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도로변에 서 있는 석장승 한 쌍. 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장승은, 동문리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에 마주하고 서 있다. 이곳은 옛 부안 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동문 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동문 안 장승은 성문과 성문 안에 있는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고, 재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세워진 것이다.

 

숙종 조에 세워진 동문 안 장승

 

이 동문 안 장승은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화재도 예방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풍물과 줄다리기, 당산제로 이어지는 마을의 축제가 열린다. 원래 이곳에는 커다란 당산나무와 마을사람들의 쉼터인 모정이 있었으나 지금의 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졌고, 문지기장군이라 불리는 한 쌍의 장승도 조금씩 뒤로 옮겨졌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벙거지를 쓰고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승이 남장승이다. 이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이라고 불렀으며,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 부른다.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장승은 여장승으로 ‘하원당장군’이라 부르고 있다. 자리를 옮겼다는 한 쌍의 장승은 도로변 작은 소공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험상궂은 얼굴 안에 새겨진 미소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여장승은 정형화되지 않은 긴 화강암 돌에 면상을 새겨 넣었다. 이마는 밑으로 내려가면서 조금 넓어졌으며, 이마는 불거져 있다. 그 밑으로는 눈썹을 새겼는데, 중앙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눈은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 작은 눈동자를 만들었다. 코는 삐뚤어진 주먹코에 입은 위아래 이빨이 험상궂게 새겨져 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썼는데, 풍화에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복판 위에는 손을 만들어 놓았는데, 팔은 없고 손만 흐릿하게 보인다.

 

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장승은 머리 위에 끝이 둥근 벙거지를 쓰고 있다. 얼굴은 여장승보다 갸름하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코는 뭉툭하니 주먹코에 길이가 짧다. 입은 송곳니를 표현한 듯한데, 양 볼이 튀어나왔다. 팔은 형상만 있으며 상원주장군이라 쓴 복판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은 전체적으로 오른팔 쪽으로 약간 굽어져 있다. 두 기의 장승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두려운 존재, 그러나 그 안에 편안함이 있어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과 잡귀잡신을 막는 역할을 하는 장승. 장승의 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경계 장승이다. 이 경계 장승은 사찰의 입구 등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준다. 둘째는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수호 장승이다. 수호 장승은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소멸시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셋째는 로표 장승이다. 로표 장승은 길가에 세워, 방위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띠우기도 한다. 수호 장승과 로표 장승, 혹은 경계 장승과 로표 장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안읍 동문 안 장승은 수호 장승이다. 험상궂은 얼굴로 길을 보면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을 방비한다. 그 험상궂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무한한 해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못생기고 추한 모습이지만, 우리네가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도깨비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험상궂은 장승을 세우고, 그 장승의 뒤에서 재액이 소멸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밖으로는 험하고 안으로는 편안한 모습. 그 안에 해학적인 모습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위하였는가도 모르겠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다. 눈은 왕방울 눈에 툭 튀어나오고, 양편의 송곳니가 밖으로 삐죽이 솟아있다. 길가에 서서 이런 해괴한 모습으로 서 있는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비보(裨補)의 역할을 한다. 경남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가에 서 있는 통영 문화동 벅수의 모습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벅수는, 고종 10년인 1906년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벅수의 옆에 서 있는 비석에는 이 벅수가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해 세웠으며,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웠다는 것이다.

 

 

장승의 기능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광주 엄미리의 장승은 마을의 비보장승이면서, 로표장승의 역할도 함께 한다. 목장승의 밑에는 광주 ○○리, 이천 ○○리 등을 적어 놓아 행로의 안내를 하고 있다. 비보장승의 마을의 안녕을 구가하는 장승으로, 모든 장승들은 이러한 비보적 성격을 함께 띠우고 있다.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은,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마을의 허한 곳을 보충하는 토지대장군

 

흔히 마을입구나 사찰 입구 등에 세우는 장승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게 불린다. 흔히 장승, 장생, 장성, 벅수 등으로 불리며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 통영에서는 ‘벅수’라고 한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문화동 벅수는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이 문화동 세병관 부근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氣)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벅수의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는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낙동 입(光武十年丙午八月日同樂洞 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독벅수는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벅수에 반해 걸음을 떼지 못하다.

 

통영 문화동 벅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채색을 한 벅수이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벅수는 U자 형으로 벌린 입과 큼직한 이빨, 그리고 솟아난 송곳니가 비보장승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벅수의 높이 198cm, 둘레는 160cm인 문화동 벅수. 그 모습에 반해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한다.

 

벅수 하나만으로도 중요민속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벅수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10월 13일, 통영답사 2일차에 찾아간 세병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우르르 벅수 앞으로 몰려온다. 그리고 벅수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어대더니, 다시 동피랑 벽화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난 쉽게 동피랑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벅수의 기운을 좀 더 받아가기 위해,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남 여수시 연등동 376번지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변 양편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예전에 이 길은 여수시로 진입하는 구 1번 도로다. 이 도로변에 동·서로 서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장승을 벅수라고 부른다.

 

이 벅수라고 부르는 석장승 한 쌍은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는 곳에 서 있는데, 좌수영 시절에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하여 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런 문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한 쌍의 벅수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 듯하다. 해학적으로 생긴 이 한 쌍의 벅수는 남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다

 

연수시 연등동 375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24호인 이 벅수는 한쌍으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벅수의 몸체에는 하늘을 맡은 신이란 뜻으로 ‘남정중(南正重)’, 여벅수의 몸체에는 땅을 관장한다는 뜻인 ‘화정려(火正黎)’라고 새겨져 있다.

