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고려 초에 해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절에는 대웅전 등 많은 전각들이 국보나 보물, 혹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민가와는 달리 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각 등의 훼손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 충실한 보수로 인해, 그 본모습을 지켜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소재한 석남사의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아도 소중한 문화재

석남사 영산전은 딴 전각에 비해서 크지가 않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전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은 돌 축대를 쌓고, 돌로 쌓은 돌담으로 앞을 둘렀다. 그리고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이 영산전은 지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폐허가 된 것에 비해, 이곳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석남사는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영산전 뒤로 높여놓았다. 그러나 영산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산전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형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추로 사용했다는 점이나, 그 위로 올린 민흘림기둥의 일부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큰 보수 없이 보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전 앞의 석탑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게단 양편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고려 말기의 탑으로 보이는 이 두 기의 탑은, 절 아래쪽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이 탑 중에 영산전 방향으로 있는 석탑은 옥신석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갖다가 놓았는데. 이곳이 감실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 같다.

석남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외에, 대웅전과 석탑, 그리고 마애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전각들이 자리한 석남사. 여름철 녹음이 짙어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란 생각에.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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