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묘낭자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하는 부석사
서산 부석사(浮石寺). 우리는 흔히 부석사라고 하면 경상북도 영주시에 소재한 부석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와 같이 한자로도 사찰명이 일치한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 한 절로 전해진다.
부석시 일원은 도비산의 강무지로 알려져 있다. 강무지란 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군사훈련을 한 곳임을 말한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이 1416년 2월 16일 3남인 충령대군(후 세종)과 함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임금이 직접 참여한 이러한 군사훈련을 ‘강무(講武)’라 칭한다.
훈련이 끝난 후 태종과 충령은 해미현에서 숙박을 한다. 원래 이 강무일정은 2월 8일에 서산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2월 10일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11일에 태안 순성에 이르러 15일까지 굴포의 개착상황과 여러 곳을 거쳐 도비산에서 강무를 연 것이다. 태종이 이곳을 강무지로 택한 곳은 도비산 일원이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큰 돌이 허공에 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석(浮石)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4년인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은 큰 뜻을 품고 당으로 가서 지엄법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의상이 있던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가 의상스님에게 반하고 만 것. 그래서 문무왕 1년인 661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선묘낭자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밝혔다. 하지만 의상은 스님이기 때문에 허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자 선묘낭자는 스님의 복색을 하고 의상을 따라가 평생 시종을 들 것이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해동 조선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상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묘낭자를 위해, 절을 세워주기로 하고 절터를 찾던 중 서산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절을 계속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 때 큰 바위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오더니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큰 바위로 너희들의 머리를 다 부수어놓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허공에서 소리를 친 것은 바로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절 이름은 도비산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부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이다. 결국 이 부석사는 큰 바위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시민기자들이 찾아간 부석사
2박 3일 일정으로 떠난 e수원뉴스 시민기자 워크숍. 그 첫날인 8월 28일 서산 해미읍성을 거쳐 간월암의 풍광을 만난 후 찾아간 부석사. 지난 해 11월 이곳을 들려간 후 10개월 만에 다시 찾은 부석사이다. 이곳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픈 곳이다. 이 부석사에 봉안이 되어있던 700년 전인 고려 충숙왕 때 부석사에 봉안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전문 절도단에 의해 일본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반입이 되었다.
이 절도단은 자신들이 도적이 아닌 애국자이기 때문에 범법자로 재판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국민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한 아픔이 있는 절 부석사를 찾은 시민기자들. 경내를 다니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꼼꼼히 기록을 하기도 했지만, 과연 이 부석사에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고는 있는 것일까?
선묘낭자의 모습을 담아 모셔놓은 선묘각에 들려 삼배를 올린 후 다시 새롭게 조성한 마애불상 앞으로 다가선다. 저 밑에 보이는 마을길을 달리는 차들이 조그마한 장난감만 같다. 마애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여정의 무사함을 기원한다. 그리고 의상스님을 사모해 애틋한 사연만 남기고 용이 되었다는 선묘낭자가 다시는 그런 아픔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전해본다.
수원 봉녕사 석물에 우담바라 피었네.
흔히 사람들은 우담바라를 풀잠자리의 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경에는 우담바라는 영서화라고 하여 3,000년 만에 한 번 피는 엄연한 꽃이라고 했다. 이 우담발화는 우담화, 기공화, 영서화, 우담발화 등의 이명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5가지의 성스러운 나무 중 하나라고 귀히 여겼다.
산스크리스트 학자들은 이 우담바라를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꽃이 피는 식물이지만, 너무 작아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인도에서는 이 우담바라를 ‘이 우담바라는 하루 이틀 정도 피어있는 꽃으로 보기가 어려워, 천복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은 볼 수가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불경에는 여러 곳에서 우담바라에 대해서 적고 있다. <무량수경>에는 이 꽃이 사람들에게 보이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고 하였으며, <혜림음의>에는 여래가 나타날 때 꽃이 피고, 전륜성왕이 세상을 다스리면 감복하여 꽃이 핀다고 하였다. 이러한 우담바라 25송이가 봉녕사 대웅전을 오르는 석교 옆 돌에 핀 것이다.
“거기 우담바라 피었어요. 찍어 가세요.”
10월 5일 오전 9시,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린다고 하여 봉녕사를 찾았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절 경내 이곳저곳을 촬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 양편에 걸친 연못에서 분수가 솟아오른다. 물보라에 무지개가 서려 그것을 찍으려고 하는데. 한 처사가 말을 한다.
“거기 우담바라가 25송이가 피었어요. 그것 찍어가세요”
“어디 말입니까?”
“그 돌에 피었잖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로 작은 풀씨 같은 것들이 붙어있다. 이럴 때는 좋은 카메라 한 대가 정말 그립다. 가까이대고 몇 장 사진을 찍는다. 그동안 우리가 우담바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들을 보면, 흔히 축축하고 습기 찬 곳이나 풀잎 등에 많이 생성을 해 사람들은 풀잠자리 알이라고 늘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봉녕사 우담바라는 연못 옆이기는 해도, 세워 둔 돌에 자라나 있다. 풀잠자리 알이라고 한다면, 한 낮의 더위에 이미 말라버렸을 것이다. 모처럼 사찰음식 대향연에 들렸다가 3,000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를 보았으니, 아무래도 상서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땅바닥에 털벅 주저앉아 사진을 찍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시면서 한 마디 하신다.
