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 그 안에 구조물 중 하나인 각루란 높은 위치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각루는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에서 성의 안과 밖으로 가장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팔달문에서 남공심돈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며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듯 가팔라지는 성 안에 자리한다. 이곳에 동남각루를 세운 것은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남공심돈과 마주하면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구조물 ‘각루(角樓)

 

화성에는 모두 네 곳에 각루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용연을 바라보고 있는 동북각루이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하여 화성이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답게 지어졌다. 방화수류정은 별도로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답다. 또 하나는 용도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로, ‘화양루’라고도 부른다.

 

서북각루는 가을 철 화성의 억새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화서문의 남쪽 145보 정도 거리에 산 위로 성이 휘어져 굽어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각루들은 모두 정자와 같은 형태로 지어져, 나름의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누(樓)’란 다락처럼 층이 지게 꾸민 것이니,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닌, 정조의 강한 왕권을 상징

 

정조대왕의 효심이야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임을 목격한 정조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묘를 정조 13년인 1789년에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 화산(현 화성 융능)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여 효성을 다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치했다. 당시 장용외영은 실로 막강한 당대 최고의 무사들이었다. 그 무사들이 47,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화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조가 화성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은, 노론벽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양을 벗어나 강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많은 정사를 처리하였으며,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행궁에서 펼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능 행차 시에 화성 행궁에서 머물며 과거시험을 치룬 것을 보아도,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다.

 

동남각루에 보이는 정조의 애민(愛民) 정신

 

동남각루는 화성 내에 있는 군사시설물이다. 높은 곳에 세워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이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동남각루와 마주하며 남수문을 보호하던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서 훼파가 된 뒤 복원을 하지 못하였다. 동남각루가 짝을 잃은 채, 복원이 된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단지 화성의 군사 시설물 중 하나인 동남각루를 보고, 어떻게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아낼 수가 있을까? 동남각루는 중층 누각으로 마련하였다. 정면과 측면 두 칸으로 마련한 동남각루는,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도깨비 그림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한편으로 계단을 놓아 위로 오르게 하고, 밑으로는 삼면을 막고 한편에 문을 달아냈다.

 

그리고 서편으로 연도를 뽑아 굴뚝을 내었으며, 동편에는 이궁이가 보인다. 바로 이 동남각루의 아래층에 온돌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사들이 겨울에도 춥지 않게 하기위하여 온돌방을 드린 것이다. 화성이 시설물들을 보면 이렇게 온돌을 놓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성의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시설물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것은, 그 안에는 단순히 성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심과 강한 왕권을 위한 노력, 그리고 부강한 나라의 건설과 애민정신 등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시설물인 동남각루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거리는 440m에 불과하다.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으로 정한 이 곳에는 동이포루와 동삼치, 그리고 성벽 안으로 떨어져 지은 동남각루와 급격한 경사면 밑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천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다. 남수문은 올해 6월 9일 90년 만에 복원이 되었다.

 

화성 축성 당시 축조를 하였던 남수문은 1842년과 1922년의 대홍수로 인해, 두 차례나 유실이 되었다. 일제 때에는 그나마 남은 것을 철거시켜 터만 남아있던 것인데,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면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거쳐, 어떠한 비에도 무너지지 않는 최신공법을 이용해 복원을 하였다.

 

 

 

밖으로 돌아보는 축성의 극치

 

이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인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길은, 사실 화성의 외벽을 돌아보면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다. 이곳까지 화성의 겉모습이 다양하게 변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벌써 이 구간을 답사한 날짜가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화성이 변한 것이야 아니겠지만, 이렇게 뒤늦은 답사기를 쓴다는 것은 사실 답사의 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답사를 한 날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뒤로도 이 구간을 몇 번인가 지났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답사를 한 것은 화성문화제 기간인 10월 7일이었으니, 그 때의 시각으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화성 외벽으로 답사하다가 보면, 꽤 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성 밖 길을 걷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간을 특히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남수문과 팔달문 인근에 재래시장이 몰려있어, 시장구경을 마치거나, 지동시장 순대타운에 들렸던 사람들이 성을 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곳은 지형의 격차가 크고, 더구나 화성에 두 개의 수문 중 한 곳인 남수문이 있어 사람들이 외부로 관람을 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동이포루와 동삼치를 지나다

 

포루는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시설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구조물이다. 동이포루는 봉돈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며, 치 위에 세웠다.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3일에 완성을 한 동이포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밖에서 보는 동이포루 위에는 사람들이 쉬고 있는 듯, 왁자하니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밑에서 올려다본 동이포루의 날렵한 지붕이, 지금이라도 당장 날아오를 듯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이다. 성벽 위에 지은 전각 하나하나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곳, 그것이 바로 화성 외곽을 돌아보는 즐거움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지난 듯, 돌보다 색이 다르게 변한 동삼치로 향하다가 보면, 그 성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깊다. 이 돌들은 200여 년 전 화성 축성당시, 팔달산, 여기산, 숙지산, 궐동 등에서 날라 온 것들일 것이다. 200년 세월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동남각루와 남수문의 조화

 

동삼치를 지나 조금 더 걷다가 보면 갑자기 성벽이 변한다. 그 위를 보면 지붕 끝만 삐죽이 얼굴을 내민 동남각루가 있다. 이곳은 평지를 이루고 있던 성벽이 갑자기 이래로 곤두박질을 한다. 성벽을 둥글게 감아 들이고 아래로 층층이 여장을 놓은 곳, 그 아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중간 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남각루는 높은 곳에 남공심돈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 중 한 곳이다. 각루는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를 하였으며 주변을 잘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데, 예전 이 동남각루에 쉬고 있던 장용영의 병사들은, 그 밑으로 펼쳐지는 장시의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밑으로 고꾸라지듯 떨어져 내리는 성벽. 그리고 그 밑으로 서 있는 남수문. 아마도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 등을 함께 조망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 화성의 아름다운 곳 중 한곳이 아니었을지.

 

아홉 번째 그간을 걸으면서 또 다시 느끼는 것은, 역시 화성은 겉돌기를 할 만한 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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