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입구에 가면 당간지주란 석주를 볼 수 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 세워놓는 것으로, 절에서 행사를 할 때나 각종 의식을 펼칠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것이다. 이 당을 달기 위한 기둥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철당간’이나 ‘돌당간’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철당간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해서는, 양편에서 깃발을 달아 놓을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는 연못 위편에 두 개의 당간지주가 동 서로 나란히 서 있다. 두 개의 당간지주는 그 형태가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제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남쪽에 자리한 당간지주

 

서로 약 9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당간지주. 그 형태나 크기 등을 보아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마치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하층 기단부는 부서진 채 땅속에 있다고 하며, 그 위로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앞에 절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간은 두 개의 석주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당간을 단 대를 고정시킬 때 사용한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은 아래위로 뚫는게 보편적인 형태이며, 지주 전체를 관통하는 경우와 얇게 뚫는 경우가 있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세 개의 구멍을 뚫었으며, 관통을 하지 않고 지주의 중간쯤까지만 뚫려있다.




맨위는 당간지주 상단에 뚫은 구멍. 아래편에 당간석을고정시키기 위한 구멍과(가운데) 당간석을 받치는 받침돌(아래)
 

맨 위에 있는 구멍은 당간의 상단에 보이는데 직사각형이다. 그리고 아래편의 두 개의 구멍은 둥글게 뚫어놓았다. 이 구멍에 막대 같은 것으로 끼워 깃대를 세우고 묶어 놓는 것이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당간은 단아하다. 많은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당간의 멋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제작된 당간

 

이 두 개의 당간은 조성 시기나 형태가 같기 때문에, 하나의 당간을 설명한다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당간의 기단부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주의 양편 바깥쪽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둘러놓았다. 외부의 중앙에도 역시 한 줄의 선을 주변을 깎아서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지주의 맨 위는 둥근 타원형으로 조성해 부드러움을 더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모서리부분을 돌출시켰다. 맨 아래는 받침돌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 이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경내 입구에 자리한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그 양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사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내놓지 않은 아름다움

높이 약 4m의 당간지주. 지대석 위로 양편에 당간을 새운 중앙에는 당간대를 세울 수 있도록 받침석을 마련하였다. 받침석은 높이가 30cm 정도 되는 네모난 돌로, 그 옆에 붙여 당간지주를 세우는 것이다. 중앙에는 홈을 만들어 덩을 다는 대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을 할 수 있다.


당간을 다는 당간석을 꽂게 만든 받침돌(위)과 당을 다는 당간석(아래)

대의 받침돌은 양편에 네 줄을 내렸으며, 맨 위는 조금 밖으로 돌출이 되게 하였다. 이런 돌 하나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미륵사지 당간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러나 형태 등에서 뛰어난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연못에서 바라다보는 우측 당간지주의 옆에는 둥글게 깎은 돌이 서 있다. 당간석이라는 돌이다. 이 당간석을 당간지주의 중앙에 있는 홈에 끼워 새우는 것인데, 잘라져 아랫부분 일부만 남아있다.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 두 개의 당간이 동서로 서 있는 모습에서, 과거 미륵사의 위용을 엿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어 더욱 좋다. 2011년 1월 25일 오후, 천년 세월 그렇게 서 있는 당간지주의 멋에 취한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백제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병법사를 찾아 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황룡사로 대표되는 화엄사상에 대비되는, 백제의 미륵사상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가람이다. 미륵사는 31가람의 형태로, 금당, , 회랑의 세 곳에 마련한 절이다. 못을 메워 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 등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미륵사는 건축, 공예 등 모든 백제의 문화가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백공이 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의 복합적인 예술세계가 이 미륵사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에 진열된 초석을 돌아보다,

미륵사지 경내를 돌아보면 수많은 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석물들은 모두 미륵사에 서 있는 건물의 초석이나, 탑에 쓰였던 우주와 탱주, 지대석 등 다양하다. 그렇게 많은 석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미륵사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많은 석물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국보 9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임시건물 앞에 진열된 석조물 중에 진열이 된 초석이다. 초석이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주춧돌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초석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은, 미륵사지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초석의 종류만 해도 상당하다. 어지간한 건물 수십 채를 짓고도 남을만한 초석이 미륵사지 경내에 보인다. 금당 터를 비롯해 회랑 등의 초석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초석들이 또 보인다면, 얼마나 거대하고 많은 전각들이 있었던 것인지. 그 초석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다양한 초석의 형태

초석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우선 가장 많이 사용이 되는 것은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초석으로 사용하는 덤벙주초가 있다. 그리고 평초석에 해당하는 낮은 초석들이 있는데, 이는 방형초석이나, 원형초석, 네모난 초석 등이 있다. 초석은 땅을 지주를 삼아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그렇기에 그 사용하는 곳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기둥에 따른 초석의 종류에는 외진주초석과 내진주초석이 있다. 내진주초석에는 고추초석과 단주초석이 있다. 외진주초석에는 우주초석, 평주초석, 퇴주초석 등과 귀기둥초석 등 다양하다. 초석이 낮은 것은 평초석이라 하고, 높이가 높게 마련한 장초석을 활주초석이라고 부른다. 활주초석에는 사다리꼴 형태의 방형초석인 주좌가 있고, 연못이나 누각 등에 사용을 하는 활주초석이 있다. 이 외에도 일각문 등에 사용하는 신방석등도 초석의 한 종류이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허야 혀

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한 장씩 촬영을 하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그런 모습이 조금은 이상했는가 보다.