“처사님 우담바라를 보기만 해도 좋다는데, 그렇게 땀을 흘리시면서 사진을 찍었으니 아마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겠네요.”
참으로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이것이 3,000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가 아니라도,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우담바라가 아니든가? 마음속에 핀 우담바라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 것이란 생각이다. 세상에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기에.
소하천 정비, 생태는 고려한 것일까?
엊그제인가 트윗을 통해 글 하나를 접했다. 정부가 4대강의 지류를 정비하는데 또 예산을 세운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아직 그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4대강의 지류만 아니라 소하천도 정비를 한 곳이 여러 곳 있다.
4대강으로 유입되는 지류 및 소하천 정비는 4대강 공사와 맞물려 한 곳도 있다. 상습침수지역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침수를 당했는지는 모르겠다. 2~3년 전부터 소하천을 돌아보다가, 소하천 정비가 과연 올바른지 고민하게 됐다. 난 하천 전문가도 아니고 환경전문가는 더 더욱 아니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내가 보아도 문제점을 안고 있는 소하천 정비 사업을 왜 꼭 해야만 하는지. 혈세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다.
돌을 이용해 쌓은 소하천의 둑. 경사가 급하고 거의 직강천으로 조성을 해 소와 여울 등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여울목과 소가 사라진 소하천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하림리 근처를 흐르는 한천. 2007년부터 소하천인 한천 정비가 시작해 마무리를 한 곳이다. 하천 바닥을 고르고, 양편에 높게 둑을 쌓았다. 물론 그 일대가 상습침수지역이라, 침수를 방지하기 위한 공사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사를 마친 한천을 돌아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라진 여울목이다. 수변환경이 원활하게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하천이 사행(蛇行)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천의 공사는 구불거리고 흐르던 한천을 거의 직강화 함으로써 여울이 사라졌다.
자연적인 사행천이라면 물이 굽이치는 곳에 여울과 소가 생기게 된다. 여울은 수심이 낮고 유속이 빠르다. 그런가 하면 여울로 인해 생기는 소는 수심이 깊고 유속이 느리다. 이런 사행천에선 상대적으로 어류가 살기에 필요한 많은 수소생물이 자라고 되고, 생태계가 원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직강화가 되면 여울과 소가 생기지 않아, 수소생물이 자랄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생태계의 순환 구조가 끊어진다. 거의 직강화 된 한천은 바닥을 똑같이 평평하게 만들어 생태계 활동에 알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경사가 급한 어도는 작음 물고기들이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어도 밑에는 물의 유속이 빠리구 낙차가 커 작은 물고기들이 맴돌기만 하고 있었다. 동행을 한 지역환경 관계자는 어도의 경사는 완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있으나 마나 한 어도
하천 중간에 작은 보를 만들어 놓았다. 보 옆에는 물고기가 다닐 수 있도록 어도를 설치했다. 이 어도를 보면서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 미리 물이 찰 것을 계산해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바닥에서 어도의 끝까지 20cm 이상 떨어져 있다. 작은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날아야만 할 정도다. 물이 이곳까지 찬다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소하천에 물이 이렇게 많이 흐른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남한강에 보를 만들면 당연히 그 지류에 속하는 한천까지 물이 차오를 것을 미리 계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어도를 지그재그로 물길을 내었다. 그런데 물 흐르는 속도를 보니 경사가 급해 유속이 상당히 빠르다. 취재에 동행한 환경지킴이 한 분은 '저런 어도라면 물고기가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라고 말한다. 소하천 정비를 하면서, 그런 것 하나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사가 급한 둑 위로는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 놓았다. 물길은 소나 여울 등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과연 생태를 위한 것일까?
경사가 급한 제방, 동물들의 위험지대는 아닐까?
한천을 정비하면서 둑 높이를 기존 둑보다 1m 이상 높여놓았다. 그리고 둑을 높인 곳에는 시멘트를 발라 도로를 만들었다. 차 한 대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갈이나 지류 등에도 양편에 모두 길이 나있다. 차가 다닐 정도 넓이다. 이 길은 환경지킴이들이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다닌다고 한다.
차도를 낸 길에서 하천 바닥까지의 경사가 급하다. 그리고 하천 쪽 제방은 돌을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 만일 이 경사진 곳에 작은 동물들이 들어갔다면 어떻게 될까? 큰 동물이라면 몰라도 작은 동물들이 소하천으로 물이라도 먹으러 들어가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제방이 과연 환경을 생각하고, 작은 동물들까지 배려를 해서 만든 것일까 의구심이 생긴다. 결국 작은 동물들이 들어갈 수 없는 제방이라면, 생태계를 지켜낼 수가 없는 제방이다.
