시골 장터에 가도 이발비가 최하 8,000원을 주어야 한다.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만원을 들고 이발을 했다고 하면, 그 다음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을 할까? 그리고 하루를 무엇으로 소일을 할 것인가?

  

사실 요즈음 단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보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하루 종일 소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휴일 날 집안에서 전전긍긍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단 돈 만원으로 과연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가 있을까? 문제는 이발까지 하고 말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 종일 행복해 질 수 있는 곳

 

단 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소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벽화 길로 유명해지고 있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이다. 실제로 11월 25일(일), 단돈 만원을 들고 오전부터 지동을 걷기 시작했다. 지동시장 순대타운 곁에 자리한 주차장 건너편 팔달새마을금고 영천지점에서 미나리광시장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수원식품(수원시 지동 400-8) 옆으로 작은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즐거운 이발’이란 이 집이 바로 이발을 하는데 3,500원이다. 세상에 요즈음 이발료를 3,500원을 받는 곳이 어디 있을까? ‘즐거운 이발’의 주인은 이발경력이 45년이 지났다. 12살 어린나이에 이발소에 취직을 해, 사람들의 머리를 감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요즈음처럼 사람들이 살기가 힘든데, 이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발료를 싸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즐거운 이발소에서는 면도를 해주거나 머리를 감겨주지 않는다. 머리는 본인이 직접 감아야하는데, 머리를 감을 경우 물 값과 수건사용료 500원을 더 내야한다. 그렇게 해도 이발료가 4,000원이다. 아침에 나가 이발을 하고 나니 시간이 점심때가 다 되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옆 못골 시장으로 들어갔다.

 

 

국수 한 그릇 먹고 즐기는 벽화길

 

못골시장 안에는 ‘통큰 칼국수’집이 있다. 이 집에서는 잔치국수는 2,000원, 칼국수는 3,000원이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이발을 하고 점심을 해결하는데 들어간 돈이 7,000원이다. 그리고 칼국수집을 나와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발을 해서 기분이 좋은데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는 바쁠 일이 없다. 어차피 만원을 갖고 하루를 소일해 보려고 나선 길이다.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살피면서 돌아보니, 날마다 달라지고 있는 벽화골목이 행복감을 더해준다. 가다가 다리를 쉴 수 있는 평상 등이 있어 더 좋은 벽화길이다. 벽화 골목길을 돌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벽화골목 구경을 하고 나오는 곳에 핑퐁음악다방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의 향에 취한다. 커피 값이 3,000원이다. 단돈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하루가 행복하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돌아본 ‘지동의 행복’은, 그렇게 만원으로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지동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원으로 즐길 수 있는 행복. 만원으로 이발을 하고, 점심을 먹고, 벽화길 구경하고,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곳. 이곳이 진정한 만원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마을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참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가 보면 힘들 때도 있고, 가끔은 실패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무슨 이야기꺼리가 있겠느냐고도 묻는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행복이라는 것이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의외로 허름한 집에서 호식(好食)을 할 경우가 생긴다. 생각지도 않고 들어간 집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 날은 괜히 횡재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아직은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 못해서라고 늘 위안을 삼는다. 그런 것 하나가 세상살이를 조금은 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화요리 신흥원의 사장님은 바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97 - 21에 소재한 중화요리 신흥원.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촌에 있는 중국집의 외형과 흡사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놀랍다. 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 이 소리는 곧 메뉴판이 없다는 소리이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훙원의 박기수(남, 50세) 사장은 지동 31통의 통장님이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마을 일도 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가깝지 않은 시장사람들이 주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낮에 가면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다. 11월 15일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에 신훙원을 찾았다. 마침 가족들이 모여 있는 시간이다.

 

잠시 대담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30분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배달을 하느라, 겉에 입고 있던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타면만 만들기 벌써 30년

 

“중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왔어요. 그 때는 무조건 서울이라는 곳을 가야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살기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큰일을 좀 해보고 싶었거든요. 1969년에 집에서 가져 온 얼마 되지 않은 돈을 갖고, 동대문시장에서 가방 장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회 경험도 없는데다가 자금도 부족해 결국 손을 놓고 말았죠.”

 

그길로 군에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후 서울의 중국집에 종업원으로 들어가 중화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을 고생을 한 후 30년 전에 수원 지동으로 내려와 중화요리집을 차렸다.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30살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했는데,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참 이런 것을 보면 세월이 참 빠른 듯합니다.”

 

잠시 옛 일을 생각하는 듯 사색에 잠긴다. 이 집은 테이블이라고 해야 세 개인가 밖에 없다. 그저 시골의 어느 중국집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도 단골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이집의 수타 자장면 맛이 일품이기 때문인가 보다.

