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포천시 소흘읍 산 64번지 노고산에 있는 포천시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산성지’를 다녀와, 다시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올립니다. 아마도 좀 더 실감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겨울철 산행이 만만치는 않지만 산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정작 산성의 흔적이 보이질 않아 급 실망을 하기도.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지역의 답사가들로 인해, 고모리산성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문화재는 역시 사진보다 동영상이 있어야 더 좋은 듯합니다.


   
어느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답사 다니시면 재미있겠어요. 전국 어디나 다 갈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문화재도 보고”

틀린 말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사실 답사라는 것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나처럼 ‘진한 역마살’을 갖고 있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답사로 풀어내는 것이 제격이기도 하다.

2월 5일, 포천시 소흘읍 산 64번지 노고산에 있는 포천시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성지’를 찾아 나선 길. 고모리 저수지 공지에서는 대보름 축제를 하느라 시끄럽다.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고모리산성이 어디 쯤 있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저 위”라는 대답이다. 시골 분들에게 ‘바로 저기’라는 말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을 때가 많다.



바로 저기가 눈길 한 시간을 올라

고모리산성지는 고모산, 혹은 노고산이라고 부르는, 해발 380m의 산 정상부를 에워 쌓고 있는 토축산성이다. 두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라고 하나,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성벽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전체길이는 822m라고 하지만, 남아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가파라 줄을 잡고 올라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눈길 산행은 정말 힘들다. 산 위에 오르면 소흘읍이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요충지이다.

‘바로 저기’라는 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용이하지가 않았다. 몇 번을 물어서 산으로 오르는 길. 눈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등산로라고 하지만,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산봉우리 부분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것이 정상인가 보다 생각하면 또 산이 나온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높지 않은 산을 오르는 길이 참 멀게만 느껴진다.

겨우 산 정상에 올랐다. 마침 이 산성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산 위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물도 준비하지 않고 올라간 산행. 숨이 턱에 찬다. 물 한잔을 마시고나서 성이 어디냐고 물었다. 성이라고 알려주기는 하는데,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이 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표시가 나질 않는다.



산행에서 만난 지역문화를 연구하시는 분들. 서 있는 곳이 바로 토축으로 쌓은 성곽이다

더구나 눈이 쌓여있고, 잡풀더미가 우거져 성의 흔적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나마 봄에 눈이 녹으면 일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부분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보이지가 않지만, 눈이 녹으면 일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한 성곽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백제 때 쌓은 성, 그러나 고구려가 더 오래 사용 해

원래 고모리산성은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는 세력이나, 남에서 북으로 진출하려는 세력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요충지인 셈이다. 산 정상에서 만난 이 지역의 성을 연구한다는 유대근씨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란 더욱 어렵다. 자칫 미끄러지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 고모리산성은 아마 100여명 정도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성이라기 보다는 주변을 감시하는 초병들이 묵는 성곽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백제 때 산성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을 보면 고구려의 것들입니다. 아마도 중간에 고구려에게 성을 빼앗겨, 고구려가 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라고 한다.

눈길 1시간여를 걸어올라 찾아간 고모리산성. 비록 성곽은 유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산성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짐승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를 때보다 몇 배는 더 고생을 하고 내려온 비탈길. 겨울의 답사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10월 17일 김제 모악산 금산사 개산대제가 열렸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인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금산사가 통일신라 시대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기다림은 역시 지루해. 언제 시작하는 거야...'

금산사 1412주년 개산대제 열어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 17일 금산사 대적광전 앞에서는 금산사 개산 1412주년을 기념하는 개산대제가 열렸다. ‘개산대제’라 함은 금산사가 창건한지 1412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념식장에서 ‘화동(花童)’들을 만났다. 육법공양을 하기에 앞서 앞에서 꽃을 뿌리며 행진을 하는 화동들은, 비천상에서나 볼만한 그런 아름다움이다.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화동의 모습이다. 마치 비천인의 화신인 듯한 화동들이다.



너무 오래 서 있었나보다. 눈도 감기고 졸립기도 하도, 햇볕은 왜 이렇게 따가운 것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즐겁다. 사람도 겁나게 많고,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간다네




드디어 행진이다. 예쁜 모습으로 꽃을 뿌리며 들어가야지....앗 그런데 꽃이 없다. 너무 빨리 뿌려버렸네~

너희들이 화동이면 난 청사초롱 소녀다. 보이냐 이 아름다운 자태가...


전북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0 - 6번지에는 보물 제914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 2기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야산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고목이 서 있는 뒤편에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모셨는데,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두 불상은 모두 비슷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불상이 왼쪽 불상보다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가 깨지고 대좌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완전한 모습이다.