소하천으로 유입되는 물길을 조절할 수 있는 수문. 물이 역류할 것을 대비했다고 하지만, 장마 등으로 소하천에 물이 차 있을 경우 마을에서 빠져 나가야 할 물들이 나갈 수가 없어 침수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소하천 정비. 이미 직강화 한 많은 하천들이 사행천으로 바꿔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남한강변의 몇 개 지류 및 소하천을 돌아보면, 하천 바닥을 천편일률적으로 파헤쳐 오히려 생물이 살아가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모든 생물이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날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가장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닐는지.
물과 돌, 그리고 소나무 숲길을 걷다
올레길, 둘레길... 요즈음 각 지자체마다 주변의 산책로에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걷기를 종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건강이나 관광객들의 즐길거리를 하나 더해준다는 기분 좋은 자연적 자원활용이다. 가끔은 이런 길에 있었나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길을 만나기도 한다. 워낙 사진을 찍는 재주하고는 메주인 나로서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전해 줄 수 없음이 늘 안타깝다.
지난 8일 찾아간 북지장사 가는 길. 대구 팔공산 올레 제1길이다. 소나무 숲길이 1.5km가 이어지는 길을 타박거리며 걷고 있노라니, 세상에 찌든 세상살이의 역겨움이 다 씻어지는 듯하다. 물과 돌, 그리고 소나무들이 정겨운 소나무 숲길.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아름다운 소나무 길. 언제 걸어도 좋을 듯
그저 터벅거리고 걸어도 20여분. 왕복 3km의 소남 숲길이다. 물과 돌이 함께 하는. 아이들과 걷기에도 적당한 거리인 이 소나무 숲길은, 그렇게 오랜 세월 객들을 기다리며 굽어보고 있었다.
(현장) 구제역, 설 연휴를 사수하라!
온 나라가 난리가 난 듯하다. 구제역은 올 설 연휴가 고비라고 한다. 사람들은 구제역으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교통이 번잡한 곳은 한 개 차선만 열어놓고 방역을 하기 때문에, 차가 있는 대로 늘어선다. 그래도 고통 받는 농촌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가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은 불평일 수 밖에 없다. 제대로 초기대응을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다.
지금은 이제 그런 불평조차도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290만 마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수많은 소와 돼지가 ‘살처분’이라는 방법으로 산채로 땅 속에 묻혔다. 죽은 것이라도 묻었다면, 그렇게 처참한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이번 설에 무슨 사단이라도 날 것처럼 전전긍긍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설 연휴에, 얼마나 많은 구제역이 여기저기로 확산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흙과 나무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쌓아 놓았다
“난 문화재 답사를 하러 왔을 뿐인데요.”
경상북도 영주로 향했다. 이천에서 차를 타고 문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예천을 거처 영주에 도착을 했다.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877번지에는 중요민속자료인 ‘괴헌고택’이 있다. 괴헌고택을 둘러본 후,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이동을 하고 있었다. 앞에 방역을 하고 있는 초소가 나타난다. 소독약을 잔뜩 뒤집어 쓴 후 안으로 들어가려니, 길을 모래를 쌓아 막아 놓았다.
“안으로 못 들어가나요?”
“예”
“저길 지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영주로 나가서 다시 돌아가세요.”
“그곳은 갈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죠. 돌아가 보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예, 문화재 답사를 하려고요”
“참 답답한 양반이네. 지금 구제역으로 인해 모두 죽기 살기로 난리인데, 무슨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듣고 보니 딴은 그렇다. 남들은 구제역을 막는다고 도로에 바리케이드까지 설치를 하고 있는 판국에, 문화재를 찾아다니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을 했을까? 괜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뒤돌아 나올 밖에. 지금 설 연휴를 맞이하여 마을에 변고가 생길까봐, 이렇게 주야를 가리지 않고 난리들을 치고 있다.
‘뚫리면 그만이다. 방법이 있다면 막는 일 뿐’
마을에서 돌아 나오다가 보니 내림삼거리에 ‘이산서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왕 답사를 나온 길이니 서원이라도 들려보려고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에는 타이어와 흙더미, 차량 등으로 길을 막고 있다. 앞에는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있다. 다시 돌아 나와 옆길로 접어들었다. 이곳도 폐쇄가 되어있다. 어디를 가도 길을 지날 수가 없다. 마을로 들어가는 모든 진입로들은 흙더미를 쌓아놓고 지키고 있다.
여기저기 몇 군데 길을 돌아보았지만 마찬가지이다. 모두 흙으로 길을 막고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고생들 하시네요. 날도 추운데”
“예”
“설에는 어떻게 하세요?”
“지금 설이 문젠가요. 설날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도 마을 진입을 막아야하는데 걱정입니다”
“정말 큰일이네요”
“예, 방법이 없어요. 무조건 출입을 막는 수밖에. 뚫리면 그만인데요.”
마치 전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길이라는 길은 모두 폐쇄가 되었고, 안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은 여기저기 빠짐없이 소독을 한다. 그런 연후에도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이번 설 연휴는 징검다리 연휴라고 한다. 그만큼 연휴 기간이 길다. 그래서 구제역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늘어난다. “설 연휴만 넘기면 수그러들 것 같아요” 스스로 위로를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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