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란, 그야말로 집 안 뜰 한편이나 귀퉁이에 작은 밭을 말한다. 요즈음은 이런 텃밭의 개념이 달라졌다. 흔히 주말농장이라고 해서 집에서 떨어져 있는 밭을 임대해 일 년간 농사를 짓기도 하니 말이다. 또는 대문이나 벽 밑에 화분 등 여러 가지 식물을 키울 용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먹을 수 있는 채소 등은 스스로 키우기 시작했다. 집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마당에 깔라놓았던 보도블록 등을 들어내고, 그 곳에 채소 등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농산물까지 수입품이 급증하자, 이제는 가족들을 위한 먹거리를 직접 재배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담겨있어 더욱 아름다운 텃밭들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은 땅 한 뙤기도 함부로 놀리는 법이 없다. 고추를 심거나 상추, 혹은 옥수수라도 심어 놓는다. 상추 같은 것이야 여름 내내 즐길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다. 멀리 타지에 나가있는 자녀라도 찾아오면, 정성스레 텃밭에서 가꾼 상추며 고추 등으로 정성어린 밥상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집 뒤편 비탈에는 호박을 심는다. 이 호박 역시 가을이 되면 대개 자손들에게 나누어 줄 용도로 사용한다. 몇 포기 심지 않은 옥수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텃밭에는 별별 것들이 다 심겨져 있다. 그리고 그 몫은 순전히 자녀들의 것이다. 손수 품 들여 농사를 지은 것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어머니의 마음. 텃밭에 정겨운 것은 바로 그런 마음이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그거 거름만 준 것이야”

 

어머니의 텃밭은 조그맣지만,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은 그 어딴 것보다 값지다.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등 굽은 어머니가 산에서 부엽토 한 삽을 떠오시느라 땀을 흘리신다. 그리고 그 부엽토를 텃밭 여기저기 소복하게 쌓아준다.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 채소가 참 자랐네요.”

“그거 비료 안 준 것이지. 아이들이 먹을 것에 벌레 좀 생긴다고 비료를 주면, 우리 아이들이 안 좋아질 것 아녀. 그래서 벌레도 내가 다 손으로 잡아주어”

 

어머니의 마음이 고맙다. 자손들에게 화학비료를 준 채소를 먹이지 않겠다고 뙤약볕에서 채소의 잎을 들춰가며 벌레를 잡고 있는 노모의 마음을 자식들은 제대로 알기는 할까? 텃밭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다.

 

 

벌레를 잡겠다고 텃밭에 친 화학약품

 

시골에 텃밭이 있다면, 도심에는 작은 공간마다 놓인 화분 텃밭이 있다. 화분이나 스티로폼 빈 박스를 이용한 텃밭들은 별별 것이 다 심겨져 있다. 심지어는 작은 스티로폼 상자에 고구마도 보인다. 요즈음 도심의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채소들 덕분에 한결 기분이 맑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한 곳을 보니 잎에 무슨 허연 반점들이 보인다. 벌레가 생긴 것을 걱정해, 화학약품을 준 것 같다. 집안 식구들이 먹을 것에 저렇게 잘 키운 채소에 화학약품이라니. 괜한 걱정이 앞선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곁으로 지나는 어르신이 한 마디 하신다.

 

“집에서 잘 키운 채소에 저렇게 화학약품을 주면 우짜노? 그냥 벌레 좀 먹어도 가족들이 먹을 것인데, 함께 나누어 먹어야지”

 

자연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키운 채소. 그리고 그 텃밭에서 함께 자란 어머니의 마음. 텃밭의 미학이란 바로 그런 마음일 것이다.

지난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지인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돌아왔다. 여기저기 들려 집으로 오니, 문 앞에 커다란 박스가 하나 놓여있다. 그 전에 전화로 통화를 했기 때문에, 무엇인지 짐작은 간다.

 

오빠 아직도 혼자 있어?”

달라질 것이 없잖아

그럼 내가 다음 주에 밑반찬 좀 해서 부쳐줄게

바쁜데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그러냐. 아무 것이나 먹고살면 되지

 

그런 통화를 하고 난 후에 도착한 소포인지라, 그것이 무엇인지는 풀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정말 잊고 살았다.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을 그저 세상에 혼자인 듯 살았다. 이제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혼자인지, 아니면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할 짓은 아니란 생각이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주변이 그렇게 되었다.

 

아이들과는 어쩔 수 없이 전화도 하고 가끔은 얼굴을 보기도 하지만, 형제들과는 한참이나 잊고 산듯하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 살다가보니 그렇게 되었다. 막내여동생은 가끔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고는 하지만, 천성이 차가워서 그런지 한 번도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던 것만 같다.

 

 

그런 막내가 전화를 하고 오빠 생각을 해서 반찬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상자를 열어본다. 별별 것이 다 들어있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늘 생각만 하고 있던 달래장까지 챙겨 넣었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오빠의 식성을 기억해내고 있는 막내.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진다.

 

나이가 먹으니 사람들이 그리워져

 

나도 이젠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하긴 20년이란 세월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그 오랜 세월을 혼자이면서도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에 감사를 할 수밖에. 아마도 주변에 워낙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한 것도 결국은 일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답사를 하고, 돌아오면 글을 섰다. 그러면서 혼자라는 생각을 잊은 것만 같다.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외로움 같은 것은 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주변 사람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아직 고맙다라는 표현 한 마디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제 나이가 먹다가 보니 그래도 생각나는 것이 가족이란 단어인 듯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한 세상을 살아가는 수밖에. 그것조차도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겨서 보내준 마음

 

늦었다. 한참이나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늦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잊지 않고 마음까지 담아 보내준 막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막내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라는 말을 한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다. 그 한 마디가 어찌 그리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이제는 그동안 외로움을 잊을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 것만 같다. 지금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고마움이라도 표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잃고 살았던 입맛을 되돌릴 수 있도록, 마음까지 담아 보내준 막내의 선물에 오늘 저녁 밥상은 꽤나 푸짐하게 차려졌다.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기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길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찬바람이 많이 불어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화성을 돌 때 딴 곳보다 더 춥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수원천과 방화수류정의 용연과 같은 물이 있기에 조금의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만 그보다 더한 이유는 바로 바람을 막아 줄 건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날보다 겨울이 많이 춥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봄부터 가을까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과거 장용영의 군사들이 화성을 지키기 위해 순례를 돌고, 초소 등에 머물고 있었을 당시는 지금보다 몇 갑절은 더 추웠을 것이다.

