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굴뚝은 나름대로의 독립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 궁의 굴뚝에 비해 사대부가의 굴뚝들은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것은 사대부가들이 선호하는 와가(瓦家=기와집)’의 담장을 보면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 아주 드물게는 그 담장 밖으로 삐죽 머리를 내민 굴뚝을 볼 수도 있다.

 

사대부가의 굴뚝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은 사대부가의 굴뚝은 당연히 높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사대부가의 집 굴뚝은 작고 낮다. 물론 이렇게 일률적인 굴뚝의 형태가 처음부터 그렇게 낮고 볼품이 없었는지 정확지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집들을 보수를 하면서, 닮은꼴로 바뀌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산골의 굴뚝들은 궁궐 굴뚝의 닮은 꼴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여러 채의 한옥들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곳에 지어진 것은 아니다. 옮겨놓은 이 고택들의 집안을 둘러보면 지방에 있는 와가의 굴뚝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남산골이나 북촌 등의 한옥들을 보면 궁궐 굴뚝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의 굴뚝은 전돌을 사용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 댁 재실의 굴뚝도 전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당시 궁궐 인근에 있는 왕족이나 인척 등의 집 굴뚝들은 궁궐의 굴뚝과 흡사한 형태로 조성을 한 것으로 보아, 한양에 사는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그 형태도 비슷하지만, 궁궐의 굴뚝보다는 그 형태가 조금은 작기 때문이다.

 

지방에 있는 사대부가들의 집의 굴뚝은 어떤 형태일까? 근대에 들어서 지은 집들을 보면 굴뚝이 모두 지붕의 처마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에 지은 집들을 보면, 굴뚝이 절대로 용마루를 넘지 않는다. 그 굴뚝에는 어떠한 사고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지방에 산재한 많은 와가들의 굴뚝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논산의 한 고택에 들렸을 때 집을 관리하는 분으로부터 장시간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예전 사대부가의 사람들은 굴뚝을 왜 낮게 한 것일까? 그렇게 낮게 한 이유는 자연적인 것과, 인도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6호인 아산의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와,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인 함양 일두 정여창 가옥의 굴뚝은 지방의 와가 중에서는 높은 굴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굴뚝 역시 용마루의 높이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외에 와가들의 굴뚝을 보면 모두 땅에서 1m 20cm ~ 1m 50cm 정도이다. 왜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일까?

 

 

자연치유와 함께 겸손을 배운다고

 

양반가에서는 대개 참나무 장작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나무를 땔 때 나오는 연기에는 무슨 성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옛날 분들은 그 연기를 몸에 쏘이면 피부병 등을 앓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주부들이 불을 때기 때문에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데, 양반이 되어서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땔 수는 없을 터. 그 연기를 쏘여 건강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설마 그럴리가 하고 반문을 하겠지만, 어르신이 들려주신 이야기이니 믿고 넘어갈 수밖에. 또 한 가지 이유는 굴뚝을 낮게 만들어 그 연기가 집안에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것은, 방액(防厄)의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연기에 놀란 잡귀들이 멀리 달아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낮은 굴뚝을 만들어 자신에게 항상 겸손을 깨우치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 것이란 것은 수긍이 간다. 하지만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겸손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한 고택을 들렸을 때, 문을 낮게 만드는 것은 바람이 들어오는 것은 막고, 온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말을 들었다. 더불어 항상 낮은 자세로 사람을 섬기라는 이유도 있다고 했다.

 

사대부가의 굴뚝에서 배울 수 있는 이유가 그렇다면, 가진자들의 굴뚝을 다 낮게 조성을 해주는 것이 어떨지. 여주 명성황후 생가의 굴뚝은 아예 연도에 구멍을 낸 자라굴뚝이다. 그래서 황후가 되었을까? 또한 거창 임종호 가옥의 굴뚝은 안채 앞에 모아놓았다. 갖가지 형태로 꾸며진 굴뚝. 양반가의 굴뚝도 나름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집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굴뚝에도 철학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정월에 드는 액은 이월 영등으로 막아내고

이월에 드는 액은 삼월 삼짇날 막아내고

삼월에 드는 액은 사월초파일에 막아내고

사월에 드는 액은 오월 단오로 막아내고

오월에 드는 액은 유월 유두날 막아내고

유월에 드는 액은 칠월 칠석에 막아내고

 

정월 초사흘부터 대보름까지 수원의 각 가정에서는 홍수막이라는 의식을 치렀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가 않다. 홍수막이는 일 년 간 사람에게 드는 나쁜 일들을 막아내는 일종의 제의식이다.

 

수원은 일찍 팔달문 안과 밖으로 장시가 섰던 곳이다. 자연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장거리가 활성화되면서 한양에서 축출을 당한 무격(巫覡)들이 노들나루를 건너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장시가 활성화 된 수원은 딴 곳보다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을 테고, 그만큼 장사를 함에 있어서 궁금증도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영동시장은 아예 거북산당을 섬겨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은 200여 년간이나 유서 깊게 전해 내려 온 지역의 전통굿으로, 경기도 수원 팔달문 인근의 영동시장 내에 신당이 있다. 시장의 역사는 1790년경 수원성 건립과 함께 하며, 그 때부터 터주가리 형태의 제당이 있었다고 한다.

 

영동 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축조된 이유를 보면 화성 건립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남문밖에 상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인 시장의 형태를 갖추고 되면서 당이 선 것으로 보인다. 거북산당은 상인들을 주축으로 상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도당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시장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시장에서 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없어도 당제는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은 영동시장 상인들을 주축으로 근 200년이 넘는 시간을 전승이 되어 온 것이다.

