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여 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친 팔달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꾸민 팔달문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414일 오후에 팔달문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그 바람으로 인해 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촬영을 하느라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팔달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사 실명제 석판이 가장 뚜렷해

 

196493일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그동안 갑갑하게 공사 때문에 가려져 있던 팔달문이, 모든 공사를 다 마치고 말끔하게 새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 옹성 쪽으로 나가다가 문의 겉 벽면에 있을 공사실명제 판을 찾아보았다. 이 실명제 판은 4개문에 다 있지만, 장안문은 6.25 때 폭격을 맞는 바람에 깨어졌다고 한다. 대신 그 내용을 적어 옹성 안에 비로 제작을 해두었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문 벽에 있는 실명제 판에는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등 85의 기술자가 팔달문의 조성에 참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꿀이 흘렀다는 팔달문

 

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때 사용하는 비녀이다. 그 크기만 해도 팔달문의 장엄함을 알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옹성의 벽을 바라다본다. 참 단단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양편의 성곽이 끊어져 아픔을 더하고 있지만, 그 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옹성의 문이 삐그닥거린다. 만일 그 소리를 과거에 적들이 들었다고 하면, 그 소리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만 같다. 함께 팔달문의 구경에 나섰던 김우영 e수원뉴스 주간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어디쯤인가 성문 벽에서 무엇이 흘러 내렸데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달았다는 거예요. 성돌을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해요

 

팔달문은 생명을 살리는 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던 곳. 팔달문 앞의 장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장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 있어, 꿀벌조차도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공사를 마치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팔달문. 주변을 돌아보다가 보니, 성문 벽 밑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도 생명이 그것에서 움튼 것이다. 비록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온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달문, 팔달문을 자랑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은, 새롭게 치장을 한 팔달문을 만났다는 감흥 때문이다.

태백시 통리와 신리의 중간지점인 도계읍 심포리 남쪽 산 계곡에는, 미인폭포라 부르는 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심포리 우보산 계곡에서 발원하는 하천수가 절벽을 타고 내리면서 생긴 폭포다. 주변은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된 역암층으로 깊이가 270m 정도 파여 들어갔다. 이 미인폭포가 있는 곳은 해발 700m 정도의 고산지대인데, 온통 주변 암벽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주변의 돌들은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 진흙으로 굳은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폭포로 내려가는 길에 여래사라 불리는 절이 있다. 내리막의 경사가 60도 이상이나 되는 가파른 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내리막 길이 질척거리는 것이 여간 미끄럽지가 않다. 여래사 대웅전 앞을 지나 다시 경사진 비탈을 내려가야 미인폭포 밑에 도착한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출생하는 곳

 

여래사부터 미인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미끄럽기가 더하다. 나뭇가지와 돌들을 붙들고 엉금거리며 내려가 겨우 도착한 미인폭포. 떨어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모두 삼단으로 구분이 된 이 폭포는 마치 사람의 얼굴과 몸, 그리고 치마폭을 연상케 물이 낙수진다.

 

 

 

이 폭포의 인근 지역은 미인들의 출생지로 알려지고 있다. 왜 이곳에 미인들이 많이 태어나는 것일까? 고산지대라 맑은 청정지역이고, 더욱 물이 오염되지 않고 맑아서 일 수도 있다. 이 미인폭포에는 슬픈 전설 한 대목이 전하고 있다.

 

「예전에 이 근처에 미인 묘가 있는데, 이 묘의 주인은 아름다운 여인의 묘라는 것이다. 한 미인이 나이가 들어 출가를 했으나, 남편이 일찍 사망을 하였단다. 미인은 혼자 살지를 못하고 재가를 하였으나, 두 번째 남편마저 죽고 말았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그 미인은 자신의 팔자를 탓하다가 이 폭포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인이 또 다시 남편감을 찾아보았으나, 사별한 남편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비관을 해서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 뒤에 이 폭포를 '미인폭포'라 불렀다는 것이다.」

 

중간 낙수 지는 곳에 무지개가

 

아름다운 여인이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고 죽어서인가? 물이 떨어지는 중간에는 무지개가 흩어지고 있다. 물에 햇볕이 반사되어 만들어지는 무지개가 왜 저리 흩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오래도록 남정네들의 눈길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구름이 끼는 날이면 더욱 신비한 풍광을 만들어낸다는 미인폭포. 일몰 전과 일출 전에 이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요, 찬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도 한다.