 

“저희 집은 주로 주민들보다 시장상인들이 더 많이 찾습니다. 배달도 시장으로 더 많이 가고요. 지동 벽화를 보러 오셨던 분들이 들렸다가 가시면, 다음에 딴 분들을 모시고 오기도 합니다.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요. 그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죠.”

 

 

통장 일도 자영업이라 할 수 있어

 

영업하랴 마을 일 보랴 바쁘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바쁘다가 보면, 아무래도 건강에도 문제가 있을 것만 같다. 일찍 영업장으로 나와 준비를 하고, 점심시간 전인 11시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시장 상인들은 아무래도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주문을 하면 빠르게 음식배달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타로 자장을 뽑다보니 그도 만만찮다.

 

“자영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체력이 받쳐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하는데 탈이라도 나면 안되죠. 그래서 많이 피곤하면 쉬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은 오후 7시가 되면 마감을 합니다.”

 

박기수 사장은 현재 지동 31통의 통장님이시기도 하다. 31통은 원래 지동 10통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분통을 해 31통이 생겼다. 그리고 벌써 14년 째 통장을 맡아보고 있다.

 

“손님들이 찾아오셔서 옛날 짜장 맛이 난다고 하시죠. 그리고는 또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아들만 둘인데 이제 다 자랐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지동으로 와서 정착을 한지 30년 세월. 그리고 그 숱한 사연을 간직한 체 지동 한 편에 오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신훙원. 그곳에 불이 꺼졌다. 내일 또 신흥원에는 면을 뽑느라 들리는 소리가 정겨울 듯하다.

참 바쁘게도 사는 분이다. 언제나 수원시 팔달구 지동 벽화골목을 조성 중인 길에 들어서면, 그림을 그리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커피를 내오는 분이 있다.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많게는 세 번씩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든다. 그럴 때마다 물을 끓여 따듯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돈으로 따진다면야 그리 큰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성이 부족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늘 그렇게 말없이 준비를 해놓고, 또 벽에 달라붙어 열심히 칠을 해댄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10통장을 맡아보는 남궁미선(여, 45세) 통장이다. 그런데 이 통장님 이렇게 혹사를 하다가 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동 벽화길에 서 있는 남궁미선 10통장


 

봉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는 분인가?

 

11월 9일, 오전 10시 30분에 화성 동장대(연무대) 앞에는, 수원중부 어머니폴리스 단원 50여명이 모였다. 기념촬영을 간단히 한 후 주의사항을 듣고, 화성 안길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다. 손에는 비닐봉투와 집게를 들었다. 길을 가면서 쓰레기를 줍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 이렇게 환경봉사를 한다고.

 

‘어머니폴리스단’은 수원 중부경찰서 관내 각 학교마다 폴리스단이 있고, 그 폴리스단이 연합해 ‘어머니폴리스연합단’이 되었다. 그 인원이 자그마치 1,200명이나 된다. 어머니폴리스단원이 하는 일은 많다. 학교 순찰에, 등, 하교 길 교통안내, 청소년 상담, 관내 순시, 그리고 일일찻집 운영과 거리 캠페인 등 몸을 둘로 쪼개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한다.

 

 

수원 중부어머니폴리스 연합단 부단장을 맡고 있는 남궁미선 통장이 봉사를 하고 있다(위 좌측) 단원들이 들고가는 비닐봉투에 무게감이 느껴진다(아래)


 

한 달이면 거의 보름 정도를 봉사를 한다고 하는 어머니폴리스연합단의 환경봉사를 하는 현장을 취재하는데, 낯이 익은 분이 보인다. ‘어! 10통 통장님이시네’. 인사를 하고 알아보니, 지동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있단다. 남궁미선 통장은 지동초등학교 어머니폴리스단의 단장이면서, 연합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다는 것.

 

그래도 봉사는 즐거운 마음으로

 

“아니 통장님 그렇게 여기저기 봉사를 하시다가 보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죠. 아이가 셋에다가 가정 일 해야죠. 거기다가 통장을 맡았으니 그 일도 게을리 할 수 없죠. 지동 관내 통장들 모임에 나가 봉사 해야죠. 그리고 아이가 다니는 지동초등학교에 가서 순찰 돌아야죠. 연합단 일도 일주일에 몇 번씩 나가 보아야죠”

“그렇게 하시다가 큰일 납니다.”

“아직은 버틸 만 해요. 그래도 요즈음은 우리 지동의 침침하던 골목이 깨끗해져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이제는 골목 안 어르신들도 모두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 주시고요. 벽화를 그리는 자원봉사자들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고요”

 

 

 

참 못 말리는 통장님이시다. 하기야 봉사를 한다는데 막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골목길 어르신들도 걱정을 하신다. ‘우리 통장님 저러다가 병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원’이라고 혀를 차신다. 말려서 될 일은 아니다. 마을 일을 보는 사람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누가 따르겠느냐며 더 열심을 내야 한단다.

