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1 외에 소재하고 있는 사적 제140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독산성은 선조 25년인 1592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 때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한다. 후에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과 20년인 1796년에도 다시 공사를 하였다.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성내에 있어

 

독산성의 성내에는 전통사찰로 등록된 보적사가 자리하고 있다. 옛 암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해탈문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보적사 경내가 되고, 그 뒤편에는 세마대지가 보인다. 지금은 세마대라는 누각 한 채를 지어놓았다. 보적사는 삼국시대 독산성을 축성한 후 현재의 터에 전승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 22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때 재건되었을 것으로 전하는 약사전과 요사 3동이 있었다. 1987년 사적의 경관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증, 개축하였다.

 

 

독산성의 성 둘레는 3,240m이고 문도 4개소이나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이다.

 

독산성을 뒤덮은 잡풀

 

13일 오후, 독산성을 찾았다. 보적사를 둘러보고 난 뒤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독산성은 산 위에 축성을 한 산성이라 그런지 성벽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낮은 성벽으로 쌓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인지 모르지만 낮은 성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성벽을 타고 오를락 거리기도 한다.

 

 

사진을 촬영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독산성이다. 성은 지형에 따라 대문지와 암문, 그리고 치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 성벽 위로 걸으면서 보니, 성벽이 보이지 않는 곳이 상당부분이 있다. 도대체 어디가 성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성벽 주변으로는 넝쿨로 자란 잡풀이 무성하고, 그 넝쿨식물들이 성벽으로 타고 올라 성을 모두 덮어버리고 있다.

 

암문 앞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그나마 암문 입구에는 나무까지 자라고 있다. 암문을 접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명색이 사적으로 지정이 된 문화재인데, 어찌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일까? 성이 낮아 사람들의 손으로 성벽을 가득 덮은 잡풀을 얼마든지 정리를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성벽에 가득한 잡풀 걷어내고 관리해야

 

여기저기 쓰인 우리 모두 문화재를 보호합시다-오산시라는 푯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것은 성이 아니고 잡풀더미라고 표현을 해야 맞을 듯하다. 여름철에 비가 내려 잔뜩 자라버린 잡풀들이, 온통 성벽을 타고 올라 성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보적사가 자리한 주변에만 성이 깨끗하게 보인다. 높지도 않은 성벽에 가득한 잡풀들. “이렇게 문화재를 관리하면서 무슨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하지”, 성을 돌던 관람객의 푸념어린 소리이다. 한 곳의 치에는 누군가 휴지까지 버려 볼썽사납다.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런 모습으로 휴일을 맞아 독산성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과연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할 수가 있을까? 관련 지자체의 반성이 아쉽다.

 

임진왜란과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찬탈해간 숫자는, 아직도 어림잡아 계산을 할 뿐이다. 그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그저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수보다 많을 것이라는 막역한 추측을 할 뿐이다. 2003년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과 열강이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합쳐 20개국에 모두 75,226점이라는 것이다.

 

그 중 일본이 가져간 것은 34,157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사를 할 수 있는 문화재의 숫자일 뿐, 실제로 고서화 등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문화재를 수탈해간 아픔의 흔적이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등록문화재’로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의 우리문화재 찬탈의 흔적

 

등록문화재 제182호. ‘구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이 건물은, ‘발산리 금고’라는 명칭으로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이 되었었다. 그 후 <군산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군산은 우리에게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한수 이북과 경기, 호남, 강원도, 그리고 충청권의 많은 소중한 문화재들이, 이곳 군산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간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런 일본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야한다고 주장들을 했지만, 그것도 우리 역사의 한 일면이라는 점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 아마도 이런 문화재 찬탈의 장소인 창고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 사람들이 알게된다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창피한 과거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픈 역사를 갖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창피하다고 가리고 숨긴다면 그 아픔은 잊을 수가 있겠지만, 또 다시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마타니 귀중품 창고, 그 아픔을 보다.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그 우측 뒤편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일본으로 반출을 하기 위해 전라북도 인근에 있는 석조문화재들을 시마타니 농장으로 옮겨 와 보관을 한 것이다. 이 석조물들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학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3층의 창고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인 시마타니 농장의 귀중품 창고이다. 이곳 금고에 보관한 귀중품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재들이었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지은 농장의 금고이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장본인이다.

 

 

이 금고형 창고는 모두 3층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1층은 반 정도가 땅 속에 묻혀있어, 반 지하로 꾸몄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에는 층마다 좌우편에 작은 창을 내었는데, 철장을 지르고 그 겉을 철문으로 꾸민 이중의 문이다. 이렇게 창고 하나를 금고형으로 지어 놓은 것은, 그 안에 시마타니가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아픔이 있는 시마타니 금고

 

