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을회관을 찾아가고는 한다. 옛소리라고 부르는 우리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우리 소리란 생활 속의 소리다. 예전에는 모든 작업이 소리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은 소리를 하면서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조금은 가셔보고자 하는 뜻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힘든 세상살이를 소리를 하면서 잊고자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슬픈 여인의 시집살이 죽음으로 끝나

 

진주난봉가라는 소리가 있다. 이 소리는 유명하다. 모 가수도 이 소리를 불렀고, 전문소리꾼들이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꾼들에 의한 소리보다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들의 곡조 없는 탄식조의 소리가 더 일품이다. 요즈음처럼 선율이 있는 노래로는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자탄가조의 소리야말로 인생살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테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진주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고개 들어 그곳 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간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하다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셨으니 사랑방에 들어가라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 가지 안주에다

기생첩 옆에 끼고 권주가를 부르더라

 

시집살이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그 시집살이 동안 낭군은 어디에 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 간 곳이 왜 하필이면 진주였을까? 이 소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진주낭군'이란 표현을 했을까?

 

예전 진주에는 교방청이 있었다. 교방청이란 관아에 속한 무기(舞妓)들을 교육시키던 기관이다. 이 교방청에 속한 무기들은 춤, 소리, 악기뿐만 아니라 글과 그림도 배웠다고 한다. 현재 진주팔검무, 진주교방굿거리, 진주승전무 등의 춤은 모두 이 교방청에서 배울 수 있는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교방청이 진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이렇게 진주낭군이란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은 <고려사 악지>에 보이는 진주의 사록 위제만과, 진주 기생 월정화의 이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든다. 고려사 71권 악지에 보면 '월정화는 진주 기생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녀에게 매혹되어 그의 부인이 울화가 나서 죽었다. 진주 사람들이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살았을 때 서로 친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고, 사록이 여색에 빠졌음을 풍자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사모시관에 전시된 베짜는 여인의 인형. 예전 여인들은 밤새 베를 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 가지 안주에다

기생첩 옆에 끼고 권주가를 부르더라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이것을 본 며늘아기 아랫방에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매달아 죽었더라

이 말들은 진주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런 줄 왜 몰랐나 사랑사랑 내사랑아

화륫정은 삼년이요 본댁정은 백년인데

내 이럴 줄 내 몰랐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벌나비 되어

남녀차별 없는 곳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이렇게 진주 낭군을 기다리던 본댁은 화류계의 여성으로 인해 죽어 버렸다. 여기서 이 진주낭군이란 소리가, 위제록과 월정화로 인해 창출된 소리라는 것이 믿음이 간다. 우리 여인네들이 부르는 소리에는 남편이 바람이 나면, 그 대상이 화류계 여성이 아닌 첩을 상징하는 '시앗'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주라는 지역과 화류계 여인으로 인한 죽음이었다는 것이 진주낭군(진주난봉가)의 이야기다. 이렇게 허무하게 본댁이 죽고, 그나마 그 죽음을 보고 진주낭군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으로 소리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미 죽고 나서 후회를 한들 무엇 하리. 아마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을 면해보려고 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할머니들이 들려주시는 대반전의 소리

 

그런데 이 진주난봉가를 뒤집는 소리가 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다니. 한 마디로 소리의 극치란 생각이다. 이 소리는 진주낭군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진주난봉가처럼 사설도 많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할 말을 다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화류계 여성이 아닌 '시앗'이다. 그 시앗에 미쳐 진주낭군이 돌아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댁은 날마다 모시삼기를 하고, 베를 짜면서 날을 지새운다. 그러다가 편지를 한 장 받았다는 것이다.

 

주야공산 긴긴밤을 전지바탕 마주보고

무릎일랑 걷어제쳐 뽀둑비벼 삼은모시

서울님을 줄것인가 진주낭군 줄것인가

오동잎이 누러질때 감골낭군 줄것인가

편지왔네 편지왔네 진주낭군 편지일세

한손으로 받아들고 두손으로 펼쳐보니

시앗죽은 편지고나 옳다그년 잘죽었다

고기반찬 비리더니 소금반찬 고습구나

 

한산 모시관을 찾아가면 직접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서방인 진주낭군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그 밉상이던 시앗이 죽었다는 편지다. 그래서 고기반찬도 맛이 없던 시집살이가, 소금반찬까지도 고소해졌단다. 참 시앗이 무엇인지. 그 시앗이 죽어 시집살이가 좋아질 것이란 기대와 함께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이 정도면 우리소리의 멋이 무엇인지 알만하다.