 

미인폭포를 올려다보며 수많은 생각을 해본다. 저 위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을 때, 그 미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또 다시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 폭포의 이름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여름 장마가 그치고 나면 장관이라고 한다

 

 

폭포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길은 더욱 힘이 든다. 자칫 한발만 헛딛어도 저만큼 밀려 내려갈 판이다. 겨우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 대웅전 앞에 오니, 비구니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아마 천도제라도 있는가보다. 대웅전 댓돌에 많은 신발들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니. 미인폭포로 인해 여래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 것 같다. 대웅전 앞에서 미인폭포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고, 발길을 돌린다, 석양에 물보라가 더욱 아름답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의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코,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밑에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12월 6일, 봉녕사에서는 큰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되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묘엄명사의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한 사람들로 인해, 각 전각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틈에도 문화재를 답사하겠다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촬영을 한다.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큰 스님의 다비식을 맞아 찾아간 봉녕사. 많은 사람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고 나오면서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저 삼존불의 원력이 있어 이렇게 큰 비구니스님이 득도를 한 것이나 아닌지. 삼존불 촬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봉령사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1번지 천성산에 소재한 홍룡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원효스님께서 창건했다는 절이다. 당시에는 ‘낙수사(落水寺)’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원효스님께서 천문을 보니 중국 태화사 승려들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미리 알고 구했다고 한다.

원효스님은 곁에 있던 판자를 하늘로 던졌는데, 그것이 당의 태화사까지 날아갔다는 것이다. 태화사 스님들은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져 놀라 뛰쳐나왔는데, 그 순간 산이 무너지면서 절이 매몰이 되었다는 것이다. 놀란 태화사 승려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판자를 집어보니 ‘해동원효 척판구중’이란 글씨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즉 원효스님이 널판자 하나를 던져 많은 무리를 구했다는 이야기다.

홍룡폭포와 관음전

천명의 승려가 원효의 제자가 되다

이 일로 인해 천명의 중국인 승려가 신라로 와 원효스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원효스님께서는 천성산에 89개의 암자를 짓고, 이 승려들을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곳 홍룡사에서 바로 판자 한 조각을 던졌다고 하는데, 홍룡사는 원효스님과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홍룡사에는 홍룡폭포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 폭포는 천룡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홍룡폭포를 찾아 홍룡사를 찾아들어갔다. 산신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홍롱폭포가 보인다. 80척에 달한다는 폭포는 물이 많이 즐었다. 폭포 좌측으로는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고, 우축으로는 좌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천자형으로 흘러내리는 홍룡폭포

세 갈래로 나뉘어져 떨어지는 홍룡폭포,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가히 절경이다. 물이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물이 없다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로 가겠는가? 떨어진 물이 고인 소에는 낙엽이 떨어져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어찌 인간세상에 이런 절경이 있을 것인가?

이리저리 각도를 재보지만, 그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무엇을 탓할 수 있으랴? 지금도 날이 좋은 날에는 물방울이 튀면서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잔뜩 흐린 날 찾아간 홍룡폭포는 그렇게 소리 없이 암벽을 타고 내리기만 한다.



원효스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관음전에 들려 예를 올리고, 돌아내려오는 길에 몇 번이고 폭포를 돌아본다. 그저 저 맑은 물속에서 한 마리 천룡이 금방이라도 물길을 헤치고 하늘로 오를 것만 같다. 아마 이 아름다움은 또 몇 날 동안 나를 답사의 길로 내몰 것만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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