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 - 4에 소재한 이주국 장군 고택. 집안을 돌아보면 안채에 붙은 부엌과 광을 손본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민속자료를 넘을 그런 집이다. 꾸밈도 그렇고 집안의 조경 수법이나 채의 구성, 공간의 사용 등이 매우 뛰어난 집이다. 더욱 사랑채 하나만 놓고 본다면, 얼마나 고쳤는지는 몰라도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주국 장군 고택

 

이주국 장군은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다. 이주국(1721∼1798) 장군은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조선조 경종 1년인 1721년에 원삼면 문촌리 현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는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 터 등이 전한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정병하씨 소유의 가옥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자로 길게 늘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바로 꺾인 담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다. 이런 집의 형태를 볼 때 과거에는 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안담이 있고, 중문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안채는 좌측으로 퇴를 달아낸 건넌방과 세 칸의 대청, 안방 그리고 꺾인 날개채에 부엌과 광을 두었다. 현재는 날개채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은 부엌방으로 개조를 하고, 맨 끝에 광도 방으로 개조를 하였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안채의 망와(望瓦)에서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 造作)'이란 글씨가 발견이 되어 영조 29년인 1753년에 최초로 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다락방이 정말 좋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는 - 자형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앞에서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은 방과 마루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좌측의 맨 끝은 다락방과 부엌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방문은 모두가 이중의 겹문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문은 모두 범살창으로 구성이 되어 단조롭다.

 

사랑채는 청방을 전체적으로 놓고, 가운데 두 칸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툇마루가 끝나는 곳에 한 칸의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으로 올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툇마루에 접한 부분은 간단한 문이지만, 양편의 창문은 모두 띠살문 네 짝으로 달았다. 이렇게 띠살문을 달아 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다락방을 사랑채의 주인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양편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문. 이 다락방이 누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누정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만한 공간이다.

 

사랑채의 다락방 밑으로는 개방된 아궁이가 있고, 그 위는 다락이다. 그런데 이 아궁이 역시 특이하다. 한편 다락방의 밑이 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짜임새 있게 제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네 칸으로 꾸며진 사랑채. 앞쪽 끝의 다락방은 양편을 띠살문으로 했다. 정자의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문은 겹문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문은 범살창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아궁이 다락방 뒤에 다락을 두고, 그 밑을 개방된 아궁이를 조성했다. 다락방 밑은 광이다.

 

날개 잃은 공(工)자 형의 안채

 

안채는 ㄱ 자형의 집이다. 전체적으로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세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꺾인 부분에 두 칸의 부엌과 광을 들였다. 현재는 부엌과 광은 개조를 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특이함은 바로 이 안채의 구성에 있다. 건넌방의 앞으로는 반 칸의 퇴를 냈다. 높은 마루를 깔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 문 위에 편액이 걸려있어 다가가 보니 '사당방(祠堂房)'이란 글을 적었다. 안채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을 달아내어 사당으로 꾸민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묵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주국 장군의 후손들이 떠나고, 현재의 주인이 이 사당도 묵는 방으로 사용한 듯하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공(工)'자의 한 날개가 잘린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기단이 모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마감을 했다. 건물의 주춧돌도 마름모형의 다듬은 돌이다. 이런 기단이나 주추로 보아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지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문채와 사랑채는 손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높게 한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반칸을 달아내어 높은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드렸다.

 
안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칸을 달아낸 방이 있다. 방문 위에는 사당방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세칸의 넓은 대청. 기단이나 툇돌, 주춧돌 등이 모두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메주가 익어가는 집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돌다가 안채의 건넌방 옆으로 돌아가니, 벽 앞에 메주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청소를 잘 안 해. 시골집은 다 그렇지 머'라고 하셨는데, 이런 메주를 보니 정말 시골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무에 걸린 메주들을 보면서, 고택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정감이 가는 집들이 우리 가옥인데, 우리는 점차 생활의 불편함만 늘어놓으면서 멀리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나 시골스러운 모습이다. 건넌방 옆에 메주를 달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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