 

세태가 변하면서 퇴폐산업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여인들은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은근히 걱정을 하기도 한다. '우리 남편도 나가서 저런 짓을 할까?'라는 걱정 말이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들어보면 그 걱정하던 속이 확 풀린다. 그래서 지난 세월,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이 참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한 소리로 진주낭군의 본댁은 한풀이가 되었을 것이다. 여인들은 그런 맛에 산다. 시앗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요즈음도 시앗을 보는 간 큰 남자들이 있으려나

전남 무안군 심향면 유교리 698에 소재한 나상열 가옥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67호이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천석지기의 집’ 이라고 부른다. 천석지기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농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부의 척도를 알았다.

나상열 가옥을 찾아가 보았다. 약 90여 년 전에 지은 안채와 일제 때 지은 창고, 그리고 문간채와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상열 가옥은 전체적으로 3단의 구조로 축조되었다. 맨 위에는 안채가 있고, 계단을 내려 맞은편에 창고와 중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맨 아래편 3단에는 대문과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호답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예전의 건물에서 사라진 부분이 있는 듯하다.


대문도 창고로 사용한 부호의 집

나상열가옥의 대문은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다. 커다란 대문을 갖고 있을 경우, 그 양편은 문간채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높고 큰 나상열 가옥의 대문은 다르다. 문 앞과 안 편이 모두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담벼락 위에 낸 들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 등이 이것도 곡식창고로 이용했음을 항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에는 여기저기 곳곳에 곡식창고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천석지기의 집에는 다양한 창고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대문에 붙은 창고는 원 곡식창고에서 곡물을 밖으로 운반하기 전에 사용한. 중간 창고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행랑채는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나 있다. 이곳도 너른 광을 만들고 그 한편 구석에 방을 들여 놓았다. 너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를 한 형태다. 나상열 가옥이 오밀조밀한 멋을 벗어나 시원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엌과 연결된 마루의 용도는?


나상열 가옥에서 눈에 띠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안채에 딸린 부엌이다. 이 부엌은 안쪽과 문쪽에 작은 방을 두었다. 아마 안채에서 일을 하는 집안의 부녀자들이 이용한 듯하다. 그런데 그 방 사이에 마루가 있다. 앞을 문을 단 것으로 보아 대청은 아니다. 마루방의 한편에는 벽에 붙여 계단식으로 짠 것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그곳을 부엌에서 사용하는 용기를 보관하는 곳인가 보다. 집에서 일을 하는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테니, 그만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용기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용기를 보관하기 위해, 부엌과 방 사이에 별도로 장식장처럼 꾸며놓았다. 그런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마루방을 만들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지은 셈이다

안채 뒤편에 있는 석빙고

나상열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집안에 석빙고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축대 안에 만들어 놓는 석빙고는 많은 인원이 기거하는 절집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음식을 만들 때도 많은 양의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그 많은 양의 음식재료를 날마다 사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안채의 뒤편에 굴을 파고 석빙고를 만들었다. 이 석빙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적당한 숙성까지도 도왔을 것이다. 결국 이 집안의 음식은 항상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물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의 정체는?

우물에는 도르래를 달아서 사용을 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물의 사용양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음식을 조리하는 집안 아낙네들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사용하는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물의 양편에 기둥을 세워 도르래를 달았다.


우물을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물 안에 등나무와 같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왜 이 안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저 나무는 어떻게 저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고, 언제부터 저렇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무성한 잎이 싱싱해 보인다. 그 밑에는 물이 있다는 소리다. 나상열 가옥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반전의 미학, 아름다운 돌담장

집안의 전체를 돌담장으로 쌓은 나상열 가옥. 그래서 전체적으로 무거운 집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또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하나는 담장의 한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안채를 보고 좌측의 담장 앞으로는 계단이 아닌 비탈로 조성을 하였다. 곡식을 나르기 위한 수레가 다니던 길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너른 대지위에 시원하게 조성된 나상열 가옥에서, 정감이 가는 유일한 축조물이 바로 돌담장이다. 이 담장은 담장에 붙은 대문과 행랑채까지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비탈로 여유를 부렸다. 천석지기 집이라는 나상열 가옥에서 보이는 전체적인 여유. 그것은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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