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소재한 간월암. 물이 만조가 되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 작은 암자는,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던 중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암자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에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무학이라는 법호도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무학스님은 왜 이 작은 암자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간월암은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을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면서,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큰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도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의 도읍터를 잡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은 억불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절이 곤욕을 치렀다. 비록 무학대사가 조선의 개국에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억불정책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도 한때 폐사가 되었었다. 그 후 1941년에 이르러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월암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난 뒤, 다음 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니 간월암은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절인 듯하다.

 

추석 전에 찾아갔던 간월암

 

날이 덥다. 추석이 가까워진 가을로 접어든 절기인데도 불구하고, 한 낮 더위는 30도 가까이 오른다고 한다. 그 무더운 날씨에 서산 해미읍성을 오전에 돌아보고 난 후 간월암으로 향했다. 추석을 맞이하기 전에 무엇인가 간구할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이 하도 험난하다고 하니, 그래도 명절을 마음 아프게 보내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물이 빠진 간월암을 향했다. 828, 평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는 않았다. 대웅전을 들린 후에 모처럼 바다면에 붙여 지은 용왕각 앞에 섰다. 한 낮의 따가운 햇살에 덥혀진 바닥에 서니 발바닥이 뜨겁다 못해 댈 것만 같다. 그래도 이곳에 서서 한꺼번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의 아픔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다.

 

무학스님이 그랬고 만공선사가 그랬다. 한 사람은 나라의 개국을, 한 사람은 나라의 광복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간절함을 보이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시신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이다. 뜨거움을 참고 겨우 삼배를 마친다. 참기 힘든 발바닥의 뜨거움이 머리 위에서 땀이 흐르게 만든다.

 

 

이 작은 암자도 찾아보지 않은 시간동안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해 728일 이 작은 암자를 찾았을 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각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빈자리는 시원하게 바다가 보여 암자 경내의 경관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무엇인가 하나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매년 한 번씩은 거르지 않고 찾아간 간월암이지만, 이번 답사 길은 마음이 남다르다. 세월호라는 커다란 아픔이 이곳으로 향하는 발길을 편치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녀온 지 10여일이 훌쩍 지났다. 앞으로 간월암을 다시 찾을 때는 가슴 아픈 사연은 털어버리고 기분 좋은 발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찾아가기도 쉽지가 않다. 도로 이정표에 적혀있는 사찰명 하나만을 갖고 찾아 나선 절이다. 백련사,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가실리 신43번지. 주소를 알았다고 하면 내비게이션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절이었지만, 그저 이정표의 화살표 방향만 보고 따라갔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용인 에버랜드를 지나 도로로 마장IC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가다가 또 다시 오래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아마도 거의 산길을 3km 정도를 돌아 돌아 찾은 것만 같다. 일반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판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 백련사는 그렇게 심산유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 애장왕 2년에 창건한 백련사

 

백련사는 용인시 전통사찰 제54호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 1791년 석담대사가 쓴 약사에 보면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선응선사에 의해서 창건된 고찰이다. 고려 경종 원년인 1399년에 천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태종 4년인 1404년에 무학대사가 중건하면서 18 나한상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현종 12년인 1671년과 정조 11년인 1787년에 수경스님과 석담 스님에 의해 각각 중건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 18년인 1891년에 편찬된 용인현 읍지 사찰조에 백련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거의 폐사가 되었던 백련사는 청신녀 청정월의 화주로 요사와 법당을 중수하였고, 성월스님의 중창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불상 1구와 조선후기 나한상 13, 수경스님의 부도 등이 남아있다. 당우로는 대웅전, 산신각, 나한전, 요사, 종각 등이 있다.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해

 

주차장에서 백련사의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앙서부터 위까지 3층으로 된 전각은 방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수행을 하기 위한 방으로 보인다. 그 전각의 중앙으로 경내의 삼층석탑의 상륜부가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종각이 있고, 앞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우측 조금 위로는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좌측으로는 지장전이 있다. 그리고 지장전 좌측으로 소대와 조금 떨어져서 나한전이 자리한다. 나한전은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기와와 황토를 이용해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나한전 앞에서 절 경내를 내려다본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석가모니불의 진신 사리탑이라고 한다.

 

절을 들어가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치고는 대웅전이 큰 편이다. 창호는 꽃창살로 조성을 해 아름답다. 나한전 앞은 유리로 막아놓아 안이 들여다보인다. 수미단의 위에는 작은 나한들이 여러 형태로 좌정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한상들이 조선후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커다란 사자를 닮은 개 한 마리가 마당에 앉아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영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자세이다. 절에서 오래 살다가 보니 해탈의 경지라도 이른 것일까? 축대 밑에 있는 샘에 가서 물 한 잔을 떠 마신다. 내장까지 다 시원해진다.