 

 

몸에 밴 정조대왕의 백성 사랑

 

이번 19일에 대선이 있다.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는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겠느냐고 물어온다. 또한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묻는 것이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사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동북공심돈(위)과 문을 들어서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12월 5일 수원에는 3시간 여 만에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27년 만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믈론 12월 초에 이렇게 왔다는 뜻이다. 다음 날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눈이 온 다음날은 칼바람이 불었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추운 겨울, 눈이 내리고 난 뒤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봉돈(위)과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그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동남각루와 그 밑에 마련한 온돌방. 화성에는 구조물 곳곳에 온돌방이 있어 군사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렇다고 볼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눈에도 참으로 고졸한 정자란 느낌이 든다. 정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끔히 단장이 된 정자는 어디 한 곳 흠 잡을 곳이 없다.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 소재한 택풍당. 양동에서 여주 북내면으로 나가는 길목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택풍당을 만날 수가 있다.

 

택풍당은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이식 선생이 제자와 자손들을 가리키고,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정자는 이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사방에 난간이 없이 누마루를 놓고 중앙에 작은 방을 드렸다. 그저 조촐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택풍당은, 뒤숭숭한 정국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식 선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바람따라 흘러온 것일까?

 

이식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사대가이자 대문장가로 알려졌다. 자는 여고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누각의 이름도 자신의 호에 바람풍(風)자를 넣어 지었다. 아마 자신이 바람을 따라 이곳에 왔음을 뜻하거나,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 및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10년인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택풍당은 선생이 낙향한 이듬해에 지었다. 가을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있을 때, 지나던 길에 우연히 찾아들어 간 택풍당.

 

 

 

첫눈에도 참으로 조촐한 누각이란 생각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담장을 둘러치고 작은 문을 낸 택풍당은, 중층 누각의 형태로 지어졌다. 아래를 막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창호도 가장 흔한 것으로 했다. 주인은 어디 하나 검소하지 않음이 없다.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한 작은 집

 

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집주위를 돌며 들여다 본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서 큰마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가운데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반듯하면서도 화려함을 피한 택풍당의 모습 때문이다. 폐모론이 일자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곳 쌍학리 촌마을로 찾아 든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도 택풍당 주변에는 몇 집 되지 않는다. 40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몇 집이나 있었을까? 아마 이곳에 내려와 세상 인연을 끊고 후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낙을 삼았을 것만 같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이처럼 조촐하고 고졸한 누각은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작은 집. 그 곳에서 큰 교훈 하나를 얻어간다. 세상 시류에 물들지 말고 초연하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가 않다. 국어사전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1.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 2.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3.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4.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5. 열렬히 좋아하는 이성의 상대」를 말한다고 적고 있다.

많은 사랑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은 역시 이성간의 애틋한 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를 한다. 이성에 대한 감정표현을 사랑이라고 볼 때, 그 사랑이란 것이 과연 나 하나만의 감정표현으로 끝나는 것일까?

옥에 갇힌 춘향이를 찾아간 이몽룡(남원 춘향 테마파크에서) 


사랑이 첫 눈에 반해 생기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첫눈에 반했어’ 라는 말을 쓴다. 물론 첫눈에 반할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꿈꾸는 이성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느낀다면 첫눈에 반할만하다. 하지만 이 ‘첫눈에 반했어’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더 많은 후회할 일을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은 책임을 배제한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책임을 함께 수반해야 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내 맘대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과 좋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도,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 많은 불상사를 야기하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 것’은 사랑이 아닌 좋아하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 첫눈에 반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이성에게 다가갔다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가 일쑤이다.


젊은이, 사랑을 할 준비는 돼 있나?

지금은 세상이 변해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구별을 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좋으면 ‘하룻밤 풋사랑’이라도 즐기려고 한다니.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성간에 사랑이란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말을 하면 일부의 식자인체 하는 사람들은 ‘대충 좋아하면 서로를 원하는 것이지, 개고 같은 마음의 준비는 해 필요한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성간의 사랑이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와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고, 내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저 ‘나도 이성이 있다’라는 정도로 자랑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서로간의 신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기에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 서로가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라는 것은 물론 마음의 상태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사랑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의 이성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관계를 갖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좋았다는. 그래서 ‘쿨하게 헤어졌다’는.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요즘 시쳇말로 쿨하게 헤어짐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노장 한 분이 사랑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질문을 하신다. “너는 사랑할 준비는 돼 있느냐?” 준비가 필요하냐고 반문을 했다. 당연히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요즘 사랑은 사랑이 아닌 탐닉에 불과하다. 정말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울 것도 없다. 사랑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상대를 충분히 알아야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알아감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다. 너무 빨리 탐닉을 한다면, 그 탐닉이 끝나면 서로에게 실망을 하게 되고, 그 다음은 헤어짐이란 아픔이 기다리게 된다. 하긴 그런 탐닉을 전제로 했다면 아픔도 없겠지만. 그래서 사랑은 준비가 필요하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사랑이란다.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사랑을 할 준비는 돼있냐?”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