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팽목항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위령굿읗 하고 왔단다, 보내온 사진을 보니 배 위에서 넋을 건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뱃전에 노랑색 리본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팽목항까지 가서 위령굿인 영혼제를 올리고 왔다는 승경숙(, 60.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이수자)씨를 만나 보았다.

 

지난 63일이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참사를 당한지 49일째 되는 날예요. 2일 날 진도를 가는데 비바람이 얼마나 몰아치는지, 수원에서 문하생들과 함께 8명이 물건을 가득 싣고 15인승 차로 가는데 차가 뒤집힐 것만 같았어요.”

 

 

가는 길서부터 험난했다고 한다. 그렇게 진도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고난 후, 3일 날 아침 일찍 팽목항으로 이동을 했단다. 정작 팽목항에서 배가 바다로 나갈 수가 없어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인근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어선 두 척을 이용해 30분 정도 나갔는데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눈을 뜰 수조차 없었어요. 거기다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너무 높아 다시 항구로 돌아와 가까운 곳에서 굿을 시작했죠. 배 두 척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만신 등 30명 정도가 배위에 오르고, 한 배에는 굿을 할 사람들이 탔죠.”

 

 

대명원 김현정 원장이 주관한 영혼제

 

사람들은 세월로 침몰 49일째인 지난 63일을 전후 해 곳곳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가 난 지점에 가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위한 굿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번 영혼굿은 서울 약수동에서 대명원을 운영하시는 김현정(, 69) 원장님이 주관을 했어요. 서울에서도 많은 신 제자들이 함께 참여를 했는데, 배 위에 올라 바다로 나가 막상 넋을 건지는 굿을 하려고보니 얼마나 눈물이 흐르는지 참을 수가 없었죠.”

 

준비를 해간 음식만 해도 150인 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아이들 생각이 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통닭, 빵까지 준비를 했다는 것. 그 많은 음식들을 선장들이 바다에 넣어 아이들이 배가 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해서 모두 바다에 뿌려 주었단다.

 

 

왜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해갖고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아이들이 그런 것들이 먹고 싶었나 봐요. 정말 많은 음식을 해갖고 갔는데도 정작 저희들이 먹은 것은 없어요. 아침 10시에 바다로 나갔다가 항구로 돌아온 것이 오후 330분 정도였나 봐요.”

 

8월에 100일 위령굿 열 터

 

그렇게 팽목항으로 달려가 위령굿을 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하는 승경숙씨. 10일 오후 자신의 신당이 있는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세지로 160 제석천궁이라는 신당에서 일일이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다.

 

 

“82일이 세월호 사고가 난지 1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때 다시 팽목항으로 갈 수는 없지만, 수원에서라도 장소를 잡아 제가 위령굿을 해주려고 합니다. 이번에 배위에서 굿을 할 때도 기에 일일이 글씨를 써서 했는데, 그때도 노란천에 글씨를 써서 늘이고 굿을 하려고요.”

 

아이들이 어른들의 부주의로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워, 100일째 되는 날 자비를 들여 위령굿을 꼭 열어 주겠다고 하는 승격숙씨. 그때의 생각이 다시 나는 듯 눈시울을 붉힌다.

남원 시청에서 요천에 난 다리를 건너 좌측 길로 가다가 보면, 도로 좌측에 ‘용담사’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에 소재한 이 절 안으로 200m 정도를 들어가면, 절 문을 들어서면서 커다란 탑 하나를 만나게 된다. 탑이라고 하지만, 이 탑의 생김새가 일반 석탑과는 아주 다르다. 흡사 석재를 높이 쌓기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용담사는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세워진 사찰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백제 성왕 때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통일신라 말기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절에 전하는 전설이나 여러 가지 유물로 보아서,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려 때에 세워진 칠층석탑, 이상한 탑일세.

한 마디로 이런 형태의 탑은 보기가 어렵다. 흡사 높이 쌓기 내기라도 한 듯한 모양이다. 높이가 워낙 높다보니 안정감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상륜부는 사라진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히 높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얹었는데, 너무 길쭉하고 홀쭉한데다가 지붕돌이 몸돌보다 유난히 크고 두터워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위로 오를수록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이 칠층석탑은 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안정하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형태의 칠층석탑은 탑신의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이렇듯 불안정한 부분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있는 듯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높이가 9.95m에 이르고 있는 용담사 칠층석탑. 이 탑은 용담사 창건당시의 유물 22점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용담사의 최초 창건연대가 고려 초기가 아닌가도 생각하게 만든다.