눈이 파여진 2기의 석불입상

보화리는 정읍시 소성면사무소 가까이 있다. 보화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니 야산에 한 폭의 그림같이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돌계단을 오르니 보물인 석불입상의 안내판이 있고, 곁에는 전각 안에 석불 2기가 가지런히 서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2기의 석불입상의 두 눈이 파여져 있다. 움푹 파여진 눈이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입부분도 파여져 있는 이 2기의 석불입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기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큼직한 소발이 솟아 있는데, 얼굴 역시 길고 풍만하며 부드러워 백제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법의인데, 좌편견단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속에는 속옷과 아래엔 치마를 받쳐 입었다. 옷 주름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편으로 어깨나 손, 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의 각 부분은 마모가 심하나 입가로부터 양쪽 볼에까지 미소를 짓고 있어 어린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소경에게 눈을 주셨을까?

석불을 이리저리 돌아보고 뒤돌아 나오면서도, 두 눈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누가 저 부처님들의 눈을 가져간 것일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인지라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정자에 마을 어르신들 몇 분이 담소를 하고 계시다. 보화리 석불의 눈은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으나 모르시겠단다. 언제부터 저렇게 눈이 파여져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모습으로 서 계셨단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흠집이 생긴 것이야 세월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두 눈을 저리도 움푹 파일 정도로 훼손을 시켰다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일부러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차를 돌려 마을을 떠나다가 우연히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그저 궁금하던 것이라 재차 물었다. 석불의 눈이 왜 없어졌느냐고.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부처님께서 마을에 눈을 못 뜬 사람들이 있어서 주셨나 보지’. 그랬을까? 부처님께서 두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두 눈을 시주를 하셨을까? 그렇게라도 대답을 들으니, 속이 좀 시원하다.



두 분 부처님의 눈은 도대체 누구에게 시주를 하셨을까? 아니면 세상이 하도 추악한 모습들이 많아 스스로 눈을 멀게 하셨을까? 그도 아니면 부처님의 두 눈을 누가 훔쳐갔나? 대답 없는 석불의 얼굴에는 자비가 가득하다. 그저 그렇게 온 세상을 다 보겠다는 듯. 아마도 눈이 있으면 한부분만 보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온 세상을 어루만지기 위해 눈을 없앤 것은 아닌지. 그 큰 뜻을 감히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대답 없는 두 분 석불입상 쪽을 바라보니, 저녁 해가 설핏 넘어가고 있다.


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참으로 슬픔이 많은 산성이다. ‘교룡산성’이라는 산성 명칭은 아마도 이 산성이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룡산성에는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5월 12일,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교룡산성은 이번 답사가 두 번째였다.

산성 입구에서부터 길이 미끄럽다. 돌계단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은 그 높이가 5~8m 정도로 단단한 석축 쌓기를 하였다. 이곳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 쌓고 있는 산성이다. 산은 그리 높지가 않지만 밀덕봉과 복덕봉 등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곽으로 추정하다

교룡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빗방울이 뿌리는 가운데 천천히 교룡산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있고 가운데 계곡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곳에 수문을 두었을 것이다.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성의 입구 좌우로는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원래 교룡산성의 전체길이는 3.1km 정도가 되는 제법 큰 성이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성곽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문으로 다가가니 반월형으로 조성한 성문이 나타난다. 안쪽으로 보니 문을 달아냈던 툴이 보인다. 그런데 한편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외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성문 안으로는 비석군이 서 있다.

옹성은 후에 쌓은 듯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아놓았다. 옹성이 있다는 것은 이 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대장 처영이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그 때 이 옹성을 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이곳 교룡산성의 아군과 교전을 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이 문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야 할 곳이다. 하기에 비탈이 진 성이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옹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작은 문이지만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교룡산성의 슬픈 역사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니, 선국사가 보인다. 아마도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지나 좀 더 오르니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이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동학군의 지도자 김개남의 피에 젖은 역사

김개남(1853년 ~ 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대접주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전라북도의 실력자로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 때, 김개남은 처음부터 김낙삼과 김문행 등 1,300여 명의 농민군과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같은 해 4월 에는 고부 백산에서 농민전쟁의 본부격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김개남은,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동학혁명군의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협상을 벌인 김개남은,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5 ~ 6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해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에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개남은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야산에 은신하였다. 12월 27일 매부인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태인에서 체포된 김개남.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가두었다가 1895년 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농민군을 모아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김개남.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처형을 당하고 난 후, 서소문 밖에 목만 매달린 채 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교룡산성의 역사는 그렇게 피의 역사로 끝이 나고, 슬픈 역사를 알리 없는 5월의 비만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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