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문화재로 지정된 동종 중에 국보는 4점뿐이다.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 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용주사 동종 또한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종을 들어 올리는 형태로 제직을 한 용뉴 등, 화려한 장식과 뛰어난 조형미가 아름답다.

 

또 하나의 동종은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으로 국보 제280호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상원사 동종

 

오대산 상원사에는 우리나라 동종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5월 6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소재 고려암의 신도들이, 하루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삼사순례에 간다고 하여 길을 따라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그리고 여주 신륵사를 돌아보는 순례길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상원사로, 제일먼저 동종을 보려고 종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다녀온 지가 꽤 오래서인가, 상원사의 입구서부터 옛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종각도 옛 자리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모조 종을 만들어 놓고, 국보인 종은 유리로 벽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그 옆에는 종각을 새로 짓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마 이 순례길에 만난 국보 상원사 동종의 진본을, 밖에서 만나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비천상에 빠져들다

 

내가 상원사 동종을 처음 만난 것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났는가 보다. 그 처음의 만남에서 난 종각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종에 새겨진 비천인 때문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비천인들은 금방이라도 종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두 번인가 종을 만났다.

 

 

 

상원사 동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발톱을 고추 세운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이 비천상은 비파와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어, 당시의 음악을 연구하는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구슬과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현존하는 한국의 동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 24년에 조성이 되어,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힘이 있게 표현한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아름다운 문양으로 조각된 상대와 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이 되었다.

 

이 상원사 동종은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우리나라에서 주조되는 모든 종에 계승된다. 뛰어난 이름다움을 보이는 상원사 동종. 그리고 그 동종에 조각된 비천인상. 난 이번에도 그 비천인상에 빠져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어서가자’고 재촉하는 일행들을 뒤따라 내려가면서도, 내내 그 비천인이 어느새 내 머리 위를 날아오를 것만 같아서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사인비구의 범종은 각기 독특한 형태로 제작이 되어,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사인비구의 범종은 8개의 종이 나름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다양한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

사인비구의 동동 중에서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동종(보물 제11-1호)이다. 서운암 동종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물 제11-2호 문경 김룡사 동종과 제11-3호 홍천 수타사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딴 종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 형태로는, 보물 제11-4호인 안성 청룡사동종과 제11-8호로 지정된 강화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된 양산 통도사 동종은 팔괘를 문양으로 새겨 넣어 딴 사인비구의 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욱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겨 넣는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는 방법을 택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보물 제11-5호인 서울 화계사 동종과 보물 제11-7호인 의왕 청계사 동종 등이 있다. 이렇게 8기의 보물로 지정된 종들은 독창성을 갖고 있어 당시 범종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범종의 전통성을 따른 안성 청룡사 범종

청룡사의 동종은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4년에 제작한 안성 청룡사 동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색다르다.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에는 대나무 모양으로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용뉴에 새겨진 용은 네 개의 발로 종을 붙들고 있는 형상이며, 이마와 볼에는 뿔이 나 있다. 얼핏 보아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용뉴에 보이는 조각 하나만으로도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이는 것이 사인비구의 동종이다.


포탄 모양 종신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둘렀으며, 어깨띠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을 한 줄씩 새겨 넣었다. 밑으로는 사다리꼴 유곽 4좌가 있고, 그 사이에는 각각 연꽃 가지를 든 4기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폐가 한 쌍으로 마련됐다.

유곽은 각각 사다리꼴로 사방을 두 선으로 이루어 선 안에 꽃잎이 그려져 있고, 여기에 유두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 위폐 안에는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서울 화계사 동종에는 같은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이러한 범종의 제작기법은 17세기 중반에 정통 승장계 장인들이 주로 쓰던 기법으로 전한다. 사인비구가 30대 때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안성 청룡사 사인비구주성동종은, 지준, 태행, 도겸, 담연, 청윤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범종계열이다.

작은 종에 새겨진 불심

사인비구는 왜 이렇게 범종을 만들었을까? 물론 승장(僧匠)으로써 신라 범종계의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를 돌면서 종을 만들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나의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룡사 동종도 종루의 종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웅전 안에 보관하고 예불 시에 이 종을 이용한다.



사인비구는 이 종 하나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도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이 종을 제작하면서 그 업보가 가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승장으로서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안에는 사바세계에 사는 많은 중생들의 업장소멸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서 두드려도 맑은 소리가 울려나는 청룡사 동종. 그 안에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무형의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세속의 더럽혀진 귀를 씻고, 마음의 편안을 얻으라는 사인비구의 간절함이 깃든 것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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