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원사, 8월 21일 대원사를 들리기 위해 찾아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운 길’이었다. 양편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여름이 지는 것을 아쉬워 하는 듯, 푸른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대원사를 품고 있는 천봉산은 해발 609m로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원사는 백제 무녕왕 3년인 서기503년에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 그 대원사를 향해가다가 입구 못미쳐서 만난 정자 하나. ‘산앙정(山仰亭)’ 이름대로라면 산을 믿고 따른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자연을 믿는다거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듯하다.




내에 놓은 돌을 밟고 건너다

정자는 어디나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한다. 이 산앙정이란 정자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대원사를 들리는 많은 차들이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지나치고 있지만, 내 건너에 숨죽이듯 자리한 정자는 그런 것에는 아예 무관한 듯하다.

길가에서 정자를 찍다가 내를 건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가까이 기 보고 싶어서이다. 천봉산 계곡을 흘러내린 맑은 물이 앞으로 흐르는 넓지 않은 내(=川). 그 한 곳에 돌로 징검다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돌을 조심스럽게 밟아본다. 생각 밖으로 튼튼하다. 누군가 이 돌을 밟고 내를 건너 정자에 오르기 위해 마련을 한 듯하다. 이런 마음이 바로 정자를 오를 수 있는 심성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그저 있는 듯도 없는 듯도 한 정자

산앙정은 길가에 서 있지만, 특별하게 눈에 띠지 않는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그리 숨어 있다. 길가에 서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정자이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으로 꾸몄다. 정면 중앙에 댓돌을 놓고, 그 외에는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우계(遇溪)’ 정자 안에 걸린 많은 현판 가운데 눈에 띠는 편액 하나가 있다. 바로 우계라고 쓴 편액이다. 정자 앞으로 흐르는 내를 그려낸 듯하다. 우계, ‘만나는 냇가’ 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뜻 안에는 ‘때를 기다리는 곳’. 혹은 ‘회합을 갖는 곳’이란 뜻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이 때를 기다리며, 회합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속내가 내내 궁금하다.



산앙정, 아마도 물을 건너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연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득한 세상에 대한 불신을, 저 천봉산 계곡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에 씻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지붕 위에 가득 솟아난 풀들이 그저 무심한 세월을 그려내는 듯하다. 누군가 곁에서 한 마디 한다. 저렇게 풀이 많이 났는데 관리도 안 한다고. 그 사람을 보고 한 마디 한다.

“그도 자연이라니 그냥 냅두소. 오죽하면 정자 이름이 산앙정이겠소”

합천 해인사, 가야산에 있는 삼보사찰 중 하나인 법보종찰인 해인사에는 볼 것이 참 많다. 물론 내가 볼 것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문화재를 말한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석등과 석탑을 열심히 찍고 있는데, 대적광전 안에서 들리는 염불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강원에 있는 학인승 등 백여 명이 함께 하고 있는 염불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그런데 그 예불을 하는 동안 법고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사시예불 후미에 종각에 있는 사물을 울려 공양을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관을 놓친 것이다. 사시예불의 소리 공양을 올린다는 사물은, 범종과 법고, 그리고 목어와 운판을 울려 소리를 내는 것이다.


벼르고 갔는데, 소리공양을 놓치다니

법고 소리가 난다는 것은 이미 목어와 운판의 소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허겁지겁 사진을 찍고 종각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모여 있다. 소리공양을 보기 위함이다. 이미 법고도 끝날 때가 되었다. 사실은 이것을 찍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정발 필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학인승 한 분이, 법고 앞에 발을 나란히 딛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북을 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으로 얼른 다가가 카메라에 담았다. 절을 들어서면 그 입구에 종루나 범종루, 범종각 이라 쓴 누각이 있다. 어느 곳에는 종만 달린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곳에는 사물을 다 달아놓은 곳도 있다. 물론 해인사에는 사물이 다 걸려있다. 그런데 그 사물공양을 하는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사물의 의미는 하늘과 땅, 물을 상징해

사물을 울려 공양을 하는 것은, 그 소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생명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을 울림으로써 잠든 영혼을 깨우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범종을 울리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음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세상의 모든 생명이 깨우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침에는 28번을, 저녁에는 33번을 울린다. 법고는 군중을 모으는 불구로 이용을 하던 것이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듯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법고를 치는 것은 북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 듯,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불법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고 있다. 발을 팔자로 딛고 두 손에 잡은 채를 이용해 법고놀이를 하는 학인승의 뒷모습이 반듯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반듯한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그 사물의 모든 것을 깨우치려나?

