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에 소재한 송강정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4년 동안 지내던 정자다. 고서면 원강리 유신교차로에서 봉산초등학교 양지분교 쪽으로 조금 가다가보면 좌측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숲 위쪽에 자리를 한 송강정이 보인다. 이 정자는 원래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송강 정철이 지냈다 하여 송강의 호를 따서 송강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송강정은 1955년에 고쳐지었는데, 송강 정철이 선조 17년인 1584년 대사헌을 지내다가, 1585년 양사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였다. 송강정은 정철이 이곳에 내려와 지었다고 하니, 처음 송강정을 지은 것은 벌써 4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셈이다.

 

 

소나무 향이 짙은 송강정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솔향이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 올라본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 한 가득 소나무의 향이 가득 차는 듯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날아간다. 계단 위에 자리한 정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저 어느 고졸한 학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쉬어갈 만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그 유명한 <사미인곡>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대해, 다신 한번 정자를 훑어본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명종 16년인 1561년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지어냈다.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난 정철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이곳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고졸한 송강정은 숲을 해하지 않아

 

송강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규모로 꾸며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 송강정이라고 하기 이전에 죽록정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이름을 잊고 싶지가 않았는가 보다. 주추를 보니 동그렇게 다듬은 돌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기둥을 올렸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의 정면에서 보면 중앙 뒤편으로 한 칸의 중재실을 달아냈다. 아마 이곳에서 4년이란 세월을 묵으면서, 송강은 사미인곡을 집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앞으로 난 길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예전에는 저곳으로 소를 끈 농부가 지나고,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던 파발이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송강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임금을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

金入垂楊 玉謝梅(금입수양 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春水 碧於苔(소지춘수 벽어태) 봄 작은 연못의 물은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 誰深淺(춘수춘흥 수심천)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燕子不來 花未開(연자불래 화미개)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았는데.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인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달성이요,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최항은 그의 자형이다.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학문을 배은 서거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세종 26년인 144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인 1451년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인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45년간 6명의 왕을 섬긴 서거정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슬에 나아간 서거정은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세조 6년인 1460년에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과 시재를 겨루었다. 요동인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성종 7년인 1476년에는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성종 1년인 1470년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이 되고 달성군에 책봉되었다.

 

 

 

조선조 문인의 대표적 인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의 저술에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함께하였다.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와,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방이동서 이묘한 서거정의 묘

 

서거정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현재 봉담읍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도로변 우측,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번지에 소재한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0일 목요일 오후, 봉담읍에 소재한 서거정의 묘를 찾아보았다. 조선조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의 묘소 앞으로는 후손들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편에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었으며, 이 묘지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석은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썼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로 글자를 써넣었다.

 

 

 

축대 위에 지은 솟을대문의 앞에는 ‘전성문(展省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재실인 ‘염수재’가 있다. 염수재는 24평으로 염수재의 앞에는 ‘염수재기’를 적은 비가 놓여있는데, 비의 뒤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사가공 재실인 염수재는 서기 1976년도 이축하여 약 25년간 유지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오래되고 낡은 도가 지나쳐 고심하던 차에, 종산의 일부가 경부고속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그 보상금으로 1999년 3월에 옛 재실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실의 지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문호 서거정의 묘역

 

재실인 염수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히 비탈이 진 곳에 서거정의 묘를 맨 위에 둔 서씨일가의 묘역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서거정의 묘는 묘 앞에 세운 묘표와 좌, 우측의 문인석만이 옛 것이고, 남은 석물은 묘를 이전하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묘표에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서거정과 정경부인 선산김씨의 묘임을 적고 있다.

 

서거정의 묘로 오르는 길에 그 앞에 자리한 묘들을 보니, 봉분의 흙이 파이고 제대로 관리가 안된 듯하다. 서거정의 묘는 서울 방이동에서 이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묘를 이묘할 때 나온 묘지석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거정의 묘역은 당연히 화성시에서 관리를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근처의 공장 안내판과 함께 걸려있으며, 재실과 묘역 앞에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길가에 따로 서 있는 신도비의 앞에 퇴색이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묘소 안내문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의 묘역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대문장가요, 중국에서까지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서거정.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몰라라식의 처사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