 

이렇게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절의 물이니 얼마나 그 맛이 좋을까?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이 물이야말로 정말 깨끗할 것이란 생각이다. 고즈넉한 고찰에서 마시는 물 한 대접. 이 물로 인해 세상에서 묻힌 허물을 조금이라도 가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저 이런 절에서 며칠만 살 수만 있다고 해도 세상 시름을 다 놓을 것만 같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영탑사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마애불이 있다. 원래는 연화봉 자연 암반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던 것이었는데, 유리광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보존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새겨진 그대로였다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전각이 마애불의 멋스러움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마애불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질병과 함께 무지(無智)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님이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고려말기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영탑사 마애불

 

영탑사 마애불은 무학대사가 조성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도읍터를 찾고 있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바위에서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고. 이를 이상히 여긴 대사는 이 바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악사여래 마애불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지막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얼굴은 윗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름해진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라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영탑사 마애불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무학대사님 조각 실력이 영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련되지는 못했으니 친근한 마음이 들어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을 하였다. 그런 조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유형의 마애불은 고려 말기 이 지역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인근 바위와는 다르게 하나의 산처럼 생겼는데, 마애불은 근엄한 부처이기 보다는 친근함이 드러나는 형태이다.

 

그리 크지 않은 암벽 면에 조각을 한 탓인지, 몸은 사각형으로 건장하나 움츠린 듯한 느낌이 든다.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낸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께는 V자 형으로 되어있어, 유려하지가 않다.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오랜 세월동안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고쳤다고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어! 여기 마애불 사진이 또 있었네

 

영탑사 마애불을 답사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잘 못 만졌는가 보다.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답사를 하면, 문화재 한 점을 30~40장 정도를 찍는다. 물론 고택 등을 답사할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찍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세세하게 찍어 온 사진이 온데간데없다. 마애불을 촬영하면 모든 부분을 세세하게 찍어오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몇 시간을 땀을 흘리고 마음을 졸이면서 카메라를 만져보았지만 단 한 장의 사진밖에 눈에 띠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몇 장이나 되는 사진이 보인다.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나, 이 사진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전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단 한 장의 사진 밖에는 보이지가 않았는데 정말 희한하다.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지만, 이렇게 이상한 일을 당한 마애불이다. 영탑사 마애불이 그래서 더 영험한 것은 아닐지.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붙였다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간월암이 처음부터 간월도나 간월암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 조선이 개국할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끔을 해몽하면서 이미 이성계가 태조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조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터를 바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조 때 배불정책을 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가는 알고 있는 바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그리고 이성계에게서 두 곳의 섬을 사폐지로 받은 무학대사. 하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배불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무학대사가 토글을 짓고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개국이 되는 것을 도왔지만, 그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이 폐사가 되었다. 아마 조선의 왕이 28대를 전해 질 것을 알았다는 무학대사인데, 간월암이 훗날 당한 고초를 알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광복을 의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 절에 기운이 남다른 모양이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간월암

 

삼사순례,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불교의식이다. 7월 28일(일)아침 일찍 버스로 수원을 출발했다. 수원시 지동에 소재한 고려암의 신도들이 삼사순례를 떠난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막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오늘 들릴 세 곳의 절에 나름 문화재가 많이 있어 기대를 하고 떠난 길이다. 홍성 나들목으로 나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간월암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데도 바닷바람이 조금은 세찬 듯하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몇 번이고 날아간다. 그래도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간월암은 조수의 차에 의해 섬도 되었다가, 육지와 연결이 되기도 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물을 빠진 길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바위에 붙은 것들을 열심히 줍고 있다.

 

간월암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시예불 중이다. 작은 섬 위에 옹기종기 앉은 전각들이 정겨운 곳. 벌써 몇 번째 이곳을 찾았지만, 올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주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살 때문인 듯하다. 잠시 예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쪽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 앞에서 열심히 잘을 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신통력이 절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은 전각이 바다 쪽으로 조성을 한 것을 보니, 용왕각인 모양이다. 열심히 절을 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썰물처럼 간월암을 빠져나간다. 나오는 길에 절 입구에 사람들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돌탑을 정성으로 쌓은 사람들도 마음에 다 서원이 있었을 것. 나도 잠시 고개를 숙여 행로의 무사함을 빌어본다.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들음 을 얻었고, 그 이전에도 이미 피안사라는 절이 잇었다고 하면, 간월암의 역사는 500년이 훌쩍 지난 고찰이다. 하지만 옛 흔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월암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절집이 있으니,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에 소재한 신륵사. 경기도내의 절 중에서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이다. 이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은, 보물 제231호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곳에는 보제존자의 석등과 석종, 그리고 석종 비가 한 자리에 모여있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말한다. 석등으로 오르기 전 신륵사 조사당에는 나옹화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臺下江流百丈聽. 當年說法句紳聽.(대하강류백장청. 당년설법구신청).

川女朱下方丈實. 龍王惹參蓮花經.(천여주하방장실. 용왕야참연화경).

동 아래 강물은 일백 장으로 맑구나. 당시 설법하면 귀신이 와서 들었다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지.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한 나옹화상.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 이었다,

 

 

이무기를 조각한 아름다운 석등

 

6월 17일(월)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신륵사를 찾아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조사당을 거쳐 뒷산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른다. 오후의 시간이라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그런 것이 대수이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더위도 잊게 만든다.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 답사를 계속할 수 있는 가보다.

 

석등은 그리 크지 않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입적을 한 후 세웠다고 하니 700년 가까운 새월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의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비천상과 함께 화사석에 새긴 이무기. 화사석을 들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이다. 비천상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얼굴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날리고 있는 복대를 보고 있자니, 곧 석등을 뛰쳐나와 하늘로 오를 듯한 기세이다.

 

석등은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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