그건 머하려고 그리 찍는 건가?”
,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주추는 여기 주추가 참 좋지주추종류도 많은가보네요

그럼 많지. 집을 지을 때는 그저 주추가 건실허야 혀.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해야지

이 주추들은 좋은 석재인가요?”, 전국에서 가장 단단하지. 천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미륵사가 창건된 지가 1,40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초석들이 형태를 지키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건실해야 한다는. 그 건실함이 폐허가 된 미륵사지만, 역사 속에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뒤편으로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그 남쪽 기슭에 자리한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권2 무왕조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소재 사자암)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왕과 함께 거동을 하던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간청하자, 무왕은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 등의 전각을 건립하고 ‘미륵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미륵사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7세기경에 이미 폐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제의 멸망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이었다고 보면, 그 당시 전쟁 통에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 개의 화려한 탑이 서 있던 미륵사

현재 미륵사지에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국보 제11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중이다. 1980년대에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는,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2011년 1월 25일 찾아간 미륵사지에는 날이 추운 탓인지,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는 미륵사지에는, 찬바람만이 스산하게 불어댄다.

해체를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국보인 미륵사지 서탑은 아직도 해체된 그대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건너편에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원 9층 석탑으로 발길을 돌린다. 장중한 모습으로 복원이 된 동탑은 몇 개의 돌만이 당시의 석재이다.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형태 및 발굴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동원 탑지에도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은 백제 때의 기단석재 등을 사용하였다

복원된 동탑의 아름다움

동원 9층 석탑은 동탑지에 1991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복원을 완성하였다. 이 9층 석탑의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의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부근에서 발굴조사 때 발굴된 노반석 등을 비롯한 탑의 석재를 이용하였다. 현재 이 동원 9층 석탑의 기단부에는 발굴 당시 발견이 된 석재 일부가 사용이 되었다.

이중 기단위로는 높은 1층 탑신이 서 있다. 1층 탑신은 사방에 계단을 놓았으며, 계단 위에는 철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해 탑신 안으로 들어서면, 十 자 모양으로 통로가 사방으로 나 있다. 하지만 이층부터는 위가 막혀있다. 9층 석탑과 상륜부까지의 총 높이는 27.8m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일층 탑신 안에는 사방으로 통로가 나 있다

금이 가고 있는 복원된 탑, 방치하면 안 돼

이 동원 9층 석탑을 재현하는 데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총 2,000여개의 석재는, 그 무게만도 2,700여 톤이나 되는 양이다. 이 탑을 복원하는 데는 백제시대의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사용이 되었다. 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발견이 된, 백제시대의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금이 가고 있는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

동원 9층 석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탑 안까지 살피고 난 후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에는 서탑을 복원하느라 커다란 구조물을 세워놓았는데, 밖으로 나와 9층 석탑으로 바라보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일층 탑신석 철문 위쪽에 금이 가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위에도 금이 보인다. 문 위 석재에 금은 그 끝이 약간 어긋나 보일 정도이다.

1992년에 복원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복원된 지가 20년째다. 익산 황등 화강암은 단단하기로는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석재가 금이 가고 있다니.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 광화문 현판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의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는데. 이곳도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금이 가는 것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복원이 된 탑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중턱에 소재한 대원사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대원사 대웅전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된 대웅전 삼존불이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아미타부처님, 그리고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자리한다. 목조로 조성된 이 삼존불은 조선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른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삼존불은 1670년에 조성된 것으로, 회감 보혜스님 계보의 맥을 잇고 있는 스님들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약사여래부처님은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왕부처님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안락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모악산 대원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좌측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여래부처님 손은 약손

어제(9, 17) 오후 모악산 산사에 볼일이 있어 산을 올랐다. 잠시 밖을 나가기만 해도 카메라 하나는 꼭 지참을 한다. 지난 번 산에 오르다가 렌즈를 박살내고 나서, 가급적이면 산에 오를 때는 작은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를 지참한다.

산을 올라 산사에 도착을 했는데, 대웅전 지붕 위에 벌떼가 까맣게 날고 있다. 무슨 일일까? 올 해는 한봉을 치는 분들이 모두 망했다는 소리를 한다. 날이 너무 뜨거워 벌들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절집에도 10여개의 벌통이 있었는데, 모두 다 비인 상태였다. 그런 차에 저렇게 벌이 날아왔으니 반갑기도 하다.

약사여래불 오른손 목안으로 벌떼들이 까맣게 드나들고 있다.

그런데 그 벌들이 연신 대웅전 안으로 날아 들어간다. 궁금하여 따라 들어갔더니, 이게 무슨 일일까? 세분의 부처님 중 오른쪽에 좌정한 약사여래 좌상의 오른편 손의, 손 목안으로 벌들이 들락거린다. 그 안에 새롭게 집을 지은 것인가 보다.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놈이 공격을 한다.

벌침은 약이라는데, 따갑기는 해도 동영상으로 촬영을 하였다. 예전 어릴 때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엄마 손은 약손, ○○배는 똥배’라고 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하면 희한하게도 살살 아프던 배가 가시고는 했다. 약사여래 부처님 손 목안으로 들어가는 벌들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난다.



저 벌들도 올해 무더위에 많이 아팠던 것일까? 그래서 약사여래부처님 손 안으로 들어가 치료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데, 갑자기 뒷덜미가 따끔하다. 헛된 망상 버리고 정신 차리라고 벌이 한 대 쏘았나보다. 이래저래 약사부처님한테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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