 

“그래도요 요즈음은 힘이 넘쳐요. 우리 10통 골목 보세요. 얼마나 환해졌어요. 어르신들도 저렇게 나와서 칠을 하시고 함께 걱정들을 해주시는데, 젊은 제가 조금 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죠. 그리고 저희 10통은 정이 넘치는 곳이잖아요. 어르신들이 모두 오래도록 이곳에서 사신 분들이라 표정만 보아도 그 속을 알 수 있어요”

 

오늘도 환경봉사를 마치고나면, 지동으로 돌아가 다시 벽에 칠을 해야 한단다. 그렇게 봉사를 하는 것이 즐거워 오히려 건강에도 좋다고. 아마도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은 지동 10통 남궁미선 통장. 지동 벽화가 인터넷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주말이면 카메라를 둘러멘 관광객들이 지동으로 찾아든다.

 

“이곳 골목에서 커피장사를 하면 잘 팔릴까요? 커피 팔아서 번 돈으로 마을을 위해 사용 하려고요. 아직도 우리 마을엔 할 일이 많거든요”

 

 

말을 들어보니 아직은 견딜 만한 듯하다. 이 골목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신다. 그분들을 늘 걱정을 하고 산다는 남궁미선 통장.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고함을 친다.

 

“기자양반, 우리 통장님 기사 좀 잘 써주세요. 정말이지 우리 통장님 같으신 분 없어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번지에는 ‘대안공간 눈’이라는 곳이 있다. 눈을 들어가기 전에는 ‘골목집’이라는 간판을 붙인 밥집이 자리한다. 이 밥집은 막걸리 등 술을 팔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 집을 이용할 때는 주로 늦은 시간이다. 모임을 이 집에서 자주 갖기 때문이다.

 

여름 낮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찾아간 이 골목길은, 밖에서 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좁은 골목과 골목이 연결이 되는 이 길은 지난해부터 벽화를 그리고 있다. 그저 무료하고 답답한 벽에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들은, 좁은 골목길의 답답함을 가시게 해준다. 그래서 이 골목을 다니는 것이 때로는 큰 재미를 준다.

 

 

 

“이놈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

 

골목길을 들어서면 굳이 골목집을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벽에 골목집의 분위기가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안공간 눈을 지나 골목이 좌우로 갈라진다, 일부러 좁은 골목을 잠시 들려본다. 담장이와 벽화가 마주하는 좁은 골목길로 행인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어디 옛날 문화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모습이다.

 

우측의 큰길가로 나가본다. 전깃줄 위에 참새와 같이 아이들이 앉아있다. ‘이 녀석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라’ 하고 소리를 쳤더니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보니 이 녀석들 등 뒤에 날개를 달았다. 백주 대낮에 어린 천사가 내려와 지나는 행인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아마도 이 벽화를 그린 화가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 나오다가 보니, 길바닥에 ‘로맨스 길’이라고 자갈을 이용해 글을 써 놓았다. 이곳이 왜 로맨스길이 되었을까? 하긴 옛날 같으면 이 길을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남몰래 수상한 짓을 했을 것도 같다. 더구나 해질녘 땅거미가 내리 앉을 때면, 슬그머니 입맞춤이라도 해보고 싶었을 그런 골목길이다.

 

 

 

1950년대로 돌아가는 골목길

 

이 길은 아직도 1950년대를 연상케 하는 골목길이 남아있다. 아마 언젠가는 이곳도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이 길을 걸으면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낡고 습한 이런 골목이 무엇이 좋으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라는 것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좁디좁은 이 길에는 사람들의 땀 냄새가 폴폴 풍겨난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시멘트 건물에서 쏟아내는 후텁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아니다. 골목 저편 어귀에서 꺾인 담벼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이 그리도 고마운 길이다. 큰길가로 잠시 돌아 나온다. 그 곳에 엊그제 내린 비로 인해 수원천의 물소리가 시원하다. 그 물소리에 잠시 마음을 흔들어 씻은 후, 다시 골목길을 향한다.

 

 

 

조금은 주변이 달라진 듯한 길을 지나서, 옛날 장거리였을 법한 곳에 닿는다. 낡은 간판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좋아라한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한 마음이다. ‘부여집 5-3164’라는 전화번호가 보인다. 그 옆에 또 하나 ‘허가번호 제2-20○○’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아직도 1950년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거리 향토유적이라도 지정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찻길을 건너 통닭거리로 들어간다. 요즈음은 이 골목 끝에도 통닭집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뒷골목이 재미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또 다른 볼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붉은 선 안이 골목길을 돌아본 곳이다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것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래도 끈끈한 정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곳. 뒷골목을 걷는 것은, 그 곳에 또 다른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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