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쓴다. 무덤을 ‘유택(幽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영혼이 쉬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구조나 형태가 달라진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이나 동굴 등에서도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초기 형태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무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 널무덤이 유행한다. 널무덤이란 땅을 판 후 그 안에 주검을 넣고 널을 덮는 형태이다. 여기서 말하는 널이란 돌로 된 것을 말한다. 널무덤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지며, 그 뒤에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무지무덤,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묘의 형태인 고인돌

고인돌 등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든 형태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규모 분묘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산청군에 소재한 전 구형왕릉의 묘처럼 많은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석묘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분묘의 역사는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무덤의 형태로 보인다.

그 이전의 묘의 형태인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근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들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있다. 현재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육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을 보면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능지대나 바닷가 등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물을 사용해야 하는 인간들의 생활 때문에 이런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물이 있는 곳에 인류가 집단으로 서식을 하였고, 그런 곳에 고인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형이라고도 한다. 커다란 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삼면은 커다란 돌로 막고, 입구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가벼운 돌을 쓴다고 한다. 전라북도 고창군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지역이다. 고창지역 고인돌은 2003년에 205개 군집에 1,665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이후 2005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1,327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으며, 2009년 군산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유산으로 등제된 고창고인돌유적을 제외한 174개 군집에 1,124기가 보고되었다. 따라서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600여기이상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작은 안내판에 ‘도산리 고인돌 1km’라고 적혀있다. 이 도산리고인돌은 특별하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간 곳은 한창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 꽤나 거대한 탁자형 고인돌 한 기가 보인다. 이곳 고인돌은 아름답다고 하여, 많은 책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망북단’이라는 슬픈 이름도 가져

이 도산리 고인돌은 석축 위에 놓여있으며 주변에는 커다란 돌들이 널려있다. 그 중 한기가 탁자형으로 서 있는데, 굄돌의 높이는 어른 키만하다. 그리고 위에 올린 탁자형의 덮개석은 길이가 3.5m 정도에, 정면 입구의 길이도 2.5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의 두께도 50cm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이 탁자형 고인돌이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고인돌을 ‘망북단’이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 이 마을의 의병장인 송기상(1612 ~1667)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기상은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적을 향해 진군을 하던 중 삼전도의 굴욕적인 패배가 알려지자, 이곳으로 되돌아와 평생을 ‘망북통배’(임금이 계신 궁을 향해 날마다 곡을 했다는 뜻)를 했다는 것이다.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의 손길이로 짐작하시길... 

한 의병대장의 통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도산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1981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고창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자, 사적 제391호로 승격이 되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산리 고인돌. 주변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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