 

 

당의 명칭이 거북도당 으로 불리는 것은 원래 이 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도 하며, 또 인근의 구천동과 가깝고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불을 제압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거북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구릉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 거북산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정월에 홍수막이를 해야 안심이 돼

 

칠월에 드는 액은 팔월 한가위에 막아내고

팔월에 드는 액은 구월 중구절로 막아내고

구월에 드는 액은 시월 상당 무시루떡으로 막아내고

시월에 드는 액은 동지달 동지 팥죽으로 막아내고

동지에 드는 액은 섣달 악귀 쫓던 방포로 막아내고

섣달에 드는 액은 정월 방망이 맞은 북어 한 마리

소지에 둘둘말아 원주 원강에 던져 막아내고

 

예전에는 거북산당에서도 홍수막이를 하였다. 원래 홍수막이는 각 가정에서 대청과 부엌, 안방등에 고사상을 마련해 놓고 무격이 징을 치면서 달거리라고 하는 홍수막이 축원을 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집안에서 하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가 전문적인 무업(巫業)을 하는 무격의 전안을 찾아가 홍수막이를 한다.

 

 

정초에 이렇게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무엇인가 든든한 것이 있어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이 든든하죠. 그래서 홍수막이는 빠트리지 않고 합니다. 벌써 저희는 수십 년을 이렇게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어요.”

 

연무동에 산다는 이모씨는 정월에 홍수막이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한다.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일이 터져도 자신이 생겨 쉽게 넘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네의 풍습인 홍수막이. 단순히 우상숭배로 치부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부터 전해지는 풍속으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올해는 1222, 2012년에는 1221일이 절기로 동지(冬至)’이다. 일반적으로 동지는 대설이 지난 후 15일째 되는 날이다. 동지에는 동지추위라는 것이 몰려온다고 한다. 아마도 이 추위가 겨울 중 가장 추운 추위일 것이다. 동지란 말 그대로 하면 겨울에 이른다는 것이다.

 

동지에는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동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가 하루에 1분 정도씩 길어진다고 한다. 옛 풍습에는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지금도 우리의 속설에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 추석과 동지를 4대 명절로 부르기도 한다.

 

 

농한기인 동지, 그러나 농촌은 더욱 바빠져

 

사람들은 흔히 동지가 되면 농촌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동지 때가 되면 들로 일을 하러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그보다 몇 배가 더 많은 일을 집안에서 해야만 한다.

 

우선 동지 때 아녀자들은 겨울 찬거리를 준비한다. 김장은 이미 해 놓았다고 해도, 이것저것 밑반찬 거리를 만든다. 채소 등을 자르고 말려, 일 년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남자들이라고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다. 밭으로 나가 보리를 밟기도 하고, 내년에 사용할 새끼 꼬기도 해야만 한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 동지를 전후 해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동지팥죽은 왜 시작이 되었을까?

 

동지에 팥죽을 먹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설화에서 기인한다. 신라 때 어느 가난한 선비의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그 나그네는 선비에게 부자가 되는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선비는 나그네의 말대로 따라했더니, 정말 가세가 부흥이 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돈은 많아졌으나 선비는 날마다 말라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던 스님이 선비에게 이르기를 그 나그네는 도깨비이다. 도깨비를 퇴치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다.’고 하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말을 잡아 그 붉은 피를 사방에 뿌리라는 것. 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선비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사방에 뿌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설화 속의 팥죽의 유래이다.

 

이와는 달리 6세기경 중국 양나라의 종름이 쓴 연중 세시기인 형초세시기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하고 있다. 공공씨의 아들이 죽어 역질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붉은 팥을 무서워 해 팥죽을 쑤어 역질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짓날이 되면 집집마다 팥죽을 쑨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린 다음 집안의 대문, 장독대, 측간, 부엌, 뒤뜰, 마구간 등에 한 그릇씩 갖다 놓는다. 그런 다음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석구석에 골고루 뿌린다. 이는 물론 잡귀들이 붉은 색을 싫어해서이다. 즉 붉은 팥으로 쑨 팥죽을 여기저기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는다는 것이다.

 

 

팥죽을 왜 이렇게 많이 쑤었지?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사는 고성주끼(남, 60세) 동지때마다 이웃과 함께 팥죽을 나누는 고성주씨는 팥죽을 몇 솥을 쑨다. 팥만 해도 가장 상품으로 세말이나 불렸다. 거기다가 새알이라는 찹쌀도 한 말이나 만들었다. 전날부터 사람들이 찹쌀로 새알을 만들고 팥죽을 쑬 준비를 한다. 그리고 동지 새벽부터 몇 개의 솥에 팥죽을 쑨다. 웬만한 사찰보다 양이 더 많다.

 

고성주씨가 이렇게 팥죽을 많이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평소 이웃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고성주씨는 팥죽도 이웃에 사시는 홀몸어르신들에게 나누어드린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팥죽 한 그릇 해 드시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팥죽이 다 끓으면 용기에 담아 이웃에 나누어주고는 한다. 주민의 이야기에서 평소 고성주씨의 됨됨이를 알 수가 있다.

 

그 분은 언제나 찾아가 도와달라고 해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 분이 마을에 함께 산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죠. 동지 날에도 수십 집의 어르신들께 팥죽을 나누어 드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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