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러나 그 문화재들을 다 찾아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데만 무려 20년이 걸렸다.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런 긴 세월동안 난 길바닥에 서 있었다.

오늘 그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이 가을에 보여주고 싶은 곳들이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가본 곳 중 그래도 이 가을 날 한 번 쯤은 찾아주기를 바라는 곳이다. 이 문화재들은 모두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정했다. 다만 마애불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산 위에 있는 것을 소개하지만. 올 가을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찾아보기를 권한다.


(정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정자 무진정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고택) 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명성황후 생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10월 24일,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천연기념물) 작가들이 찾는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이맘 때 쯤이면 꼭 가보는 곳이 있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지나가던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애불) 제작시기가 분명한 함안 방어산 마애불

불교유적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데는 그 생김이나 재질, 모습의 특징 등을 보아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 그래서 불교유적의 제작시기를 대개는 몇 세기경이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불은 유일하게 그 제작연도를 새겨놓아, 통일신라 불상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널직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마애불.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 산중에 도대체 왜 오랜시간 공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 선 하나 하나를 파면서 스스로 피안의 세계를 그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방어산 마애불의 조성년대는 신라시대인 801년이다. 중앙에 본존은 약사여래이며, 좌, 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새겨 넣었다. 왼편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이며 오른편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그려진 여성상이다.


(산성) 태조의 어진을 피신시키던 위봉산성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석탑) 통일신라 석탑의 백미 정혜사지 석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 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 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 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계절이 따로 없는 정자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이러한 조삼선생이 노후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찾아오는 동료들과 강론을 하고자 지은 정자무진정. 무진정을 찾아갔을 때는 앞으로 조성한 연못의 바닥을 고르기 위해, 몇 대의 중장비들이 연못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는 적은 섬을 만들어 ‘영송루’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으로 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연못에 걸린 다리를 지나, 잠시 ‘영송루(迎送樓)’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라면 이곳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또한 달밤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송루를 지나 커다란 고목을 끼고, 돌아 오르는 다리를 마저 건넌다.

‘정말 절경이다’ 감탄이 절로 나와

무진정을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예전에야 상당한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오르는 계단 주위로는, 푸른 대가 아직은 찬바람을 맞아 잎이 부딪쳐 바스락거린다. 작은 일각문 하나가 손을 맞이한다. ‘동정문(動靜門)’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문이란다.




마치 선 문답을 하듯 한참이나 속으로 그 뜻을 되뇌어 본다. 무슨 뜻으로 이런 일각문을 달아놓았을까?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무진정은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앞에서 보니 정자 가운데에 방을 드렸는데,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이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고, 정면을 뺀 삼면에는 창호를 달아냈다.

무진정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창호들이다. 삼면의 창호를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고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문을 모두 닫아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날이 좋으면 모든 창호를 위로 열어. 바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정자

정자의 기둥 위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다. 축대를 쌓은 돌도 장대석이 아닌 자연적인 돌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인 정자들이 보이는 양반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로 올라본다. 조금은 찬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정자 가운데 있는 방의 문도 좌우 문을 위로 달아 놓게 되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정자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생전 선생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하지를 않았을까? 그저 모든 일에 답답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들고 온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과연 무엇일꼬?’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