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을 가서 살았다는 ‘궁집’을 돌아보고 난 뒤 앞 정원을 거닐다가 작은 석교(石橋)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리를 건너보니 작은 돌다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가 않은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작은 돌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자라, 다시 다리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2.5m 남짓인 이 돌다리가, 그냥 예삿다리가 아니라는 알았다.

 

 

 

하나의 돌로 조형한 돌다리

 

돌다리는 둥글게 위가 불룩하니 구름다리 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양편 다리 끝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해태가 앉아있어, 사방에 해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다리는 턱이지게 올려졌다. 다리의 옆부분에는 길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바닥을 놓고, 그 밑으로는 원형의 꽃문양을 세긴 버팀목을 질렀다.

 

그런데 이 다이가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갖은 조형물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어디 한 곳도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갖고 참 정교하게 조형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어디 한 곳이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놀아운 조상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

 

돌다리를 살펴본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 돌다리는 커다란 화강석 한 장을 이용해 조성을 한 것이다. 조형물을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커다란 돌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 작지 않은 돌다리를 한 장의 석재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 조상님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긴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을 보고 있노라, 서산에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적도 있었다. 부도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에 새겨진 받침의 용두와 머릿돌의 꿈틀거리는 용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한 뛰어난 석재를 다루는 선조들이었다.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널린 석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내 위에 걸린 이 돌다리는 그것들 중에서도 눈에 띤다. 단 한 장의 석재를 깎아내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이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 돌다리 하나가 7월 17일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답사를 한 나에게, 선조들의 배려인 듯해 고맙기만 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번지, 모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유마사. 유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승보종찰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유마사에 대한 기록은 『동복읍지』와 『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 무왕 28년인 627년에 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다. 당시 유마운이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의 탑의 남아있다. 유마운의 딸 보안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 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유마사의 창건연도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보안이 놓았다는 다리 보안교

유마사는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안으로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등산로로 만들어진 도로는 양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으며, 한편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8월 21일 찾아간 유마사. 입구서부터 길은 양편으로 갈라진다. 등산로로 이용하는 우측 길과, 일주문을 통과하는 좌측 길이 있다.

일주문이 보이는 좌측 길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아놓았다. 저렇게 위태롭게 몇 날을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돌탑이 허물어지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계곡가에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호 ‘보안교’라고 적혀있다.



명문이 적혀있는 자리

1400년 전에 놓았다는 보안교

당에서 건너왔다는 유마운.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왜 딸 보안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그리고 보안은 왜 멀지 않은 곳에 보안사를 창건한 것일까? 그런 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없다. 다만 보안이 채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 냇가에 걸려있을 뿐이다.

만일 이 보안교가 전설대로 보안이 놓은 다리라면, 이미 그 역사는 1400년이나 된다. 아마도 자연석으로 만든 다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석조다리일 것이다.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는 보안교. 양편을 철책으로 막아놓아 출입을 금지시켰다. 예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 유마사로 출입을 했을 것이다.

다리는 계곡 동서양편을 걸쳐 연결하고 있다. 길이는 510cm 정도이고, 너비는 넓은 곳이 315cm, 좁은 곳은 200cm 정도이다. 화강암 일석으로 만들어진 보안교는 그 두께가 55cm 정도이다. 이 보안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1919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보안교에 얽힌 전설대로 1400여년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단 한 장의 널다리로 꾸민 보안교

커다란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은 보안교. 흔히 ‘널다리’라고 하는 이 보안교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으로 된 단 한 장의 석재를 계곡 양편에 걸쳐 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돌다리는 전통적인 돌다리와는 그 형태가 판이해, 그 조성 연대를 추정하기도 쉽지가 않다.

일설에는 유마사 기록인 1919년에 쓴 <동북군유마사봉향각창건상량문>에 나타나기 때문에, 1919년 이전에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전설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돌다리에는 두 곳에 명문이 적혀있다. 계곡 아래쪽에는 ‘유마동천보안교’리고 적었으며, 계곡의 북쪽에는 ‘관세음보살 양연호’라고 엷게 음각을 하였다. 글씨의 크기나 그 새겨진 깊이 등으로 보아, 이 명문은 후대에 양연호라는 인물이 팠을 것으로 보인다.


이 보안교의 역사는 유마사를 살펴보면 전설에 기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유마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보물 제1116호 유마사 해련부도의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이전에 보안교를 건너 유마사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여 진 유마사 보안교. 그 안에 얽힌 전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답사를 하다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다가 보면, 답사의 일정이 늦어지기도 하지, 그도 또한 답사의 묘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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