왜 이런 탑을 조성했을까?

11월 4일 찾아간 용담사. 시간이 늦어 제대로 사진을 찍을까도 걱정이다. 용담사는 이번이 초행은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왔다. 첫 번 째와 두 번 째는 이상하게 비가 오는 바람에 탑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위부분이 까맣게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날이 흐린데다 시간까지 늦어 걱정이 앞선다.

여름철과는 달리 11월부터는 답사도 힘이 든다. 날이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답사를 해도 겨울철에는 짧아진 해 때문에, 여름철의 절반 정도 밖에는 답사를 할 수가 없다. 마음이 바쁜 김에 먼저 사진부터 찍어놓고 탑 주위를 살핀다.



높이 10m의 칠층석탑. 그 형태로 보나 조각을 한 것으로 보나.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런 모양의 탑을 세운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남원은 배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에 떠내려 갈 것을 염려해 선원사에는 배를 묶는 석주가 남아있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높게 조성한 탑은 혹 배의 깃대는 아니었을까? 좌우로 바람에 따라 중심을 잡기 위한.

이상하게 불안정한 칠층석탑을 올려다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해답은 결국 얻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되뇐다. ‘저 탑 정말 배의 깃대가 맞을 것 같다’고.

답사를 하면서 만나는 많은 나무들. 그 중에는 천연기념물도 있고, 지방에서 지정된 기념물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호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지정도 받지 못한 나무도 있다. 아직 나도 그 지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로 나누이는지, 수령이 오랜데도 지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등은 늘 궁금하다.

천연기념물이란 자연 가운데 학술, 자연사,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한 구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식물을 주체로 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노거수가 124건으로 1그루씩 지정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수종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종(樹種)으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은 19건이다. 이어 소나무종류가 처진소나무와 반송을 합해 18건이지만, 곰솔까지 포함을 한다면 24건으로 가장 많다. 그만큼 다양한 소나무가 지정을 받았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종류가 12건 등이며, 백송과 이팝나무, 향나무가 각 8건 정도이다.

귀한 몸으로 지정을 받은 나무의 종류는 다양하다. 회화나무와 털왕버들을 포함한 왕버들류, 비자나무, 푸조나무, 후박나무, 옴나무, 탱자나무, 팽나무, 망개나무, 측백, 갈참나무, 회향목, 올벗나무 등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외에도 특별한 것으로는 송악, 소태나무, 등나무, 배롱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의 조금은 생소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창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들만 만났다. 답사를 며칠 나가야 거목 한 그루를 보는 것이 보통인데, 이날은 열 그루에 가까운 나무들을 만난 것이다. 그 중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446번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멀리서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그냥 얼어붙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 멀리서 보이는 이 나무는 마치 우산을 쓴 모습이다. 나무의 생김새가 멀리서보아도 아름답다. 폭나무, 포구나무라고도 부른다는 팽나무 한 그루. 어딜 찾아보아도 이 나무가 도대체 몇 백년이나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아주 오래 묵었다는 것 밖에는.



한 걸음에 달려가 본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다. 팽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염소를 매어 놓은 줄에 걸린 것이다. 그 염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에 푹 빠져버렸다. 나무 가까이 기서 본다. 외과수술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생육이 좋은 나무이다. 어떻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나, 그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팽나무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 읽는다.

수동리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이곳이 바닷가였다고 한다. 간척지로 매립을 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배를 묶어두기도 했다니, 변해버린 주변 경관이 아쉽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을까?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높지 않은 둔덕위에 팽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지금도 그림 같은 모습인데, 예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수동리의 팽나무는 8월 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이 나무아래 모여 기원하던 당산나무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수동리 팽나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들 중에서, 가슴높이의 둘레가 가장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고 한다. 수세 역시 좋은 편이어서 팽나무 종을 대표할 만하다.

나무 주변을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이 나무에 빠져든다. 한편으로는 멀리 산줄기를 바라보고, 예전 바닷물이 들던 곳은 가슴이 시원하게 터질 수 있는 들판이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 줄기 여기저기 이상한 형상으로 옹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밑동 움푹한 곳에는 나무 스스로가 이름 모를 버섯을 키우고 있다.

나무 밑동에 붉은 옷을 입고 서있는 사람이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이다. 비교를 해보면 팽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나무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몇 날을 이야기를 해도 다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난 이 나무를 그렇게 불렀다.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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