학교건물 쪽으로 난 이층에는 미국에서 수입을 했다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금고 안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 철제문이 달려있는 곳은 이중으로 건물이 지어졌던 것 같다. 금고 문 위로 보면, 벽에 건물을 잇대어 지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토록 단단하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서화나 도자기 등 창고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이 금고에 보관을 하고, 부피가 큰 석조물들은 야외에 두었다니 도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쇠창살 안으로 1층 안을 들여다보니 꽤 넓은 공간이다. 그 한편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층에 낸 금고의 문은 쇠사슬로 묶어놓아 안을 볼 수가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건물 외벽으로 난 창을 보면, 안으로는 창살을 대고 밖으로는 철제문을 달아 이중으로 보안장치를 했다. 그만큼 우리 문화재를 수탈해가면서 보호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국전쟁 때도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인민군들이 옥구지역의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재가 사라져간 곳. 그 주위를 돌면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당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어,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든다. 더구나 이 건물이 학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더 고맙다. 적어도 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차가운 날씨에 조그마한 짐을 실어 나르는 손수레 하나를 끌고, 이집 저집 앞에 쌓인 박스나 신문 등을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있는 어르신 한 분. 가끔 길가에서 뵈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기도 하지만, 제대로 인사 한 번을 하지 못했다. 날이 상당히 추워졌는데도 어르신의 걸음은 여느 날과 다름이 없다.

“날이 추운데 오늘도 나오셨네요.”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춥지 않으세요?”
“조금 춥기는 하네.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 해”

추운 겨울 날 여주 5일장에서 만난 환경미화원 김기성씨. 눈이 쌓였는데도 자신이 히야할 일이고, 남들이 불편할까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작 김기성씨는 몸이 불편했다.


어르신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인생

감히 어르신에게 왜 이렇게 추운 날 고생을 하시느냐고 물을 수가 없다. 비록 폐지를 줍고는 다니시지만, 어르신에게는 남들에게서 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히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요즈음 이렇게 폐지 등을 거두러 다니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늘었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힘든 것인지.

“추우신데 막걸리라도 한 잔 하실래요?”
“아녀, 그런 것 먹는다고 몸이 풀리지도 않을 테고. 괜찮아”
“따듯하게 입고 다니셔야죠. 바람이 찬데. 힘드시지 않으세요?”

질문을 해놓고도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춥고, 당연히 힘이 드실 것이란 생각을 왜 말을 하기 전에 미리 못하는 것일까?

“아녀. 얼른 볼일 보러 가. 괜히 바쁜 사람이 늙은이 걱정일랑 말고”
“예”
“난 괜찮아. 그래도 사는 것이 슬프지는 않아. 이렇게 움직일 수 있으니”

그 이상은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 추운 날 고생을 하시면서도, 사는 것이 슬프지가 않다는 어르신의 한 마디. 그 말이 심하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아직은 움직일 수 있으니, 힘든 세상살이가 슬플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약한 우리네들, 괜한 불평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장을 돌다가 만난 청소부 한 사람. 장애가 있으면서도 눈이 잔뜩 쌓인 날 눈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힘이 들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나에게 돌아 온 대답은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신이 치우지 않으면 금방 길이 눈으로 인해 막혀 사람들이 불편을 겪게 된다고.

자신의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런 분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낯 뜨거운 삶을 살지 않았는가 반문을 해본다. 아마도 세상에 불평만 늘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속 좁은 생각까지 해가면서 살아온 지난 날. 목장갑 한 켤레가 다 헤어졌는데도, 움직일 수 있으니 슬프지 않다는 어르신의 말씀.

오늘 참 나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대고 싶다. 심하게 질책을 하고, 심하게 아파하면서 반성을 할 수 있도록. 구부정한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저 어르신이 이 세상의 선지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 모습을 차마 담아내지 못한다. 그것조차 송구스러움에.


그동안 참 정신없이 글을 올렸습니다
사는 것도 빡빡한데 글쓰고 돌아다니면서 추천을 한다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런데 오늘 참 우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터킨터님의 블에 갔다가
김홍기님께서 블로그를 접겠다는 소식입니다.

문화블로거인 김홍기님은 저 역시 글을 보면서 늘 감탄을 하던 분입니다
그런 문화블로거 한분이 글을 접겠다는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몇분 되지도 않는 문화블로거 중 한 분인데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저도 오늘은 반성의 날로 삼겠습니다
글을 하루 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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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동안 세상을 헛살았다는 반성을 해본다. 바람이 찬 방에서 괜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그동안 세상을 살아 온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만든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하는 대답이 맞을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을, 한 번도 내가 정말로 불효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매번 효가 어쩌고저쩌고 입만 벌리면 떠들어 대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얼마나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효를 깨우쳐주는 구례 화엄사 효대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 몇 번이고 찾아갔으면서도 반성을 하지못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를 하다니


날이 춥다. 이 추운 날에 괜히 날이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생각이다. 그 추운 날 부모님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보아서 늘 감싸주셨다. 그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주변에 지인들이 요즈음 왜 그런 말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었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가 보니, 그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든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오셨던 분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닥쳐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참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 하라는 것은 마다하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일만을 고집스레 해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였다고 하지만, 좋은 직장을 말 한마디 없이 그만두고 나와 방황을 한 것이 30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부모님은...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그토록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통곡을 한들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 통곡을 들어줄 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분들도 안계시니. 참 바보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렇게 때는 늦어버렸다는 것에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다.


음력으로 내일이면 한 해가 저문다. 늘 음력의 생활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2월 3일 설날이 오기 전인 내일이라도 아버님 묘역을 찾아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지난 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못이라도 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가지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생각이 아니다. 그저 몇 날이 남았거나 이제는 달리 살고 싶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로 인해 작은 상처라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잘못을 빌고 싶다. 올 한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다물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님께조차 불효를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허허로운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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