그나마 소리조차 놓친 목어와 운판은 물과 하늘에 사는 생명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조각한 것인데, 복판을 파내어 그곳에 채를 집어넣고 친다. 구름모양의 철로 만든 운판은 하늘에 사는 생명을 위하여 치는 것이다. 목어는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듯, 언제나 잠이 들지 않고(물론 정신을 말한다), 용명정진하라는 뜻도 갖고 있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결음을 멈추어라


현인 선생의 노래이다.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사찰의 종소리이다. 그 은은함에 빠져들면 세상 모든 고뇌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공양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마지막 부분만으로도 귀가 깨끗해진 듯하다. 세상 모든 생명이 다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소리공양을 들었으니. 하지만 또 다시 돌아서면 세상의 소리에 젖고 말 것을. 언제나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려는지.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문화재 답사, 남들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보람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는 공감이 된다. 하지만 보람 이전에 어떤 사명감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그리고 우리 문화재의 온전한 보존을 위한, 두 눈 부릅뜨고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아마 이런 것이 그 안에 함께 할 것이다.

우선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은 것은, 시간과 경비의 조달일 것이다. 시간은 틈을 내어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경비는 늘 발길을 무겁게 만든다. 답사지에 가서도 숙소에 컴퓨터가 있는 방을 들어가려면, 웃돈을 더 내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하고, 먹고, 자고, 거기다가 음료라도 마시는 날에는 두둑하던 주머니가 곧잘 비어버린다.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몇 시간이 산행도 감수를 해야한다. 카메라의 무게만 해도 버거울 때가 있다.

날씨가 발길을 무겁게 해

답사를 하다가보면 가끔은 헛수고를 하는 일이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지리산 천년송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정작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얼음이 얼어 차량이 통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곳과 마애불을 찍기 위해 참으로 벼르고 또 별러 찾아간 길인데, 맥이 다 빠져버린다.

일기가 사람을 참으로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여름과 겨울에는 사전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서기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많다. 할 수없이 발길을 돌리기도 하지만, 마음은 내내 씁쓸하다. 거기다가 산 길을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비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인근에 커다란 바위라도 있으면, 조금이라도 비를 피할 수가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도 받아

카메라가 비에 젖으면 낭패이기 때문에 비가 뿌리거나 눈이 내리면, 카메라를 옷 안으로 넣고 다녀야만 한다. 그러면 불룩 나온 배가 이상하게도 보일 것이다. 몇 번인가는 불심검문을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가가 없는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배에 무엇인가 불룩하니 넣어갖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우리나라 주민들의 신고정신은 가히 일품이다. 그런 날은 십중팔구는 신분을 확인시켜주어야만 한다. 그래도 요즈음은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많이 좋아진 셈이다. 그래도 중단을 할 수 없이 계속하는 것을 보면, 아마 천성적인 역마살이 맞는구나 싶기도 하다. 일기도 사람들의 시선도, 온 산과 들판을 누비고 다니는 나를 어쩌지를 못하는 것을 보면.


물 한 모금과 건강한 발은 답사의 생명이다. 이렇게 힘들게 다녀도 오해를 받는 일이 있어 맥이 풀린다.

“사진 찍고 간 후에 도둑을 맞았어요.”

어제와 오늘 답사를 하면서 정말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날씨는 바람이 불고 손도 시릴 정도였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보던 보지를 않던 그런 것은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제목만 보고 간다고 해도, 언제가 그곳을 들리면 ‘아! 옛날에 누가 이런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라는 생각만 해도, 난 성공을 했다고 자부를 한다.

오늘 고택답사를 하는데, 어떤 분이 밖에서 쫒아 들어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시면서 유심히 살펴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에 사시는 분이란다.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번에는 누군가가 조사를 한다고 와서 사진을 찍고 갔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다음에 도둑을 맞았어요. 집안에 있던 고서들을 잊어버렸죠.”

말씀을 들어보니,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보여주었는데, 그 다음에 그것을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도 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명함을 드리고 나서, 마저 사진촬영을 마쳤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에 제일 조심하는 것이, 바로 안채의 집안 촬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괜히 집안을 찍고 나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집안의 귀중품을 찍겠다고 부탁을 하지도 않는다. 집안에 잇는 것을 찍으면, 좀 더 세세한 글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내가 작고 소중한 것들을 촬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답사를 하는 것은 문화재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칫 남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날 추운 날 다녀 온 답사 길. 그래도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들고 왔으니, 당분간은 추운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래서 추위에 얼고, 오해를 받아도 답사는 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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