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 희한안 일을 자주 보고는 한다. 어떤 때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릴 적부터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사회생활에서 문화재는 무엇이며, 우리가 문화재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정도는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것은 비일비재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문화재를 나무로 두드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발로 차기가 일쑤이다. 목이 달아난 석불이며, 국보나 보물의 벽에 가득한 낙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것일까?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본질적인 교육도 되어있지 않은 나라

문화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왜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말로는 우리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고 잘도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보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문화재 보호 점수는 빵점이다.

답답한 정도가 아니다. 고작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행위는 바로 꽁꽁 잠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다고 올바로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숱한 문화재들이 도난을 당한다. 요즈음 TV 광고에 보면 문화재 도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런 광고를 해야 할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우리네들이란 이야기다.

왜 기를 쓰고 좋은 학교를 가야만할까?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학원을 몇 군데씩 돌아야 한단다. 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 우리, 이런 말을 알기나 할까? 우리문화, 우리민족, 우리말, 우리글, 이런 것은 알기나 할까?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작금에 우리는 잊어도 너무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내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내가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폄하나 훼손이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명문. 기단석에 쓰여진 명문.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고 적었다

여기서 모하는 짓이야!

답사를 하면 여기저기 많이 다닌다.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똑 같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그냥 관람을 하는 사람의 세 배를 더 걸어야 한다. 그만큼 여기저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바쁘게 돌아다니는 날은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1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걷기도 한다. 그만큼 열심을 내지 않으면 문화재 답사는 의미가 없다.

문화재가 꼭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화재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산 속이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있기도 하다. 제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보물 제94호인 사자빈신사지석탑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덕주산성의 문이 보인다. 문을 촬영하려고 위로 올라가 보니, 누각의 문이 닫혀있다. 산성의 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조성된 사사자 상은 내 마리가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안에서 기척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남녀가 둘이 부둥켜안고 뒹굴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순간 화가 치민다. “이 사람들 문화재 안에서 지금 모하는 짓거리야?” 순간 두 사람도 놀랐는가 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그 안에서 둘이 사랑이라도 나누려고 했는지. 여자가 황급히 옷을 추스르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마침 밑에는 동행을 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도 얼굴이 벌겋게 변해 어쩔 줄 모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문화재 안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타일러 보내고 나니 기가 막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상식인지도 모른다.

빈신사지 석탑의 상층 기단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일행이 무슨 일인가 묻는다. 여자가 황급히 내려와 차를 몰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만다. 이런 황당한 짓을 한 사람들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TV광고로 아무리 문화유산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해보았자, 누가 그것을 눈여겨 볼 것인가? 어릴 적부터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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