 

동쪽에 위치한 남자벅수는 모자를 쓰고 위로 올라간 눈썹에 달걀형의 눈과 길고 큰 자루병코를 가지고 있다. 입은 조금 벌어져 이빨이 보인다. 그저 바라보기에도 큼지막한 코에 세 개의 이빨이 솟아있는 것이, 여간 해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눈, 코, 입, 귀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름대로 구조가 맞는다.

 

 

서쪽의 여자벅수는 위로 길게 솟아오른 모자를 쓰고 올라간 눈썹을 하고 있으며, 왕방울눈과 눈과 길고 복스러워 보이는 귀에, 코볼이 넓은 매부리코로 되어 있다. 또한 벌린 입 사이로는 뜬 이빨이 보인다.

 

정조 12년에 세운 연등동 벅수, 나리님들 좀 배워라

 

 

 

여자벅수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씨로 보아 정조 12년인 1788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연등동 벅수들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석장승으로 조성된 벅수 중에서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민간신앙을 보여주는 민속문화재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벅수, 장승, 장생 등으로 불리는 이 석물이나 나무로 된 신표들은 사찰의 입구, 길 가, 마을의 입구 등에 세워져 성역을 나타내고 있다. 잡귀를 막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신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224년이나 지난 세월을 그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길가에 서 있는 연등동 벅수 한 쌍. 이 벅수를 촬영하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벅수를 여의도 양편 입구에 세워놓으면, 여의도로 들어가는 잡귀를 다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못된 생각 말이다. 하도 시끄러운 세상 어째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지, 국민을 위해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매번 다툼으로 일관하는 의원나리들을 보면서, 그저 묵묵히 세월을 지켜본 벅수가 오늘은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마을 입구,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대개는 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만,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의 구실도 한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나누어 세우고 있으며, 남녀 1쌍을 세우거나 4방위나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이나 12곳에도 세우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동제의 주신으로 섬기는 대상이 된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장승. 깎을때마다 세워놓아 집단의 장승군으로 변했다. 솟대와 함께 서있다. 2010, 3, 20 답사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의 모습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좌측은 충남 공주시 상신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2007, 1, 25 답사) 우측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무갑리 목장승(2008, 12, 5 답사)

좌측은 전북 남원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2010, 11, 27 답사) 우측은 전남 여수 영등동 벅수(2007, 12, 6 답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 기록이 보여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 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지만, 밑 부분에는 거리를 알리는 로표장승의 역할도 한다. 2011, 1, 3 답사 

함양 벽송사 목장승. 목장승이 오래되어 훼손이 되었다.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2010, 12, 11 답사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해학적인 생김새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

마을 입구의 양편에 서서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서 있는 장승. 처음 장승이 대하는 사람들은 ‘무섭다’고도 표현을 하고, ‘흉측하다’고도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서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승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닮아간다.

선암사 입구에 세워진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계표시 장승. 2011, 3, 5 답사

사람들은 목장승을 1년에 한 번, 혹은 3년에 한번 씩 깎아 마을입구에 세우면서, 자신들의 심성과 닮은 모습을 만든다. 석장승 또한 돌을 다듬는 장인의 마음을 닮는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장승이 무섭기도 하지만,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권력이나 물질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는 험상궂은 얼굴 뒤에, 같은 민초들에게는 한 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란 생각이다.

오랫동안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남아있는 장승. 아마도 사람들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함께 해 왔듯이.

당산이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신표이다. 당산은 장승, 신목, 돌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에 있는 당산은 당산나무와 석장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당산은, 운봉읍사무소 근처 숲 앞에 자리하고 있다.

남녀 한 쌍으로 조성된 석장승은 가운데 길을 두고,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 남녀 한 쌍의 부부장승이다. 주변에는 숲이 있고, 남장승 곁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이 곳 당산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으며, 주변에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원래는 솟대와 함께 있었다고 하나, 현재 솟대는 사라지고 장승만 남아있다.



허한 곳을 방비한다는 서천리 장승

마을 입구 양편에 서 있는 이 부부장승은,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고 복판에 새겨져 있다. 남장승의 복판에는 ‘진서대장군’이라 쓰여 있으며,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왕방울 눈을 하고 있다. 얼굴에는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표현되어 있다.

처음 대할 때는 우락부락한 것이 무섭게 보이지만, 찬찬히 훑어보면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장승은 ‘방어대장군’이라 복판에 음각을 하고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석장승을 가만히 보면, 그 제작기법이나 시기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어느 시기에 한 기의 장승이 먼저 서고, 후에 나머지 장승이 제작된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목이 부려졌다는 석장승

이 석장승을 보면 양편의 석장승이 모두 목 부분에 회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목이 떨어진 것을 붙여 놓은 듯하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부부장승이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주민들이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장승의 곁에 있는 당산나무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주민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나무에 제가 끝나면 장승 앞에도 간단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 마을의 주신은 당산목이 된다. 하지만 이 석장승의 경우 주신은 아니라고 햊도 목장승과 같이 썩어서 부러지거나 넘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문화재이다.




일몰에 찾아간 장승, 해학적인 모습이 정겨워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도 부른다. 7월 24일 오후 6시가 넘어 찾아간 장승이다. 늘 운봉지역을 다니면서도 꽤나 늦게 찾아갔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슴에 희미하게 표현이 된 창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눈은 왕방을 눈으로 이 지역 장승의 형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 뚜렷한 ‘방어대장군’이나 ‘진서대장군’이라 쓰인 글씨는, 이 장승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직능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정월 초하루에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 장승에 조촐하게 제를 지내고 있지만, 어느 시기에는 이 장승이 주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장승은 한 때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도난당했을 당시 장승에 올리던 당산제가 신목으로 옮겨 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마을을 수호한다는 남원 운봉 서천리 석장승. 오랜 세월을 주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두 기의 석장승은, 그 해학적인 얼굴 모습만큼이나 주민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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